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대표님! 잘 들어가셨어요?]
걱정과 달리 핸드폰으로 들리는 김건의 목소리는 매우 밝았다. 술이라도 한잔 걸친 건지 들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네, 네. 무슨 일 있어요?”
[일은요, 무슨. 걱정돼서 연락드렸죠. 계원이는 별일 없었죠?]
“네. 별일 없었죠. 네. 촬영도 잘하시고. 트러블도 없었고요.”
별일 없었냐는 김건의 말에 이서의 얼굴이 달아오른다. 차 안에서의 일이 떠올랐다. 상처가 생긴 지 얼마 안 된 코끝이 아리다.
[어휴, 다행이에요. 계원이를 다른 사람이 맡은 적이 없어서 얼마나 걱정했는지. 대표님도 오늘 정말 고생 많이 하셨어요.]
“제가 뭘요. 한 거라고는 운전밖에 없는데요.”
그 운전마저도 올 때는 차계원이 다 했다.
[그놈이 좀 까다로운가요? 같이 있는 것만도 고생하신 거죠. 저는 가끔 숨이 턱! 턱! 막힌다니까요. 늦은 시간이라 연락 안 드리려고 하다가 또 너무 걱정돼서요.]
아닌 것 같아도 김건은 꽤 다정다감한 사람인 듯싶었다. 10년 넘게 함께 일한 시간이 헛되진 않은 듯, 제가 듣기에도 진심으로 걱정하는 투였다. 티격태격하던 모습을 본 게 얼마 전인데, 늘 그렇지도 않은가 보다.
“잘하셨어요. 아직 잘 시간도 아닌걸요. 전화 주셔서 저야 감사하죠. 매니저님은 잘 쉬셨어요?”
[당연하죠! 뜻밖의 휴가라 그런지 아주 일분일초가 행복했습니다. 하하.]
“휴가…… 요?”
김건의 넉살 좋은 웃음에 행복감이 가득했다. 그에 이서가 어리둥절해져 묻는다.
[그런 놈이 아닌데 갑자기 휴가까지 챙겨 주고. 드디어 철드나 봐요.]
“계원 씨가 휴가를 챙겨 줬다고요?”
[휴가비까지 넉넉하게 받은 덕분에 쇼핑도 했습니다. 내일 보여 드릴게요! 신상이거든요.]
신이 잔뜩 난 김건의 반응은 아무리 들어도 거짓말 같지는 않다.
“오늘 휴무 날 아니셨어요?”
[휴무요? 누가요? 저요?]
“예……. 아닌가요?”
[에이. 무슨 말씀이세요. 배우 스케줄 날을 휴무 날로 잡는 매니저가 어디 있어요. 저 그렇게 개념 없는 놈 아닙니다.]
“그렇…… 죠…….”
자신도 그게 이상하다 싶었다. 그러나 차계원 본인이 그렇다고 하니 별말 못 했을 뿐이다. 그냥 넘어가지 말고 김건에게 전화해 확인해 볼걸, 하는 후회가 들었다.
[설마 계원이가 저 휴무 날이라고 했어요?]
이서의 떨떠름한 반응을 느꼈는지 건이 조심스럽게 묻는다.
“아, 아니요. 제가 착각했나 봐요. 휘준이 휴무가 오늘이라.”
[아하하. 그럴 수 있죠. 그럼 쉬십시오. 이만 끊겠습니다!]
“네. 매니저님도 쉬세요.”
이서가 끊긴 전화를 한참 동안 바라봤다.
“뭐…… 냐고…….”
촬영이 두 시간 미뤄졌다고 할 때의 차계원과 김건이 휴무 날이라 촬영에 같이 가 줄 사람이 없다고 할 때의 차계원이 오버랩된다. 아무리 생각해도 차계원은 정상이 아니었다.
* * *
이서가 깨어난 건 늦은 오후였다. 원래도 아침에 잘 못 일어나기는 했지만 요즘 들어 기상 시간이 늦다. 정확히는 차계원이 회사에 들어온 시점부터다. 하루 루틴이 온통 망가진 기분이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빛이 눈 부셨다. 햇빛이 강한 걸 보니 해가 중천인 듯싶다. 누운 자세 그대로 손만 뻗어 충전 중인 핸드폰을 보자 휘준에게 문자가 와 있었다.
