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아…….”
이서의 심장이 세차게 곤두박질친다. 잘못하다 걸린 아이처럼 가슴이 쿵쾅거린다. 자신도 모르게 숨을 멈춘 이서가 뒷걸음질을 친다. 그리고 차계원이 그 뒷걸음질과 비교도 안 될 정도의 빠른 걸음으로 성큼 이서 앞에 다가온다.
“묻잖아. 내 문자 보고도 넣은 거냐고.”
높낮이 없이 가라앉은 목소리가 복도에 울린다. 차계원이 이서의 핸드폰을 뺏어 든다. 그는 이서의 손가락까지 가져와 손쉽게 잠금을 풀었다. 화면에 바로 떠 있는 제 문자를 본 차계원이 실소를 내뿜는다.
“왜 대답을 안 해요. 그새 입이 들러붙었어?”
형형한 차계원의 눈빛은 냉랭하게 메말라 있었다. 그가 이서의 어깨를 아프게 움켜쥔다. 잘못이 있는지라 이서는 아픈 티도 내지 못했다.
“오, 오랜만이네요…….”
“그러게요. 누구 때문에 참 오랜만에야 뵙네요.”
차계원의 빈정거림이 살벌하다. 바짝 얼어붙은 백이서가 대꾸도 못 하고 입술을 깨문다. 그 모습을 본 계원이 화를 참듯이 숨을 한 번 고른다. 연락하는 족족 무시하기에 간이 배 밖으로 나왔나 했더니 그건 또 아니었던 모양이다.
“……들어가서 이야기하죠.”
“그…….”
“뭐 해. 문 열라고.”
짝다리를 짚고 선 계원이 손등으로 현관문을 툭 툭 두드린다.
“여기서…….”
“뭐?”
“여기서……. 이야기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작게 퍼지는 백이서의 목소리는 귀 기울이지 않으면 들리지 않을 정도다. 이서는 지금 차계원이 불편했다. 그는 한눈에 봐도 꽤 화나 보였는데 그런 그를 데리고 같이 집에 들어가기는 죽기보다 싫었다. 시한폭탄 같은 그가 어떻게 나올지 감당이 안 됐다.
“씨발, 가지가지로 귀찮게 하네.”
차계원이 피곤하다는 듯 검지와 엄지로 양 관자놀이를 문지른다.
“부탁드릴게요…….”
“…….”
“바빠서. 정말 바빠서 그랬어요.”
이서가 온 힘을 다해 변명한다. 말 같지도 않은 변명이라는 걸 알지만 뭐라도 해야 할 것만 같았다. 수명이 다해 가는 현관 앞 등이 꺼졌다 켜지는 걸 반복했다.
“하.”
“일이 갑자기 많아져서…….”
“말 안 듣는 사람 싫다고. 내가 했어요. 안 했어요.”
억지로 화를 가라앉히고 있는 차계원의 목에서는 쇳소리가 났다. 그게 더 이서의 불안감을 자극했다.
“했, 아니, 하셨어요.”
“말을 해 줘도 못 알아듣고. 멱살을 잡혀도 못 알아들으면……. 내가 어떻게 해야 돼요?”
퍽.
계원이 힘을 실어 이서를 벽에 밀친다. 꽤 무게가 실린 힘 때문에 벽에 부딪힌 날갯죽지가 아팠다. 잘못 부딪힌 머리가 울려 헛구역질이 나올 지경이었다.
“윽……!”
“아. 혹시 맞는 거 좋아해요? 그런데 내가 못 알아준 거예요? 처맞아야 말 듣는 그런 성격이에요?”
“……으윽…….”
벽에 부딪힌 충격이 강했는지 어지러움이 가시지 않는다. 눈앞이 아찔했다.
“사람이 물어보면 대답을 해.”
점점 목소리가 높아지는 차계원이 다시 이서를 향해 손을 뻗는다. 어디 내던지기라도 할 것처럼 흉포한 기세였다.
“뭐,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그래서…….”
