소설리스트

비도덕적 안락함-12화 (12/100)

#12

아침 겸 점심으로 먹은 죽은 전복이 실했다. 속이 편하다는 이유로 차계원이 선택한 메뉴였다.

“커피 취향이 맞네요.”

부른 배를 두드리는 이서 옆에서 차계원이 커피잔을 흔든다.

“아……. 그러게요.”

둘은 차에 앉아 후식으로 아메리카노를 마시고 있었다. 적당한 산미가 향긋했다.

와작. 와작.

“안 추워요?”

추운 날씨에도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는 백이서를 보며 계원이 묻는다. 얼음까지 와작와작 씹고 있는 백이서는 정자세로 정면만 바라보고 있어, 뜨거운 김이 올라오는 커피잔을 든 차계원과 대비됐다.

“그냥……. 시원해요.”

“맛있게 먹네요.”

차계원이 몸까지 돌려 이서를 구경한다. 사실 이서는 계원과 밥을 먹고 커피를 마시고 있는 이 상황이 달갑지 않았다. 원래는 예상치 못한 과거의 인연 때문에 껄끄러운 정도였다면, 지금은 거북하기까지 했다.

꼭 제멋대로인 모습 때문만은 아니었다. 스포츠 학과를 전공하다 보니 대학 때 기합 명목의 불합리한 체벌도 경험해 본 바 있었다. 이른바 꼰대도 꽤 겪었고, 타고난 체격도 나쁘지 않아 맷집도 강했다.

그런데도 차계원이 불편한 건 그 특유의 온도 차였다. 살살 웃다가 욕을 하고, 뜬금없는 시점에서 멱살이나 머리채를 잡는다. 다음 행동은 또 어떨지 예측하기 어려웠다.

“왜 멈춰. 계속 씹어요.”

부담스러운 시선에 대충 씹은 얼음을 삼켜 넘기자 볼을 꾹꾹 누르며 부추긴다.

“출발해야 할 것 같아서요.”

이서가 부러 담담한 척 대답한다. 촬영이 두 시간 밀렸다는 건 두 시간 더 차계원과 함께 있어야 한다는 뜻이었다.

“재미없네.”

차계원이 실망스럽다는 듯 의자를 젖힌다. 출발할 때만 해도 뒷자리에 늘어져 있더니 조수석에 앉아 사람을 불편하게 했다.

“로드매니저가 할 일들은 알죠?”

분명 매니저 경험이 없다며 거절하려 했고, 그걸 무시한 채 시킨 거면서 태연하다.

“모니터해 드리고, 일정 확인하고……. 케어해 드리는 거 아닌가요?”

“잘 아네요. 모른다더니.”

“저도 이 바닥 사람이니까요.”

애초에 업무를 모른다는 건 거짓말이었다. 사실 태미나 성아의 매니저 노릇도 가끔 한 적 있었다.

“따라다니라는 거 잊지 마요.”

“……네.”

안 그래도 건에게 연락받은 참이었다. 차계원은 깐깐하니 계속 옆에서 분위기를 살펴야 한다는 당부였다. 이서가 슬쩍 곁눈질로 차계원을 본다. 그래 봐야 그의 기분을 파악하기는 어려웠다.

“이거. 그거죠.”

“예?”

운전하기 위해 벗어 둔 이서의 아이보리색 숏패딩을 만지작거리던 차계원이 그걸 제 배 위에 얹는다.

“커피 들고 쫄랑거리던 날 입은 거.”

“쫄랑…….”

“지 같은 것만 입네.”

중얼거리던 계원이 아예 패딩을 이불처럼 머리끝까지 덮고 잠을 청하듯 눈을 감았다.

* * *

30분 정도 걸려 도착한 실내 촬영장은 예상과 달리 따듯했다. 이서가 주머니 안에 챙겨 온 핫팩을 만지작거린다. 괜히 챙겨왔다 싶었다.

