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비도덕적 안락함-24화 (24/100)

#24

“대표님 아니야? 받아. 응? 받자. 기분 나쁜 게 있으면 이야기하고 풀어야지. 대화를 해야지.”

화면에 뜨는 이름 세 글자를 본 김건이 아예 핸드폰을 집어 계원의 눈앞에 들이민다.

“빨리 받자니까?!”

김건이 발을 동동 구른다. 타들어 가는 건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차계원은 고개만 삐뚜름하게 꺾을 뿐 반응이 없었다. 그의 표정이 언뜻 무감각해 보이기까지 했다.

“끊겼잖아!”

길게 울리던 진동이 끊기고 건이 더 발을 구른다. 차계원의 입매가 미미하게 슬쩍 올라간다.

“내놔요.”

핸드폰을 낚아챈 계원이 다시 의자에 앉아 길게 몸을 늘어트린다.

[부재중 전화 : 백이서]

그 알람이 액정 화면 상단에 떠 있다.

“흐음.”

“다시 해 보자. 아니야. 내가 할게.”

“내버려 둬요.”

건의 행동을 일축한 차계원이 음악을 바꾼다. 이번에는 조금 더 템포가 빠른 곡이다. 그 음계를 따라 콧노래를 부르는 계원의 입매가 살짝 풀린다. 부재중 전화 알람 위로 메시지 도착 알람이 뜬다.

[계원 씨. 혹시 저한테 화나서 그러시는 거예요? 이야기 좀 하면 안 될까요…….]

“아.”

낮에 보낸 문자만 해도 바득바득 차계원 씨라며 성을 붙이더니 이제는 계원 씨란다.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자신을 부르는 백이서의 목소리가 옆에서 들리는 것 같다.

살짝 풀려 있던 차계원의 입매가 이번에는 눈에 띄게 올라간다.

“즐거워라.”

차계원이 답장을 보내지 않은 채 화면을 끈다. 두 손으로 핸드폰만 부여잡고 제 답장을 기다릴 백이서가 상상됐다.

“매니저님.”

“응응. 어떻게 할까. 내가 다시 전화 드릴까?”

“내일 쉬세요.”

“뭐?!”

이걸 보내려고 백이서는 얼마나 고민했을까. 몇 번이나 지웠다 쓰는 걸 반복했을 걸 상상하니 아래가 다 뻐근하다. 하다 하다 안 돼서 구질구질하게 매달리면 그건 또 얼마나 볼만할까. 분명 입술을 꼭꼭 씹으면서 말끝을 흐리겠지.

“너 진짜 내일도 펑크 내게?”

김건이 새된 소리를 내며 꽥 비명을 지른다. 설마설마하니 정말 내일도 펑크 내려 들 줄은 몰랐다.

“또 모르죠.”

기절이라도 할 것 같은 김건과 반대로 차계원은 기분이 좋아 보였다. 낮잠이라도 자려는 듯 자세를 취하고 눈을 감는다.

“집까지 찾아와서 울고불고 빌면 가 주고 싶어질지.”

“뭐?”

“바짓가랑이라도 잡아 주면 더 좋고.”

* * *

새 가구 냄새가 가시지 않은 의자에, 이서가 힘없이 어깨를 늘어뜨리며 앉는다. 책상이며 스탠드며 대표실의 모든 게 익숙지 않았다.

“하아…….”

“아직도 연락 안 됩니까?”

“응…….”

한밤중이 다 되도록 차계원은 연락을 받지 않았다. 답신 역시 없다. 내일 시사회 시간은 오후 두 시였다. 신호가 가는 걸 보면 핸드폰을 꺼 놓은 건 아니었다.

“하…….”

책상에 엎드리는 이서를 보며 휘준도 길게 한숨을 내쉰다. 백이서의 말에도 영 걱정이 되었던 휘준은 차계원에 대해 조금 알아봤었다. 알아봤다고 하기에도 민망할 정도로 그냥 영화 제작사나 피디들에게 물어본 거였다.

