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현관문 밖에 서 있는 건 뜻밖의 인물이었다. 잘 빼입은 차계원이 살짝 열린 문을 당겨 활짝 열어젖힌다.
“왜 이렇게 늦게 열어요. 뭐 애인이라도 숨겨 놨어요?”
바깥의 찬 기운을 가득 몰고 온 차계원은 허락도 없이 현관에 발을 들인다. 불쑥 들어온 그가 빠르게 이서의 집을 둘러본다.
“차계원 씨 스케줄은…….”
오늘은 그제 찍던 화보 촬영을 마저 하는 날이었다. 이진강과의 투 샷이 예정되어 있었다. 펑크라도 냈나 싶어 이서가 놀라 묻자 차계원이 손을 휘휘 젓는다.
“끝났어요. 오전에.”
짧게 말을 마친 차계원이 물끄러미 이서의 발에 시선을 던진다. 밤색 양말이 한쪽에만 신겨져 있었다.
“아! 지금 막 양말 신고 있던 중이라서…….”
이서가 민망한지 맨발을 감추며 부산스레 한쪽도 마저 신는다.
“오늘은 안 신어요? 고양이 양말.”
“네…… 안 신으려고요.”
그 양말은 집에 오자마자 버렸었다. 다시 생각해도 이불을 찰 정도로 창피했다.
“잘 어울렸는데 아쉽네요.”
차계원이 퍽 아쉽다는 어투로 말한다.
“……그런데 여기는 왜……. 아니 어떻게 오셨어요?”
자신은 차계원에게 호수를 가르쳐 준 기억이 없었다. 계원이 진작부터 집을 알고 있었다는 걸 알 길 없는 이서의 표정에 경계심이 어린다.
“집이 아담하네요.”
가벼이 백이서의 질문을 무시한 계원이 나른하게 감상평을 늘어놓는다. 작은 방 하나가 딸린 투 룸은 좁은 대신 정리 정돈이 잘되어 있었다. 백이서에게서 나는 것과 같은 냄새가 좀 더 진하게 배어 있었다.
“뭐 커피라도 안 줘요? 손님 대접이 엉망이네.”
“커피가 없어서…….”
사실 이서는 끼니를 잘 챙겨 먹지 않는 대신에 마시는 걸 좋아했다. 차 종류나 커피 등 달지만 않으면 만사 오케이였다. 종류별로 갖춰져 있는 차와 커피 추출기를 모른 척하며 이서가 앙큼하게 거짓말을 했다.
“잠깐 들어오라는 말도 안 해요? 사람이 예의상이라는 게 있지 않나.”
이서가 미간을 약하게 찌푸린다. 허락도 없이 이미 집 안에 들어와 있는 사람이 운운할 예의는 아니었다.
“저는 지금 나갈 거라서요…….”
“어디 가는데요?”
“회사요.”
“잘됐네요. 나도 그것 때문에 왔어요. 같이 나가면 되겠네.”
차계원을 쫓아낼 요량으로 나간다고 한 거였는데 여우 피하려다 호랑이 굴에 빠진 격이다. 여유롭게 커피나 한잔 마시고 나가려던 계획이 물거품이 됐다.
“회사는 왜요?”
“인테리어 거의 마무리됐거든요. 사무실 옮긴다고 말해 줬잖아요.”
“아…….”
차계원의 말을 잊고 있던 이서의 입이 작게 벌어진다.
“합.”
장갑 낀 계원의 손가락이 들어오려 하자 벌어진 입을 급히 다문다. 못마땅하다는 듯 계원이 손을 물린다.
“……눈치만 늘었네요. 쓸데없이.”
이서가 눈을 도로록 굴리며 계원의 투덜거림을 피해 겉옷을 고른다. 품이 넓은 오트밀색 긴 코트였다.
“오늘은 그거 안 입어요?”
“어떤 거요?”
“대표님 걸을 때마다 토실거리는 거.”
어느새 옆에 다가온 계원이 어제 입었던 아이보리색 숏 패딩을 꺼내 든다.
“……네. 안 입어요.”
이서가 뾰로통하게 대꾸한다. 차계원이 저렇게 권유하니 더 입기 싫었다.