[대표님 회사 오시면 연락 부탁드립니다.]
그러고 보니 차계원이 들어오고 나서 휘준을 못 본 지 좀 됐다. 원래는 할 일이 하도 없어 매일 휘준과 머리 맞대며 고민했는데, 차계원에게 휘둘리다 보니 그럴 시간이 없었다.
“가야겠네.”
오늘은 집에서 쉬려고 마음먹었는데 틀린 것 같다. 생각해 보면 이렇게 한가하게 누워 있을 시간이 없었다. 차계원이 들어왔으니 자잘하게 할 일도 많을 것이다. 일단 하룻밤 새 쌓인 기사들부터 정리해야 했다.
“태미도 한번 봐야 하는데.”
그 후로 태미와 성아의 계약은 종료됐다. 그러나 새로운 회사와 계약을 했다는 소식은 들려오지 않았다. 듣기로 이미 이야기까지 끝낸 소속사가 있다고 했었는데, 아마 그녀 자신이 보류 중인 것 같았다.
다시 이야기하자는 태미의 문자가 몇 번 왔었다. 당연히 원인은 차계원일 거다. 회사에서 마주쳤을 때도 태미는 눈을 빛냈으니까.
“재계약을 할 수도 없고.”
차계원은 태미를 마주친 날 이후로 그녀를 다시 받지 말라며 못 박아 뒀다. 처음에야 그저 스치듯이 하는 말인 줄 알았는데 이서에게 온 태미의 문자를 보자마자 핸드폰을 빼앗아가 차단까지 시켰다.
“나중에 밥이나 먹으면 되겠지.”
태미의 성격은 제가 더 잘 알았다. 분명 못 참고 회사로 찾아올 게 뻔하다. 그때 밥이라도 사 주며 잘 설명하면 될 거다. 어차피 제 회사는 태미의 욕심을 채워 주기에 턱없이 부족하다. 제가 안 되는 걸 부득불 붙잡고 있었을 뿐이다.
* * *
회사에 도착한 이서가 사무실을 죽 둘러본다. 회사를 옮기게 되면 이 사무실도 올 일이 없을 터였다. 세 들어 지내고 있던 곳이지만 그래도 제 공간인 양 정든 곳이었다.
“뭐 하고 계세요?”
그때 휘준이 문을 열며 사무실로 들어왔다.
“어어. 그냥 좀 보고 있었어. 오늘은 일찍 퇴근하라니까.”
“일찍 가야 할 일도 없는데요. 대표님 못 뵌 지도 며칠 됐고요.”
“며칠이나 못 봤다고.”
휘준이 터벅터벅 걸어와 소파에 앉는다. 워낙 체격이 좋은 녀석이라 낡은 소파가 작아 보인다.
“차계원 씨 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설명 안 해 주셨잖아요.”
“아. 그거…….”
“…….”
빤히 보는 눈빛이 날카롭다. 휘준은 눈치가 좋은 인물이었다.
“그때 말했잖아. 계약했어. 사무실도 곧 옮길 거야.”
“이유는요?”
“글쎄. 우리 회사로 들어오고 싶다 하셔서.”
이서가 어깨를 으쓱이며 휘준의 앞에 마주 앉는다. 탁자에는 먼지 하나 없었다. 아마 휘준이 닦아 놨으리라. 서휘준은 일이 없어도 매일같이 회사에 나왔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곳까지 쓸고 닦았다. 그러지 말라 해도 말을 듣지 않았다.
“그거 말고요. 사무실까지 옮기는 이유 말입니다.”
“음……. 이 사무실이 마음에 안 드나 봐. 옮기자 하네. 본인 사비로 옮긴다니 말리기도 뭐하고.”
“차계원 씨, 조심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
“정확한 이유야 모르지만. 손해까지 봐 가면서 저희 회사로 들어온다는 거. 이상하잖습니까.”