‘야. 차계원 성질머리 장난 아니지. 근데 다들 칭찬만 해 단체로 세뇌라도 당한 거 같다니까.’

‘차계원 씨? 말도 마라. 그 인간은 조금만 제 마음에 거슬리면 난리 나는 인간이야. 보통 연예인이면 착한 척, 아닌 척이라도 하잖아? 차계원은 아니야. 제멋대로라고. 그래도 아무 말 못 해. 왜? 차계원이잖아!’

의견들은 하나같이 비슷했다. 그 의견들은 차계원이 결코 좋은 사람이 아니라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차계원을 적으로 돌리고 싶어 하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처음에는 장난 아니라며 물꼬를 트던 이들도 부랴부랴 그래도 그만한 배우 없다는 등의 말을 해 가며 수습했다.

차계원의 조부 또한 국내 굴지 무역회사 회장이라고 했다. 뒷배가 탄탄해도 그냥 탄탄한 게 아니다. 그나마 나오는 말도 인기에 묻히는 듯했다. 인기는 가끔 나쁜 말들도 사그라들게 하고, 없던 미담을 만들기도 한다.

“펑크 낸 이유는 모르시죠.”

“응? 으응……. 네가 한 번만 더 해 볼래?”

“안 받을 텐데요.”

“그렇지……?”

차계원은 그 누구의 연락도 받지 않았다. 김건은 말할 것도 없고, 휘준에게까지 시켜 연락을 시도해 봤지만 마찬가지였다. 연락 두절의 원인이 아주 짐작 가지 않는 건 아니었다.

“…….”

먼저 연락할 마음이 들게 해 주겠다는 차계원의 말은 딱 들어맞았다. 지금도 이서는 그에게 보낼 문자 내용을 궁리 중이었다.

“댓글들이 가관이네요.”

“……나 그래서 댓글 창 안 봐.”

“100퍼센트 소속사 잘못이겠지, 힘없는 소속사의 말로 씹인정, 어떤 횡포를 부렸길래 우리 계원 님이 펑크를 내냐 대가리 박아라, 헐, 불화 맞음? 모시고 다녀도 모자랄 판에 도른 듯, 망해 봐야 정신 차리지.”

휘준이 국어책 읽듯 딱딱한 목소리로 기사의 댓글들을 줄줄 읽는다.

“꼭 읊어 줘야겠니.”

“순화시킨 겁니다.”

“…….”

백이서가 팔꿈치를 책상에 받치고 제 머리를 쥐어뜯는다. 내일 시사회마저 펑크 났다가는 어떤 반응이 돌아올지 불 보듯 뻔했다.

“차계원 배우 위험한 것 같다고 말씀드렸잖습니까.”

“알지…….”

“지금이라도 계약 무르는 건 어떻습니까.”

“사무실 처분한 돈, 빚 갚는 데 썼어.”

차계원과 그런 일이 있기 며칠 전, 계원은 이제 필요 없는 사무실 빨리 팔아 버리자며 한 부동산을 소개해 줬었다. 계원과 잘 아는 사이라는 부동산 소장 덕분에 시세보다 조금 높은 보증금을 받고 나올 수 있었다.

그리 큰 금액은 아니지만, 남은 보증금을 여윳돈으로 갖고 있어야 할지, 빚부터 갚아야 할지를 고민할 때도 계원이 한마디 거들어 줬었다.

‘빚부터 갚아야죠. 미룰수록 탈 나요.’

결론적으로 이서의 수중에는 사무실을 처분한 돈이 한 푼도 남지 않았다.

“……바닥에 나앉기라도 하겠습니까.”

“할걸…….”

그뿐이랴. 차계원에게 물게 될 위약금은 막말로 장기를 다 판다 해도 부족할 거다. 회사도 회생할 수 없을 거라는 건 두말하면 입 아프다.

“대체 왜 계약하신 겁니까.”

“로또인 줄 알았지. 당연하잖아.”