“말 잘 듣는다고 약속해 놓고 이러기예요? 사기당한 기분이라니까 정말.”
차계원이 억울한 사람인 양 투덜거린다.
“언제 약속까지 했다고…….”
어제 휘준 앞에서야 태연하게 말했지만, 따지고 들자면 사기당한 건 차계원이 아니라 저다. 계약서를 쓸 때 차계원은 말만 잘 듣고 허튼짓만 안 하면 된다고 했었다. 그 말의 뜻이 이런 뜻인 줄 알았다면 절대 사인하지 않았을 거다.
이서가 일부러 더 코트를 여민다. 계원이 영 아쉽다는 듯이 숏 패딩을 흔들었다.
툭.
“음? 이게 뭐예요?”
촬영장에 갈 때 넣어 놨던 핫팩이었다. 포장도 뜯지 않은 핫팩이 숏 패딩 주머니에서 튀어나와 바닥으로 떨어졌다. 촬영장이 춥지 않은 덕에 쓸 일이 없어져 꺼내지 않았던 거였다.
“아……. 핫팩이요.”
“대표님 추위 안 탄다면서요.”
“원래 화보 촬영 때 차계원 씨 드리려고 했던 건데……. 촬영장이 안 춥길래요.”
“…….”
계원이 바닥에 떨어진 핫팩을 줍는다. 포장지에는 귀마개를 한 통통한 펭귄이 그려져 있었다.
“내 거네요. 그럼.”
주운 핫팩을 제 코트 주머니에 넣은 계원이 이서의 옷을 내려놓는다. 그새 옷을 다 갖춰 입은 이서가 신발장으로 간다.
“안 나가시나요?”
이서가 계원을 돌아보며 부른다. 차계원이 제 집에 오래 머무는 게 불편했다. 차라리 빨리 나갔으면 싶었다.
“가요.”
차계원이 나오는 걸 본 이서가 깔끔한 단화를 골라 신는다.
“대표님은 롱 패딩 같은 건 안 입어요?”
계원이 신발을 신으며 뜬금없이 묻는다. 이서는 아무리 추운 날에도 롱 패딩은 입지 않았다. 목도리나 장갑도 하는 날이 드물었다. 추위를 잘 안 타기도 했고 움직임이 둔해지는 건 갑갑했다. 짧은 패딩을 입기 시작한 것도 얼마 안 됐다.
“답답할 거 같아서요.”
“사 줄 테니까 한번 입어 봐요.”
“……왜요?”
“그거 입으면 더 멍청해 보일 거 같아서요. 펭귄 같을 것도 같고.”
계원이 빙글빙글 웃는다. 백이서가 뒤뚱거리며 걸어가는 게 벌써부터 상상됐다. 턱 끝까지 지퍼를 올려놓으면 뛰는 것도 느려져 도망가도 금방 잡을 수 있을 것 같다.
“……안 입을래요.”
훽 고개를 돌린 이서가 문을 열고 나간다.
* * *
인테리어가 거의 다 끝났다는 사무실은 과하게 호화로웠다. 원래 썼던 사무실처럼 한 칸짜리 사무실을 생각했는데 아예 건물 하나가 통째로 회사였다. 유리와 흡사해 보이는 반들반들한 외벽에 햇빛이 반사됐다.
“저기……. 사무실로 이걸 다 쓴다고요……?”
계원의 코트 끝자락을 살짝 잡은 백이서의 눈이 잘게 요동쳤다. 말아 쥐는 것도 아니고 고작 검지와 엄지를 이용해 잡는 손을 보며 계원이 웃음을 흘린다. 꼭 어미가 두고 갈까 봐 조마조마해하는 어린애 같다.
“다른 회사 못 봤어요? 이게 정상이에요.”
그거야 정말 잘나가는 몇 개의 소속사 이야기지 자신의 회사는 아니었다. 하지만 아무리 눈을 비비고 다시 봐도 건물 꼭대기에 ‘K new’라는 이름이 떡하니 박혀 있었다.
“여기서 밤새울 거예요? 들어가요 빨리.”
제 코트 자락을 힘없이 쥔 손목을 잡은 계원이 백이서를 이끌고 건물 안으로 들어간다.