S/S 시즌 촬영에 맞게 산뜻한 연녹색 가벽들이 세워진 스튜디오는 봄 느낌이 물씬 났다. 촬영장에 들어서자 부산스러웠던 분위기가 한순간에 집중된다. 집중의 대상은 당연히 차계원이었다.

“안녕하세요!”

“와, 진짜 잘생겼다.”

“어서 와요. 계원 씨!”

곳곳에서 환대의 인사가 들려왔다. 차계원이 능숙한 동작으로 그들의 인사에 답해 주자 총괄 디렉터로 보이는 중년의 남자가 제일 먼저 다가온다.

“어이구. 안녕하십니까.”

차계원이 이서의 등을 살짝 민다. 그는 계원과는 구면이었다. 그 의중을 알아차린 이서가 예의 바른 인사를 건넨다.

“안녕하세요. 케이뉴 대표 백이서입니다. 오늘 잘 부탁드려요.”

“대표 맞으시구나. 이야. 훤칠하시네.”

안경을 슬쩍 올린 그가 너털웃음을 지으며 악수를 받아들인다. 그제야 눈치만 보던 스태프 몇이 주위로 몰려든다.

“어머 되게 젊다.”

“안 그래도 계원 씨 소속사 옮겼다는 기사 봤어요. 저 거기에 투자해도 돼요?”

“끼리끼리라더니 계원 씨 가는 데는 다 잘생겼나 봐.”

그들은 하나 같이 호의적이었다. 먼저 내미는 손들은 따듯했고 표정은 밝았다. 이서가 조금 어색한 기색을 애써 숨기며 차계원을 본다.

그 의미를 어떻게 해석했는지, 슬그머니 이서의 어깨에 팔을 걸친 차계원이 적당한 대답들로 대신 응대해 준다.

사실 그들도 진짜 말 걸고 싶은 대상은 차계원이었을 거다. 그래도 이런 대우는 이서에게 생소했다. 제게 비호의적인 사람은 없었으나 거의 본체만체하는 게 대부분이었다.

이 살가움이 생소하면서 또 나쁘지는 않았다.

“가죠.”

스태프들을 대충 물린 차계원이 대기실로 향한다.

“와…….”

이서가 들릴 듯 말 듯한 감탄사를 내뱉는다. 처음 보는 화보 촬영장은 생각보다 공간이 넓었다. 태미나 성아는 화보 촬영의 기회가 좀체 없어, 상상만 했었다. 스타일리스트로 보이는 이들과 작가, 스텝들이 구도를 확인하며 분주하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신기해요?”

“네……. 처음 와 봤거든요.”

그걸 누가 모르나. 저렇게 두리번대는데.

차계원이 좌우로 돌아가는 이서의 뒤통수를 본다. 한 걸음 걷고 두리번거리고, 또 한 걸음 걷고 두리번거리는 게 영락없이 주인 없는 개새끼다.

“헙!”

젖혀지는 이서의 어깨를 뒤에 있는 계원이 받는다. 갑작스럽게 목덜미를 잡아당기는 계원 때문에 입에서 큰소리가 나올 뻔했다.

“또 왜…….”

“누가 주워 가려 하면 소리 질러요.”

“소리요?”

“응. 크게.”

“갑자기 무슨 소리 하시는 거예요…….”

“대답이나 해요.”

“아, 알았어요.”

대답은 하면서 백이서의 표정은 심통 맞았다. 누가 봐도 불만을 말하고 싶은 모양새였다.

한 번 더 잡아당기고 싶은 걸 참은 계원이 목덜미를 놔준다.

“나 놓치지 말고요.”

어깨를 두어 번 두드린 차계원이 이서를 넘어지지 않을 정도로만 밀고 홱 가 버린다. 휘적휘적 걷는 큰 보폭의 걸음이 빠르게 멀어지고 있었다.

“잠깐만요, 같이…….”

백이서가 계원을 놓칠세라 허겁지겁 그 등 뒤로 바짝 따라붙는다. 그 다급한 몸짓이 재미있어 일부러 빨리 걷는다는 걸 이서가 알 길은 없었다.

“이미 준비 끝났나 봐요.”

