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비도덕적 안락함-21화 (21/100)

#21

이서, 휘준, 건. 이렇게 셋이 회의를 하게 된 건. 가구를 고른 후 일주일이 지난 시점이었다. 그사이 원래 있던 사무실의 짐들은 새 사무실로 옮겨 왔다. 짐이 얼마 되지 않아 옮기는 건 쉬웠다. 가져오는 것 보다 버려야 하는 짐이 더 많았기에 그랬을 수도 있다.

“대표님은 다음 작품으로 해외 로케 촬영이 좋겠다는 말씀이시죠?”

“굳이 로케 촬영이 필요하다기보다. 시나리오가 좋은 것 같아서요.”

“제가 봤을 때도 그렇습니다. 장근호 감독이면 칸 영화제도 입성했었잖습니까. 작품성도 워낙 좋고.”

하늘이 뜻을 알아준 건지 차계원에게 들어온 새 영화 시나리오는 이서의 마음에 쏙 들었다. 스페인에서 현지 촬영을 해야 하는 작품이었다. 장소를 떠나서 시놉시스와 앞부분 대본만 봐도 탄탄한 작품이었다. 전개 또한 새로웠다. 한마디로 차계원과 물리적 거리를 벌릴 수 있는 아주 좋은 핑곗거리였다.

“제작비 규모가 상당한 거 같아요. 투자자들도 탄탄하고.”

차계원은 그날 이후 볼 일이 없었다. 이서가 의식적으로 피했다는 말이 맞았다. 어차피 차계원은 영화 촬영을 마무리하느라 바빴고, 가끔 오는 연락에는 이서가 답장하지 않았다.

그의 문자에 답을 하지 않을 때마다 후환이 두려워 망설여졌으나, 예상외로 차계원은 이렇다 할 말이 없었다.

“이번에는 큰 사고 없이 무사히 지나갔으면 좋겠어요.”

김건이 한숨처럼 말한다. 화보 촬영 때의 일을 말하는 거였다.

“……그러게요.”

“작가님은 괜찮으시대요?”

이서가 조심스럽게 묻는다. 차계원이 오전 촬영을 끝내고 새 사무실을 보자며 이서의 집에 온 그날, 촬영장에서는 사고가 있었다고 했다. 세트장으로 세워 놓은 한쪽 벽이 무너진 거였는데, 하필 그 밑에 있던 작가가 가벽에 깔려 병원에 실려 가게 되었다. 다리는 금이 간 게 전부였지만 팔은 골절이었다. 사진작가에게 치명적인 부상이었다.

“하필 카메라 장비도 같이 떨어져서…….”

이마저도 이서는 다음 날 기사를 통해 알게 되었다. 깔린 사람이 왜소한 체형의 그 보조 작가라는 건 김건을 통해서 들을 수 있었다. 가구를 고른답시고 하루 종일 같이 있었던 차계원에게서는 한마디도 듣지 못한 일이었다.

“퇴원은 할 수 있대요?”

“아직 모르나 봐요. 괜히 그런 기사 나면 안 좋은데.”

사고가 난 건 보조 작가였는데 기사 타이틀에는 죄다 차계원의 이름이 들어가 있었다. ‘차계원 화보 촬영장 사고.’, ‘차계원을 찍던 사진작가 병원 신세.’ 이런 식이었다. 화제 끌기가 좋으니 너도나도 차계원의 이름을 넣었다. 개중에는 아예 차계원과 관련 없는 내용도 더러 있었다.

“그래도 촬영은 잘 끝났으니까요.”

다행히 사고가 난 시점은 촬영이 다 끝나갈 때라고 했다. 김건이 멋쩍게 머리를 긁적인다.

“우선 다음 작품은 이걸로 계원 씨한테도 얘기해 볼게요.”

“네. 매니저님이 잘 말씀해 주세요. 워낙 아까운 작품이라.”

이서가 다시 한 번 강조하며 입 발린 소리를 늘어놓는다. 스페인이면 비행기 편도로만 열 시간이 넘는 거리다.

“그럼요. 그럼요. 휘준 씨는 이제 실장님이네요?”