그 기세를 느낀 이서가 겨우겨우 입을 열어 문장을 만든다. 이렇게 될 걸 몰랐던 건 아니다. 차계원이 난폭하게 나올 거라는 것 정도는 예상한 바였다.
“…….”
“그……. 정말 그래서…….”
예상했는데도 눈앞의 차계원은 감당하기 힘들었다. 스포츠를 전공했음에도, 남자로서 오히려 평균을 넘는 체격임에도. 덤벼 볼 수조차 없었다.
“……그래요. 그럴 수도 있죠.”
그러나 말의 뜻과 달리 그의 목소리는 굵게 갈라져 있었다. 여태껏 내던 화가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차계원이 순식간에 차분해진다. 그 간극이 커 이서의 팔뚝에 소름이 돋아났다.
“답장하려고 했는데……. 정말 그러려고 했는데…….”
“좆같으면 연락 좀 씹을 수도 있고 그런 거죠. 안 그래요?”
“아니요, 그럴 수 없어요. 미안해요…….”
“이해해요.”
이서의 말을 자른 차계원이 이번에는 몸을 밀치던 것과 다른 온도로 뺨을 쓰다듬는다. 곤두선 뺨의 솜털이 제게도 느껴졌다.
“차계원 씨……. 화…… 화 많이…….”
“났냐고?”
“네, 네…….”
자신을 쓰다듬는 차계원의 손이 밀칠 때보다 더 오싹하다. 싸늘한 그의 체온이 긴장한 제 피부로 여실히 전해져 온다.
“그걸 말이라고 해요?”
“죄송…… 해요.”
“…….”
“정말 죄송해요…….”
“…….”
“화나게 하려는 건……. 아니었어요.”
차계원이 이서의 뺨에서 손을 떼고 힘을 풀듯 팔을 턴다. 차계원이 때리기라도 할까 봐 한껏 몸을 움츠린 이서가 그의 팔이 움직이는 방향을 면밀히 관찰한다.
그러나 추측과 다르게 차계원의 손은 이서가 아니라 이서 옆에 떨어진 가방으로 뻗어진다.
“사과할 거 없어요. 생각을 잘못했네, 내가.”
“……예?”
벽에 밀쳐지면서 떨어뜨린 가방을 어깨에 매준 계원이 느린 손짓으로 먼지를 툭툭 털어 준다.
“대표님이 먼저 연락하고 싶게 만들었어야 했는데. 그죠.”
“무슨 말씀…….”
“들어가요. 오늘 잠 푹 자 두고요.”
이서의 핸드폰을 던지듯 준 차계원이 나직하게 속삭인 후 돌아섰다.
* * *
차계원이 가고 어떻게 집에 들어왔는지 정신이 없었다. 그저 제가 아주 형편없었다는 사실만 기억날 뿐이었다. 언제까지 피하기만 하고 있을 수 없다는 건 안다. 차계원이 그렇게 두지도 않을 거다. 그러나 그날의 키스만 생각하면 머리가 새하얘졌다.
“하…….”
이서가 멍하니 그날의 마지막을 곱씹었다.
* * *
이서의 동의 없이 시작된 키스는 거칠었다. 차계원은 순식간에 이서의 위로 올라왔고 손아귀의 힘을 이용해 이서의 입을 벌렸다. 체격이 큰 차계원이 이서를 얽어매는 건 손쉬웠다.
“읏, 잠…… 깐…….”
말은 소용이 없었다. 말이 채 되어 나오기도 전에 차계원에게 먹힐 뿐이었다. 벌려진 입으로 들어온 차계원의 혀는 습하고 난폭했다. 밀어내도 소용없었다. 주먹을 쥐고 때려도 계원의 몸은 돌덩이처럼 꿈쩍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서의 팔을 겹쳐 잡아 움직이지 못하게 속박했다.
계원의 혀가 느릿하게 이서의 치열을 핥고 지나갔다. 입천장을 살살 긁어내리기도 하고. 이서의 혀를 깨물기도 했다.
“흐으…….”