계원은 촬영 컨셉을 듣기 위해 대기실에 앉아 있었고, 백이서는 그의 등 가까이 붙은 채 계속 구경 중이었다. 아직 계원의 스타일링은 시작도 안 했는데 촬영장은 모두가 스탠바이 된 상태였다.

“준비성이 좋은가 보죠.”

무심한 투가 심드렁하다. 대기실은 문을 열어 놓으면 밖이 다 보이는 구조였는데, 백이서는 그걸 이용해 요리조리 몸을 움직이며 보고 있었다.

“이렇게 즐거워하시니 다음에도 데려와야겠어요.”

눈을 곱게 접은 계원이 상냥한 얼굴로 선심 쓰듯이 말한다. 백이서는 세상 모든 게 궁금한 어린아이처럼 구석구석을 눈에 담고 있었다.

“아, 아뇨. 안 즐거워요.”

다음에 또 차계원의 스케줄에 함께하게 될까 봐 이서가 손사래를 친다. 그 모습에 상냥하던 계원의 낯빛이 서늘하게 변한다.

“벌써 질려요? 대표님 마음은 한낱 종잇조각보다도 못한가 봐요?”

꼭 배신이라도 당한 사람마냥 구는 걸 보니 심기가 상한 것 같았다. 그러나 또 차계원의 매니저 노릇을 하고 싶지는 않은 이서는 꿋꿋이 그런 차계원을 모른 척했다.

바깥의 상황이 조금도 흥미롭지 않다는 듯 아예 문에서 등을 돌릴 때였다.

“이야! 차계원 씨.”

“아. 작가님.”

대기실로 두 명의 사람이 들어왔다. 그중 40대 초반으로 보이는 여자는 우아함과 호탕함이 공존했다. 그녀가 오늘 촬영을 맡은 사진작가인 듯싶었다. 그 옆에는 보조 작가로 보이는 키 작은 남자 하나가 서 있었다.

“내가 또 계원 씨랑 작업할 줄이야. 나 아무래도 전생에 나라 구했나 봐.”

“나라는 제가 구했죠.”

여자는 활기찬 기운을 갖고 있었다. 대기실의 분위기가 한결 편안해졌다. 쾌활한 그녀의 칭찬에 계원이 너스레를 떤다.

“말도 잘한다니까. 그런 것도 따로 배워?”

“그래야 작가님이 잘 찍어 주지 않겠어요?”

“그냥 찍어도 완성인데 뭐. 오히려 내가 욕먹는 거 아닌지 몰라. 계원 씨 미모 다 못 담았다고. 근데 이쪽은 누구셔? 매니저?”

여자가 눈을 찡긋거리며 백이서를 가리킨다. 실은 대기실을 들어올 때부터 궁금했던 참이다.

“저희 대표님이요.”

“안녕하세요. 케이뉴 대표 백이서입니다.”

만면에 비즈니스 미소를 가득 띤 이서가 살짝 고개 숙여 인사한다. 이서의 코앞으로 다가온 여자가 장난스럽게 그의 볼을 꼬집는다.

“어머. 대표가 이렇게 어려요? 애기다, 애기.”

“하하. 작가님도 저랑 별반 차이 안 나시는 것 같은데요?”

이서가 기분 좋은 농담을 건넨다. 이 바닥에 들어서면서 여러 유형의 사람을 마주치다 보니 사람 대하는 기술도 자연스레 좋아졌다. 그런 제가 차계원 앞에서는 왜 말도 제대로 못 하는지 저도 제 자신이 답답했다.

“농담 그렇게 기분 좋게 하기 있어요?”

“진짜 제 또래 같으세요.”

백이서는 진정성 가득한 표정이다.

“아유. 말들은. 근데 대표님 너무 이쁘게 생겼다. 응?”

여자가 백이서의 얼굴을 요목조목 뜯어본다. 이 정도면 카메라 앞에 서도 이목구비가 죽지 않을 거다. 그녀의 손이 한 번 더 백이서의 볼을 꼬집는다. 손에 와 닿는 피부가 쫀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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