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비도덕적 안락함-20화 (20/100)

#20

그 드넓은 집에 서재가 없었다는 게 코미디다. 이서의 안색이 눈에 띄게 안 좋아진다. 일을 하다 보면 자연스레 마주치는 일이 적어질 거라 기대했는데 차계원의 말은 청천벽력과 다름없었다.

“구경 갈래요?”

이서의 마음은 한 톨도 모르는 계원이 스스럼없이 제 방을 보여 주고자 했다.

“……나중에요.”

‘스케줄을 잡아야겠어.’

안 그래도 광고며 영화며 차계원 앞으로 계속 들어오는 중이었다. 개중 해외 로케라든가 시간을 많이 잡아먹는 작품을 골라야겠다고 이서가 속으로 다짐한다. 허울뿐이지만 대표이니 작품을 들이밀어 볼 수는 있을 거다. 차계원이 받아들이느냐가 문제겠지만.

“오늘 볼일은 끝난 건가요?”

새 회사를 보느라 오후 시간을 거의 다 쓴 이서가 묻는다. 원래 쓰던 사무실에 가서 짐도 정리하고 휘준에게 연락도 해 줘야 했다. 방금 다짐대로 계원 앞으로 들어온 작품 중에 지방이나 해외 촬영이 있는지도 당장 알아보고 싶었다.

“가구 봐야죠.”

“가구도…… 봐야 하나요?”

어차피 차계원의 건물인데 제가 고를 게 있나 싶다. 굳이 이 공간에 정 들이고 싶지도 않았다. 차계원이 회사를 나가면 제가 이곳에서 가지고 나갈 건 제 몸뚱이밖에 없을 터다.

“당연히 같이 골라야죠. 날로 먹을 생각이었어요?”

차계원이 타박하듯 덧붙인다. 저런 타박을 들을 때면 억울함과 동시에 자신이 정말 무언가를 잘못한 기분이 들었다.

“저는 그냥 차계원 씨가 고르는 줄 알고…….”

“같이 고르는 게 낫잖아요. 벽지 색이나 가구 몇 개만 더 고르면 돼요.”

그 정도도 힘든 건 아니죠?

말은 안 했지만, 차계원의 표정이 그렇게 묻고 있었다. 이서가 주섬주섬 일어나 코트를 꿰어 입는다.

차계원은 이서가 옷을 다 입을 때까지 소파 등받이에 머리를 기댄 채 이서를 보고 있었다. 단추까지 다 잠그고 핸드폰과 지갑을 챙기는 걸 물끄러미 보기만 한 그가 느릿하게 입을 연다. 여전히 일어날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대표님 뭐 해요?”

“가구 보러 가신다고…….”

“안 나갈 건데.”

차계원이 장난스럽게 웃는다. 분명 남이 했으면 개구져 보일 웃음인데 차계원이 하니 능글맞아 보였다. 이서의 표정이 불퉁해진다. 차계원이 또 자신을 놀린 거다.

“인터넷으로 볼 생각이었어요. 내가 돌아다니기도 불편하잖아요. 사람들 다 알아볼 텐데.”

“그건 그렇지만……. 왜 지금 말해 주세요? 옷 입는 거 뻔히 보셨으면서…….”

“단추를 잘 잠그길래요.”

대체 이건 또 무슨 심보인가. 다 나가서 알려 준 게 아니라 고마울 지경이었다. 코트를 입은 채 뾰로통하게 서 있는 이서를 보며 차계원이 크게 웃는다. 곧이어 개그 프로라도 보는 양 배까지 잡는다.

톡.

“심통 났어요?”

계원이 서 있는 이서의 팔을 잡고 제 앞으로 끌어와 볼을 톡 친다. 백이서가 대답 없이 고개를 슬쩍 뒤로 물린다.

“대표님 심통도 부릴 줄 알아요?”

볼수록 웃기네. 백이서는 작은 얼굴에 볼살이 좀 있는 편이었는데 그 볼이 지금 살짝 튀어나와 있었다.