휘준은 불안했다. 휘준에게 차계원의 첫인상이란 주차장에서였다. 초면임에도 자신을 보는 표정에는 적대감이 역력했고 이서를 당기는 동작은 폭력적인 것에 가까웠다. 그러면서도 당당한 분위기가 그를 감싸고 있었다. 척 봐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위험한 자였다.
“알아.”
“아시는데 어째서…….”
걱정이 가득 담긴 표정을 보며 이서가 살풋 웃는다. 무뚝뚝하지만 정에 약하고 의리를 중시하는 놈이다. 휘준을 보다 보면 제 사람 보는 눈이 아예 나쁜 것만 같지도 않다. 가끔 회사까지 찾아오는 빚쟁이들을 처리하는 것 역시 휘준이었다.
“이유가 뭐든 우리 회사 입장에서는 이득이니까.”
“…….”
“찬밥 더운밥 가릴 신세 아니잖아. 우리.”
“대표님만 이용당하시면 어떡합니까.”
대학 때부터 그랬다. 제 선배 백이서는 잘 속고 잘 믿었다. 사실 신입생 때 백이서에 대한 첫인상은 그리 좋지 못했다. 우유부단하고 어리숙한 사람. 제가 본 백이서는 자신이 제일 싫어하는 부류의 인물이었다.
“……저는 영 찝찝합니다.”
그러나 곁에서 볼수록 그는 첫인상과 달랐다. 그는 꽤나 소신 있고 강단 있는 사람이었다. 매번 휘준에게 의리가 있다고 말하지만, 진짜 의리 있는 사람은 백이서였다. 휘준의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발인까지 함께 있어 준 유일한 이 역시 그였다. 그래서 그의 일에는 늘 더 마음이 쓰였다.
“내가 이용당할 주제나 되겠어. 그리고 내 생각에는……. 차계원 씨 길게 있지 않을 것 같아. 우리 회사를 선택한 것도 마음 편히 휘두를 회사가 필요해서인 것 같고.”
“휘둘려 주자는 말씀입니까?”
“꼭 그렇다기보다 손해 볼 건 없으니까. 차계원 씨가 금방 나간다 해도 회사 이름이라도 알릴 수 있잖아. 벌써 알렸고.”
“…….”
이서의 담담한 설명에도 휘준의 표정에서는 좀체 찝찝함이 가시지 않는다.
“이왕 계약까지 한 거. 일단 조금 더 상황을 두고 보자.”
“……무슨 일이 생기면…….”
“너도 참. 걱정 많다니까.”
“만일이라는 게 있지 않습니까.”
“그러면 너한테 말할게.”
“……네.”
휘준이 이서를 응시한다. 그의 눈빛에는 어떤 걱정과 당부가 섞여 있었다.
“그러셔야 합니다.”
* * *
오늘도 역시 늦게 일어난 이서가 아침 겸 점심으로 에너지바 하나를 입에 물었다. 식사를 챙겨 먹는 게 여간 귀찮은 일이 아니다. 혼자 살게 된 이후로 이서는 끼니를 거르는 날이 많아졌다. 오독오독 씹히는 견과류가 고소하다. 씻고 늦장을 부리다 보니 일어난 지 두 시간이 지나고 있었다.
“휘준이 또 먼저 나와 있겠네…….”
그 부지런한 놈은 아침부터 나와 있을 게 빤했다. 이서가 부랴부랴 옷장에서 연노란색 스웨터와 짙은 밤색의 슬랙스를 찾아 입고 양말을 신으려던 차였다.
쾅. 쾅.
누군가 현관문을 두드렸다.
“누구세요?”
제 집에 올 사람은 별로 없었다. 애초에 친구가 거의 없었고 그중 집까지 들락거리는 친구는 더 없었다. 휘준이나 찬이 형도 가끔 초대하면 오는 게 다였다.
쾅. 쾅.
초인종도 멀쩡히 있는데 누군지 모를 불청객은 계속해서 문을 두드려댔다. 이러다 옆집에서 한소리 하지 싶다. 살짝 짜증 어린 얼굴의 이서가 양말 한쪽을 신다 말고 현관문을 열었다.
“차계원…… 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