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스타일링까지 마친 계원은 말 그대로 완벽했다. 그는 맨몸에 회색 스트라이프 재킷만 걸치고 있었는데 그게 그렇게 잘 어울렸다.
‘진짜 아무나 배우 못 하는구나.’
저 근육질 몸매를 위해 얼마나 관리했을지 가늠이 안 간다. 그냥 보여 주기식 근육이 아니라 탄탄한 근육이 촘촘하게 자리 잡고 있다.
“내가 멋있어요?”
저도 모르게 넋 놓고 보고 있었는지 차계원이 이서의 턱을 꿀밤 때리듯 톡 친다.
“너무 당연한 소리 같은데요.”
이서가 불퉁하게 대답한다. 촬영장에 있는 온 사람이 본인만 보는데 그걸 몰라서 묻나.
“여기서 제일?”
“네.”
이서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한다. 지금 차계원은 그야말로 식물까지 홀릴 수 있을 것 같다.
계원이 그 단호한 한 음절에 배를 잡고 웃는다. 본인 칭찬을 들을 때는 쑥스러워하면서 제가 멋있다는 말에는 망설임 없이 끄덕이는 게 웃겨 죽겠다. 여우 새끼 맞다니까. 이거.
“반했어요?”
웃음기 서린 목소리로 계원이 묻는다. 질릴 정도로 듣는 말이지만 저 입에서 나오면 좀 덜 지루할 것 같다. 하지만 계원의 예상과 달리 백이서가 이번에는 뜸을 들인다.
“그건 아니고요…….”
“…….”
순간의 침묵이 대기실을 휩쓴다. 아차 싶은 이서가 다시 말을 덧붙인다.
“멋있는 거랑 반하는 건 다르니까요. 그, 그래도 제일 멋있으세요.”
“대표님.”
“네.”
“빈말하는 데 돈 들어요?”
아까 지 볼을 주물러 대던 여자 앞에서는 또래로 보인다는 둥 농담만 잘하더니.
계원이 백이서의 입술을 아프지 않게 꼬집는다. 빈말 하나 하는 게 뭐 그리 어렵다고 저렇게 비싸게 굴까.
“흐음.”
계원이 꼭 고민이 있는 것처럼 숨을 늘인다. 천성이 심술 맞아 그런지 저 비싼 입이 얄밉다.
“뭐……. 불편하세요?”
미안한 건지 계원의 기분을 맞춰 주려는 건지 백이서가 묻는다.
“불편이라…….”
계원이 느리게 눈을 깜빡인다. 묘하게 신경이 거슬렸던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다. 자신은 불편했던 거다.
“네. 불편하네요.”
몰랐는데 백이서는 은근히 사람을 모으는 재주가 있었다. 본인 자체는 활달한 성격이 아닌 것 같으나, 사람들이 그를 편하게 생각하는 게 느껴졌다. 아까만 해도 백이서가 대기실을 나가기가 무섭게 여기저기서 찾는 소리가 문을 타고 들려왔다.
사진작가 역시도 그랬다. 백이서는 모르겠지만 그녀는 꽤 깐깐한 측에 속하는 작가였다. 겉으로 쾌활해 보일지언정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월등한 실력만큼 엄격한 사람이었다.
“어……. 어떤 게 불편하세요? 필요한 거 있으시면 가져다 드릴까요?”
백이서가 말간 눈으로 계원을 올려다본다. 그래. 또 나만 못됐지.
“저 커피 좀 사다 주실래요?”
“그럼 모니터는…….”
“필요 없어요.”
“네. 아메리카노 맞죠? 금방 다녀올게요.”
백이서가 지갑을 챙겨 들고 겉옷을 입는다. 부지런히 팔을 꿰고 지퍼도 올린다.
“아이스로 부탁해요. 아까 그 카페에서.”
“어. 거기 먼데…….”
촬영장으로 오기 전 들렀던 카페는 적어도 차로 30분은 넘게 가야 했다. 같이 다녀왔으니 계원이 그걸 모를 리 없었다.