계원이 그 볼을 버튼 누르듯 꾹꾹 눌러댄다. 아랫입술도 자세히 보면 조금 나와 있다.

“……저 그만 놀려 주셨으면 좋겠어요.”

손짓을 멈추지 않는 계원 앞에서 이서가 용기를 끌어내 말한다.

“왜요? 이 재미있는 걸.”

“그야……. 그야.”

정말 의아하다는 듯한 차계원의 태도가 이서의 말을 잃게 했다. 남을 놀리면 안 된다는 건 유치원 때 배우는 상식 아닌가. 차계원과 같이 있으면 제가 알고 있는 상식이 꼭 상식이 아닌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앉아요, 일단. 가구 봐야죠.”

계원이 이서를 끌어 소파에 앉힌다. 단추도 손수 하나하나 풀어 코트를 벗겨 준다.

“책상부터 볼까요?”

챙겨 온 노트북을 꺼낸 계원이 한 사이트에 접속한다. 이서도 익히 들어 알고 있는 유명 가구 회사 브랜드였다. 재작년쯤 차계원이 모델로 있던 브랜드이기도 했다.

“저……. 꼭 이렇게 봐야 하나요……?”

이서가 아직 심통이 가시지 않은 목소리로 툴툴댄다.

둘이 앉아 있는 소파는 크고 넓었다. 등받이에 기대면 발이 바닥에 닿지 않았다. 그 소파 위에서 계원은 굳이 이서를 제 다리 사이에 앉혀 놓고 검색 중이었다.

“이편이 보기 편하잖아요.”

“편하지는…… 않은데요.”

불편하면 불편했지, 편할 리가 없었다. 머리가 어떻게 되어 있길래 이게 편하다는 걸까.

“스탠드는 하얀색이 좋겠죠?”

역시나 차계원은 이서의 소심한 반항을 듣지 않았다. 심지어 이서의 어깨와 머리 사이에 제 고개를 기대어 파고들었다. 차계원의 진한 스킨 냄새가 코를 간질인다.

“싫어요. 하얀색?”

“……아무거나요.”

“이렇게 비협조적으로 굴래요?”

“정말 다 좋아서요…….”

“흐음. 그래요, 그럼 하얀색.”

스탠드를 시작으로 차계원은 갖가지 작은 인테리어 소품부터 크게 필요 없어 보이는 것들까지 고르게 했다. 그렇게 둘은 한참을 이런저런 가구와 소품 등을 고르는 데 시간을 썼다.

* * *

“하암.”

이서가 입에서 긴 하품이 나온다. 같은 자세로 계속 앉아 있으려니 몸도 머리도 지루했다. 거기에 밥도 배불리 먹었겠다. 좋은 향까지 옆에서 풍겨 오니 잠이 솔솔 오기 시작했다. 어제 밤잠을 살짝 설쳐서 그런지 더 그랬다. 그런 이서를 아는지 모르는지 계원은 이번에는 파티션 색을 고르고 있었다.

“이건 연노란색으로 할까요? 오늘 대표님 노란 니트 입었으니까.”

뭐가 그리 즐거운지 차계원은 콧노래까지 부른다. 자세히 들으니 어릴 때 들었던 동요와 그 선율이 비슷했다. 그게 꼭 자장가 같아 몸이 노곤해진다.

“…….”

“연노란색 싫어요? 그럼 베이지?”

“…….”

“대표님?”

대답 없는 이서를 이상하게 느낀 계원이 노트북에 박혀 있던 시선을 돌린다.

“하.”

백이서가 제 품 안에 안긴 채로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웅숭그린 어깨가 작아 보인다. 순간 계원의 몸에 힘이 탁 빠진다.

“속도 편하지.”

혼자 툭 던지듯 중얼거린 계원이 몸을 쭉 뒤로 젖혀 천장을 본다. 툭 튀어나온 그의 목울대가 꿀렁였다.

“누구는 한 입 거리도 안 되는 걸 아껴 먹겠다고 애가 마르는데.”