이번에는 걱정스러운 얼굴만 하던 휘준도 고개를 주억거렸다. 차계원을 마다할 기획사가 이 세상에 어디 있겠는가. 이서는 일전에도 비슷한 말을 한 적이 있다.

“망했어…….”

어떤 말이라도 해 주면 건강이 안 좋다는 둥 입장이라도 낼 텐데, 차계원이 묵묵부답이니 그러지도 못했다. 괜히 소속사와 배우의 말이 다르게 나가면 걷잡을 수 없게 된다. 그렇게 차계원의 연락만 기다리는 동안 기사와 대중들의 추측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이서가 핸드폰을 열어 그간의 문자 내용을 찾아본다.

[힘 좋네요. 명치에 멍들겠어요.]

[촬영장이 춥네. 밥은 먹었어요?]

[대표님 손가락 부러졌어요?]

[전화 안 받을 거예요?]

[혹시 나 모르는 사이에 죽었어요?]

그리고 몇 통의 부재중 전화들. 집 앞에서 차계원을 맞닥뜨린 날 자신이 얼마나 형편없이 굴었는지 안다.

‘기분 상했으려나.’

잠시 고민하던 이서가 작은 머리통을 흔든다.

‘알아주고 싶지 않아.’

솔직한 말로 기분이 상하든 말든 그런 것 따위는 궁금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의사를 조금도 고려해 주지 않는 것 같은데 기분 좀 상하면 뭐 어떤가. 먼저 강제로 키스해 온 건 차계원이었고, 자신이 그의 연락에 일일이 답해 줄 의무는 없다.

‘그래서 차계원도 답장 안 하는 건가.’

사실 차계원 자체가 무서웠던 건 아니다. 정확히는 그가 좁혀 오려는 관계의 거리가 무서웠다. 차계원은 그냥 강압적이기만 한 게 아니라 자신의 사적인 면을 파고들려 들었다.

“후.”

‘큰일이네.’

첫 만남부터 차계원은 강압적으로 모든 걸 이끌어 왔다. 그게 일적인 면에서 끝났다면 자신도 크게 불만이 없었을 거다. 그가 갑인 건 맞으니까. 아예 제멋대로 구는 주체라면 그냥 참고 뜻대로 해 주면 그만이다. 그런데 그의 방향은 꼭 사적인 영역을 향했다. 백이서가 제일 무서워하는 것들로. 타인이 제 방어벽 안을 엿보려 하는 건, 온 내장이 파헤쳐지는 기분을 준다.

“휘준아. 이거 내 이야기는 아니거든.”

“……네.”

이제는 차계원이 왜 그러는지도 궁금하지가 않다. 어떻게 하면 그가 회사를 나갈 때까지 무사히 버틸까가 우선이었다.

“음. 누구를 좀 알게 됐는데 그 사람이 안하무인이래.”

“네.”

“그래서 피하려고 하는데 그게 잘 안 된대. 틈도 안 주고 휘몰아치나 봐.”

이서는 사람 속내나 심리에 대해서는 서툴렷다. 그런 데에 감정이나 시간을 낭비하는 걸 워낙 꺼려 해서 그럴 수도 있었다. 그걸 잘 아는 휘준이 진지하게 이야기를 경청한다.

“저라면 무시합니다. 상대를 말아야죠.”

“그래! 그래야지! 근데 그게 안 된대. 계속 얼굴을 봐야 하나 봐. 원치는 않았는데 자꾸 그렇게 된대.”

“그럼 그냥 마음대로 하게 둬야죠.”

“그냥 둔다고? 안하무인인데?”

“인간관계는 다 똑같습니다. 한쪽이 달아나면, 안달 나서 쫓아가게 돼 있어요. 그런 성격일수록 더요. 그냥 두면 제풀에 지쳐 떨어져 나갈 겁니다.”

“그래?”

“……보통은요.”

틀린 말은 아니었다. 차계원이 험악하게 굴 때는 대부분 제가 한 발 빼려 할 때였다. 생각해 보면 그는 귀신같이 그런 걸 알아차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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