“실장은요. 대표님 옆에서 일이나 돕는 겁니다.”

휘준이 겸연쩍은지 말을 흐린다. 김건은 친화력이 좋은 사람이었다. 휘준 역시 낯은 조금 가리지만 모나지 않은 성격 덕인지 둘은 금방 가까워졌다.

“이제 슬슬 다른 배우들도 영입해야죠.”

김건이 요즘 뜨고 있는 배우 몇을 줄줄 읊는다. 하나같이 예전이라면 꿈도 못 꿀 배우들이었다.

“그런 분들이 우리 회사에 들어오려 할까요…….”

이서의 자신이 없었다. 차계원이 들어오고 회사가 조금 좋아졌다고 해서 과연 배우들이 들어오려고 할까. 이건 제 영업력과 능력의 문제였다.

“그러믄요! 벌써 들어오고 싶어 하는 배우들 많을걸요? 다들 누구한테 먼저 컨택하나 눈치 보는 거지.”

사실 건이 개인적으로 받은 연락만 해도 꽤 됐다. 다만 차계원에 손에 걸러져 입에 올릴 수가 없었다. 그렇기에 더 회사에서 발 벗고 나서서 영입했으면 하는 바람도 있었다.

“제가 알아보겠습니다.”

“이야. 역시 우리 휘준 씨.”

“신인 배우 같은 경우는 우리가 직접 오디션을 봐도 되지 않겠습니까.”

“맞지요. 맞지요. 우리 실장님 말이 다 맞지요.”

“매니저님!”

김건의 놀림에 휘준이 자리에 앉았다 일어나며 곤란함을 표한다. 이서가 그 모습을 보며 옆에서 킥킥댄다.

“알았어요. 알았어. 맞다. 대표님 내일 시간 되세요?”

“내일 왜요?”

“이번에 계원이 찍은 영화 시사회 하잖아요.”

태미와 같이 찍은 그 영화였다. 차계원의 본성도 모르고, 커피를 받아 준 것에 고마워했던 바로 그 영화. 그날 커피 차만 안 돌렸어도 이런 수모는 겪지 않아도 됐을지도 모른다.

“네. 그건 알고 있는데.”

“대표님이 와 주셨으면 싶은가 봐요.”

“……제가요?”

혀에 바늘이 돋친 것처럼 껄끄럽다. 명치 부근에 커다란 돌덩이가 하나 얹혀 내려가지 않는 것 같다. 아침에도 차계원에게 부재중 전화가 와 있었다.

“매니저님 있으시잖아요.”

“그건 맞는데 계원이가 여쭤보라고 해서요.”

“아…….”

“대표님 내일 일 있으셔서요. 아마 못 갈 것 같습니다.”

이서가 난처해하는 걸 기민하게 알아차린 휘준이 먼저 선수를 친다.

“정말요? 에이 아쉽다.”

“죄송해요. 건이 씨가 대신 가 주세요. 계원 씨한테도 미안하다고 전해 주시고요.”

“내일 가서 다른 연예인분들하고도 친해지고 하시면 좋을 텐데.”

건의 목소리에서 못내 아쉬워하는 게 느껴졌다. 그는 진심으로 회사의 성장을 바라고 있었다. 프리랜서로만 일하던 그가 아예 둥지를 튼 것도 이번 회사가 처음이었다.

“그러게요……. 다음에 또 다른 자리가 있겠죠.”

“이제 많아지실 거예요. 그러면 저는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네. 조심히 들어가세요.”

“안녕히 들어가십시오.”

건이 나가는 걸 본 이서가 소파에 길게 기댄다. 건은 활기차고 주변 사람에게 기운을 북돋아 주는 사람이었으나 그와 있으면 필연적으로 차계원의 이야기를 해야만 했다.

“후……. 이제 할 일 많아지겠다. 그치, 휘준아.”

“대표님.”

“응?”

“차계원 씨랑 뭔 일 있으십니까?”

“어, 아니. 왜?”

“아까 차계원 씨 이야기 나올 때 형 표정이 굳는 것 같아서요.”