“알아서 하시고요.”
싱긋 웃은 계원이 등을 돌려 대기실을 나선다.
별수 없다. 제 천성이 못돼 처먹은 걸 어떡하라고.
* * *
커피를 사는 데 소요된 시간은 왕복 한 시간 반 남짓이었다. 도착하니 촬영은 이미 중반부를 넘어가고 있었다. 사는 김에 스태프들 것까지 챙기자 싶어 사람 수대로 구매한 탓에 시간이 더 걸렸다.
“커피 좀 드시고 하세요!!”
커피를 잔뜩 들고 오는 이서를 발견한 스태프 하나가 소리친다. 그 소리에 촬영에 집중하던 계원이 무심하게 그쪽을 본다.
“잠깐 쉬었다 합시다!”
디렉터가 휴식을 알렸다. 차계원은 ‘디카페인으로.’라는 짤막한 문자까지 남겼었다. 하필 커피를 다 구매한 후 차에 싣고 있던 시점이었다.
이서가 구매한 커피 중 디카페인을 찾아 계원의 앞으로 뛰어갔다. 빨대를 꽂아 내밀고 있는 이서는 한 겨울임에도 땀을 흘리고 있었다.
“여기요.”
“……내 거 사 오라니까 저걸 혼자 다 사 왔어요?”
팔짱을 낀 계원이 커피를 받아 들지는 않고 얼굴만 내밀어 빨대를 문다.
“몇 잔 안 되니까요…….”
“다른 사람은 손이 없게요?”
굳이 커피를 사 오라 시킨 건 본인이면서 병 주고 약 준다.
“나머지는 대표님 드세요.”
겨우 한 모금을 들이켠 계원이 더 마시기 싫다는 듯 커피잔을 민다. 그 한 모금도 미미한 수준이었다.
“드시고 싶으셨던 거 아니셨어요?”
“아까 차에서 마셔서 그런가. 안 들어가네요.”
“그럼 왜…….”
이서가 커피를 내려다본다. 콕 집어 그 카페에서 사 오라길래 엄청 먹고 싶은가 보다 싶어 부랴부랴 다녀왔었다.
“빨리하고 끝내죠. 다들 쉬셔야 하니까.”
차계원이 막 커피를 골라 가고 있는 사람들을 향해 외친다. 누가 보면 그가 촬영 감독 같았다.
“그렇지. 흐름 끊기면 안 되지. 다시 시작합니다!”
뭐가 좋은지 너털웃음을 터트린 디렉터가 촬영을 재개했다. 두 손으로 커피를 만지작거리던 이서가 스태프들 쪽으로 이동한다. 조금 있으면 저녁이었다. 아마 마무리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거다.
“야. 좋다. 좋아.”
“나중에 B컷 어떻게 골라요.”
“그러니까. 차계원 씨랑 작업하면 막 찍어도 표지야. 컷 고르는 게 제일 일이라니까.”
감탄하는 이들을 따라 모니터를 보니 그럴 만했다. 외양이야 말할 것도 없이 자세도 구도도 표정도 뭐 하나 흠잡을 게 없었다. 지금 찍어내고 있는 작업물도 한 번에 컷이었다.
“뿌듯하시겠어요?”
“예? 뭐…….”
옆에서 스태프 하나가 자신이 더 자랑스럽다는 얼굴로 이서의 허리를 꾹 찌른다.
“멋있기는…… 하네요.”
당연한 이야기지만 멋있었다. 은연중에 생각했던 잘생겼다, 멋있다의 의미와는 다르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서는 차계원이 저렇게 열정적으로 촬영에 임할 거라고는 생각 못 했다. 잘나가는 배우들이 으레 그렇듯 자세나 몇 번 잡아 주고 말 것이라 예상했었다. 아니면 거드름을 피우거나.
제가 본 그는 매사에 여유 있고 느긋한 모습이라 그렇게 생각했을 수도 있다. 제멋대로인 부분도 더러 있어 더욱 그랬다.