입을 다물려고 할 때마다 귀신같이 알아챈 계원이 이서의 아랫입술을 짓씹었다. 따끔한 통증과 함께 역한 피 맛이 타액과 함께 밀려 들어왔다.
“……읏.”
자유로운 계원의 반대편 손이 이서의 머리칼을 쓸어 올렸다.
“입 좀……. 하……. 더 벌려 봐요.”
더운 숨이 이서의 볼과 턱에 떨어졌다. 계원은 이미 벌려진 이서의 입에 아예 손가락을 넣으면서 벌려댔고, 입맞춤은 끝나지 않고 짙어지기만 했다.
“하아…….”
그렇게 한참을 계원에게 입술을 내주던 이서가 더는 참지 못하고 계원의 혀를 깨물었다. 계원이 멈칫한 사이 무릎으로 복부를 차고 도망 나온 게 일주일 전의 일이었다.
* * *
떠올리고 싶지 않은 장면이 무한 재생되는 노래처럼 자꾸만 떠오른다. 조금 전 부딪힌 머리가 아릿아릿했다.
대학 때 배운 호신술을 그렇게 사용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제가 차계원을 대면하고 싶지 않은 건 어쩌면 너무 당연한 일이다. 그런 일을 벌이고도 아무렇지 않은 차계원이 이상한 거였다.
이서가 이불 속으로 몸을 말고 들어간다. 오늘 방이 유달리 춥게 느껴졌다. 아직도 입 안에서 피 맛이 나는 것 같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그냥 잠들고 싶었다.
* * *
이서가 잠에서 깬 건 벨 소리 때문이었다. 이서는 한 번 잠들면 깊게 잠드는 편이었는데, 무시하고 잘 수 없을 정도로 소리가 몇 번이나 이어졌다.
“으으…….”
잠에서 깨지 못한 이서가 협탁을 더듬어 핸드폰을 찾아 든다. 발신자는 건이었다. 이서의 마음속에 출처 모를 불안감이 피어오른다. 순간 푹 자 두라던 어제의 차계원이 떠올랐다. 냉랭하게 가라앉던 그 눈빛도.
잠이 확 달아난 이서가 전화를 받는다.
“매니저님?”
[대표님!]
전화를 받자마자 외치는 건의 목소리는 다급했다. 주변의 소란스러움이 핸드폰을 타고 들어올 정도였다. 몽롱했던 정신이 단번에 확 깨어났다.
“무슨, 무슨 일이에요?”
[대표님 혹시 계원이 연락돼요?]
웅성이는 통화 속 소란스러움에서 차계원의 이름이 여러 번 들린다.
“안 해 봤는데. 지금 일어나서요.”
[계원이 지금 잠수 탔어요! 시사회 펑크 났다고요!]
“네?!”
[어떡해요. 대표님? 주연 배우가 시사회를 안 오면 어떡해요! 오늘 기자들도 다 오는 시사회였는데. 출연진이고 감독이고 다들 난리 났어요!]
“언제부터. 언제부터 연락이 안 돼요?”
[오늘 아침부터요. 샵에 들르려고 픽업 갔는데 연락도 안 되고 집에도 없어요. 먼저 시사회장으로 갔나 싶어서 찾아봤는데 아무 데도 없어요! 이거 어떡하죠? 대표님 뭐 아시는 거 없어요?]
발을 동동거리는 게 보이는 착각이 일 정도로 건의 조급함이 느껴졌다. 이서가 급하게 시계를 본다. 이미 시사회가 끝나고 남았을 시간이었다.
“그럼 시사회는요? 그건 어떻게 됐어요?”
[뭘 어떡해요! 계원이 없이 진행됐죠. 기자들 전화 오고 난리예요. 무슨 사고 난 거 아니냐고. 당장 내일도 스케줄 있는데 어떡해요? 네? 대표님도 알죠? 이거 그냥 시사회 아니에요.]
건은 거의 울 것 같은 목소리였다. 이서의 이마에 식은땀이 길게 흐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