묵묵한 휘준의 빠른 눈치는 가끔 곤혹스럽다. 긴 시간 동안 봐 와서 더 잘 알아차리는 걸 수도 있었다. 이서가 당혹스러움을 애써 감추며 걱정스러운 얼굴을 한 휘준의 어깨를 두드린다.

“아니야, 인마. 일 있을 게 뭐 있겠어. 오늘 피곤해서 그래. 요즘 신경 쓸 게 많아졌잖아.”

“형.”

“응.”

“형은 그때 조금 더 두고 보자고 했지만, 저는 아무래도 마음에 걸립니다.”

“…….”

“처음 봤을 때부터 위험해 보였습니다. 회사에 들어온 것도 그래요. 들어온 건 그렇다 쳐도 태미나 성아를 다시 못 돌아오게 하는 게 이상하잖습니까.”

“그렇지…….”

그건 누구보다 자신이 제일 잘 알았다. 그가 위험한 사람이라는 것도 그의 행동에는 쉽게 설명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는 것도.

잘 아니 이렇게 차계원을 피하게 되는 것이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잖아. 태미랑 성아도……. 먼저 나가고 싶어 한 건 그쪽이었고.”

“…….”

“차계원 씨가 크게 사고를 친 것도 없으니까……. 지켜보자.”

“혹시라도 무슨 일 생기면 꼭 저한테 말씀해 주시기로 했습니다.”

“그래 알았다니까.”

휘준은 회사와 차계원의 계약 내용을 모르고 있었다. 회사 입장에서 계약을 파기하면 내게 될 위약금이 어마어마하다는 사실은 물론이요, 생각보다 차계원이 자신과 자신 주변에 대해 잘 알고 있다는 것도 말하지 못했다.

회사를 차릴 때부터 이미 그는 너무 많은 일을 해 주고 있었다. 승주가 도망갔을 때 다시 정신 차리고 일할 수 있었던 것도 그의 덕이었다.

강한 정신력을 소유하고 있는 그는 후배였지만 늘 이서의 버팀목이 되어 줬고 그 스스로가 자처해서 이서를 보듬어 줬다. 그런 휘준에게 여기서 더 걱정을 끼칠 수 없다.

“꼭 말씀해 주셔야 합니다.”

“……그래.”

이서가 휘준의 눈을 피하며 대답한다. 그 대답이 거짓말임을 휘준이 모를 리 없었다.

* * *

정류장에서 내려 집까지 걸어가는 길이 평소보다 멀게 느껴진다. 혼자 걷고 싶어 데려다준다는 휘준마저 거절했다. 마당에 다다를 무렵 주머니에서 짧게 진동이 울린다.

[내일 시사회 안 올 거예요?]

차계원의 문자다.

‘못 가서 미안하다고 할까? 무슨 일이냐고 물어보면 어떡하지.’

이서의 손가락이 핸드폰 화면 위에서 갈팡질팡한다. 차계원의 연락을 일방적으로 무시하는 동안 뾰족한 자갈로 된 길을 맨발로 걷는 기분이었다.

말 한마디에도 돌변해 제 멱살을 잡던 사람이다. 이렇게 연락을 무시하다가 어떤 변을 당하게 될지 모른다. 그러나 쉽사리 답장을 보내지는 못했다.

터벅. 터벅.

계단을 다 올라올 때까지도 이서는 핸드폰 속에서 깜빡이는 커서에만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못 간다 하면 분명 무슨 일 때문이냐고 물을 텐데.

“하…….”

몇 번이나 변명거리를 생각하던 이서가 결심한 듯 입술을 질끈 깨물고 핸드폰을 품속에 집어넣는다. 안 가면 안 가는 거지 구태여 변명거리를 만들고 있는 자신이 한심하다.

그래. 건에게도 전했으니 굳이 답장하지 않아도 상관없을 거다. 그렇게 자신을 위안하며 불안한 마음을 애써 모른 척하고 있을 때였다.

“지금.”

이제는 익숙해진 낮은 음성이 고요한 복도를 울렸다. 그와 함께 현관 앞에 선 기다란 인영이 눈에 들어왔다.

“보고도 집어넣는 거예요?”

차계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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