“자, 한 번 더!”
하지만 카메라 앞에서의 그는 달랐다. 터지는 플래시와 사방에 자리한 조명들이 그가 주인공임을 매 순간 각인시키는 것 같다. 그는 촬영에 잘 따라가는 수준이 아니라 자신이 흐름을 쥐고 있었다. 촬영을 넘어 이 자리에 있는 모두를 끌고 가는 것 같은 흡입력이 있다.
한 분야에서 인정받으려면 저 정도는 되어야 하는 걸까.
“안녕하십니까.”
뒤쪽에서 들려온 굵직하고 조용한 목소리가 예고 없이 이서의 상념을 깼다.
“어?!”
“커피 잘 마시겠습니다.”
남자다운 눈매가 커피잔을 들이밀며 웃고 있었다.
“이진강 배우님……?”
이서는 그를 알고 있었다. 차세대 배우로 여러 언론에서 거론되고 있는 이진강 배우였다.
몇 년 전, 경호원 출신인 그는 한 아이돌 팬이 팬 페이지에 찍어 올린 게 화제가 되어 유명해졌다.
운동선수 같은 그의 체격과 이국적인 외모는 파급력이 컸다. 해당 사진은 각종 커뮤니티 사이트를 달구더니 몇 개의 기사까지 뜨기 시작했다. 그걸 계기로 그는 배우가 됐다.
“바로 알아봐 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이진강이 꾸벅 고개를 숙인다. 예의 바른 모습에는 각이 잡혀 있었다.
“당연히 알죠. 영화 찍으신 것도 잘 봤어요.”
그가 맡는 캐릭터는 주로 화려한 액션이나 묵묵한 서브 남자 주인공 역할이었는데, 작품 보는 눈도 나쁘지 않은지 흥행성적도 괜찮았다.
“영광입니다. 차계원 선배님네 회사 대표님이시죠?”
악수를 건네는 손을 맞잡자 묵직한 악력이 느껴진다. 떡 벌어진 어깨가 기백 있어 보였다. 이서가 입꼬리를 당겨 웃는다. 이진강은 개인적으로도 괜찮게 봤던 배우였다.
“네. 어떻게 아셨어요?”
“누구냐고 여쭤보니까 말씀해 주시더라고요.”
그가 엄지로 뒤를 가리킨다.
“아……. 오늘 촬영 있으신 거예요?”
“네. 바로 뒤 타임입니다. 선배님 촬영 구경하려고 일찍 왔어요. 존경하는 선배님이거든요. 아직 멀었지만.”
“멀었다뇨. 지금도 충분하신데요.”
손을 받혀 차계원을 가리키는 그는 살짝 무서운 인상을 가지고 있었는데, 표정은 꼭 소년 같았다.
“많이 배워야죠. 모레 촬영은 선배님과 투 샷이라 걱정입니다.”
모레도 촬영이 이어진다더니 그게 이진강과의 투 샷이었나 보다. 모레는 김건이 예정대로 오기로 해서 상세한 일정에 대해 전달받은 바가 없었다.
“투 샷…… 팬들 반응 좋겠네요.”
누가 기획했는지 몰라도 꽤 감각 있는 사람이 분명하다. 둘은 상반된 매력을 가진 배우였다. 차계원이 조금 차가워 보이면서 퇴폐적인 분위기가 난다면, 이진강은 무겁고 딱딱한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다. 그의 회사에서 밀고 있는 키워드 또한 야성미였다.
또한 차계원이 흰 피부를 지닌 반면에 이진강의 피부는 살갗을 태운 것처럼 까무잡잡했다. 한 면에 둘의 투 샷이 실린다면 꽤나 볼만할 거다. 대중들의 반응이 뜨거울 거라는 건 안 봐도 알 수 있었다.
“제가 누가 될까 봐 잠도 안 옵니다.”
“에이. 너무 쓸데없는 걱정 같은데요. 매력적인 배우시잖아요.”
이서가 장난스레 엄지를 치켜들며 덧붙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