* * *
건물 내부를 돌아보면 볼수록 이서는 기가 죽었다. 겉에서 봤을 때보다 더 넓은 내부에는 구내식당까지 딸려 있었고, 군데군데 장식된 그림이나 장식물들은 필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미적 감각만을 위해 존재한다는 걸 뽐내고 있었다.
차계원이 제게 필요한 인력을 얼마나 데려올지는 모르겠으나 현재 공식적으로 있는 직원은 저, 휘준, 김건. 차계원까지 하면 고작 네 명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과했다.
“대표님 사무실 먼저 가요.”
이서가 이렇다 할 반응이 없자 차계원이 데려간 곳은 대표실이라는 문패가 박힌 곳이었다. 문을 열기조차 두려운데 차계원은 뚜벅뚜벅 잘도 걸어가 대표실 한가운데에 자신을 뒀다.
“……제 집보다 넓네요.”
“그 집이 작은 거죠.”
차계원은 정말인지 한마디도 곱게 하는 법이 없다. 대표실은 넓은 수준이 아니라 제 집의 두 배는 될 것 같았다. 가구는 아직 안 들여놨다더니 이미 책장과 소파가 자리 잡고 있었다. 밝은 조명이 부담스럽다.
이곳은 꼭 제가 있을 곳이 아닌 것 같았다. 자신과는 어울리지 않았다. 이서가 슬쩍 차계원의 눈치를 본다. 검은색 긴 코트를 입은 계원은 워낙 비율이 좋아서인지 꼭 아파트 광고라도 찍으러 온 것 같았다.
“……마음에 안 들어요?”
가로로 긴 차계원의 눈이 이서의 의중을 떠본다. 머리를 뒤로 넘긴 반듯한 이마와 그 아래로 곧게 뻗은 콧대가 매끈하다.
“아, 아니요…….”
“근데 왜 말이 없어.”
차계원이 이서의 턱을 잡고 요리조리 돌린다. 가죽 장갑의 감촉이 빳빳하다.
“배가 고픈가?”
“아니요. 배는 안 고파요.”
“그럼 왜요. 뭐가 마음에 안 드는데.”
차계원의 어조가 딱딱해진다. 그에 이서가 어색한 웃음을 짓는다. 마음에 안 드는 건 아니었다. 말만 대표지 차계원의 건물에 차계원이 고른 인테리어인데 제가 마음에 들고 안 들고 할 게 없었다.
“그냥 낯설어서 그래요. 적응이 안 돼서…….”
아마 자신이 이곳에 적응될 날은 앞으로도 영영 오지 않을 것만 같은 예감이 든다.
* * *
이서가 소파 위에 몸을 죽 늘인다. 어디서 들었는지 원래 이사하는 날에는 중국 음식을 먹는 거라며 차계원은 별별 요리를 잔뜩 주문했다. 그리고 강요 아닌 강요를 하며 이서에게 음식을 잔뜩 먹여댔다.
원래 양이 적은 편인데 기름진 음식을 잔뜩 먹고 나니 속이 더부룩하다. 소화라도 시킬 겸 이서가 대표실을 걸으며 하나하나 뜯어본다.
“여기는 통유리네요.”
다른 곳은 안 그랬던 것 같은데 대표실만 벽면 사면 중 한쪽 면이 전부 통유리였다.
“가끔은 스릴 있는 것도 좋잖아요.”
“뭐가요……?”
“못 알아들었으면 됐어요. 옆이 내 방이에요. 나중에 심심하면 놀러 와도 돼요.”
그 말투가 마치 제 집에 놀러 가자는 초등학생처럼 천진하다.
“방을 왜 회사에…….”
순간 이서는 잘못 들었나 싶어 귀를 의심했다. 가 봐서 알지만, 차계원의 집은 한눈에 담기 어려울 정도로 넓었다. 방도 몇 개씩이나 있어 그 용도가 다 가늠이 안 갈 정도였는데, 굳이 회사에 개인 방이라니. 심지어 이 건물의 위치도 차계원네 집과 가까웠다.
“마침 서재가 하나 필요했거든요. 여기에 만들면 자주 오고 좋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