계원이 이서의 이마를 조금 세게 검지로 민다.

“으응.”

잠깐 휘청이던 이서의 상체가 오뚝이처럼 중심을 잡고 버틴다.

“참나.”

계원의 허탈함 위로 적막이 가라앉았다.

* * *

“음?”

이서가 무거운 눈꺼풀을 천천히 들어 올린다. 잠이 온다 싶더니 깜빡 졸았나 보다. 이서의 눈앞에 천장이 보였다. 차계원이 눕혀 준 듯했다. 창문으로 보이는 바깥 하늘은 벌써 어둑했다.

“으으.”

이서가 기지개를 피며 몸을 돌린다.

“으악!”

바로 옆에 차계원이 옆으로 누워 자신을 보고 있었다. 막연히 혼자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까 그 소파 위에 계원과 나란히 누워 있었다.

너무 놀라 이서의 몸이 바닥에 나뒹굴어질 뻔한다. 계원의 팔이 뒤로 떨어지려는 등을 안정감 있게 받아 올린다.

“내가 괴물이에요?”

차계원이 인상을 쓰며 이서의 몸을 휙 돌려 소파 안쪽으로 밀어 넣었다.

“아. 가구…….”

그제야 제가 언제 잠들었는지가 떠올랐다. 계원과 파티션 색을 고르고 있던 중이었다. 노란색 어쩌고 한 것까지는 어렴풋이 기억나는데 그 뒤가 가물가물하다. 몸을 일으키려는 이서의 어깨를 계원이 잡아 눕힌다.

“됐어요. 내가 다 골랐으니까.”

“죄송해요…….”

이서가 바지 주머니를 더듬거려 핸드폰을 꺼내 든다. 시간을 보니, 못해도 네 시간은 잔 것 같다. 차계원은 팔베개까지 해 주고 있었던 듯 자연스레 제 머리를 본인 팔 위에 올렸다. 미안한 마음이 물씬 든다.

“미안하면 좀 더 누워 있어요. 이제 내가 졸리네.”

“아…… 네.”

계원이 피곤하다는 듯 하품을 한다. 그에 더 죄스러운 마음이 커진 이서가 두 손을 배 위에 얹고 정자세로 천장을 본다.

말똥말똥한 눈으로 천장만 보며 깜빡이는 이서의 눈가에 눈곱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계원의 손이 어울리지 않는 세심함으로 그 눈곱을 떼었다.

“아. 제가.”

“가만있어요.”

“…….”

눈곱을 다 떼준 차계원의 손이 여지없이 이서의 목덜미로 간다. 오늘 이서가 입은 니트는 목 부분이 넓은 편이었다.

“계원 씨…….”

이서가 천천히 내려가는 손을 보며, 작은 목소리로 차계원을 부른다.

“네. 대표님.”

“저…… 제 목 좀 그만 만지셨으면 좋겠는데요.”

“왜요?”

그러고 보면 차계원은 기회가 될 때마다 이서의 목을 지분거렸다. 처음 차계원네 집에 갔을 때도 그랬고 차 안에서도 그랬다. 마치 제 목에 꿀이라도 발라 놓은 양 굴었다.

“항상 목을 만지시니까…….”

“그러니까. 항상 만지는데 왜 그만 만져야 하냐고.”

목에서 코로 옮겨간 계원의 손이 제 잇자국이 난 코끝을 문지른다.

“사실 제가……. 목 근처가 좀…… 많이 예민해서.”

이서가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더듬더듬 말한다. 차계원이 목덜미나 귀 부근을 만질 때마다 제 의사와 상관없이 얼굴이 홧홧해지고는 했다. 게다가 차계원은 꼭 목에서 끝나지 않고 귀나 그 근처를 전부 지분거렸다.

“알아요.”

“네?”

“알아서 만지는 거라고.”

순식간에 이서의 위로 올라온 계원이 이서의 입술 위로 제 입술을 겹쳐 왔다.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