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계원의 집을 나온 김건은 사무실에 가지 못하고 집으로 왔다. 백이서를 보면 다 불어 버릴 것 같은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백이서는 이 바닥 사람답지 않게 올곧은 면이 있었고, 맑은 눈빛을 가지고 있었다. 그 솔직한 눈을 앞에 대고 거짓을 고하는 건 쉽지 않았다.
“대표님은…… 눈치가 없는데…….”
차계원은 말하지 말라고 당부했으나 이대로면 끝이 안 날 것 같았다. 자신의 회사 대표는 약삭빠르지 못한 건 물론이요, 눈치까지 살짝 없었다.
계속 고민하던 김건이 핸드폰을 연다.
[계원이 아무래도 집에 있는 것 같아요. 대표님이 내일 한 번만 가 주시겠어요?]
이 정도면 됐다. 차계원의 말을 어긴 것도 아니고 살짝 단서만 준 것뿐이니 뒤탈도 없을 거다. 알았다는 이서의 답장을 확인한 김건이 옷가지를 정리한다. 잘하면 내일 계원이 스케줄을 이행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 * *
지잉.
씻고 나온 계원이 커피를 내린다. 몸에 걸친 회색 목욕 가운은 그 부드러움이 나쁘지 않았다. 일찍 일어난 탓에 운동도 하고 샤워도 했지만, 아직 시각은 아침 7시였다. 계원이 진동 모드에서 벨 소리로 바꿔 놓은 핸드폰을 본다. 어제의 연락을 마지막으로 백이서는 다른 연락이 없었다.
“너무 약했나.”
기사는 충분히 자극적이었으나, 그 맹한 인간이라면 그렇게 느끼지 못했을 수도 있다. 계원이 작게 중얼거리며 메시지 함을 누른다. 하도 들락거려 문장의 마침표까지 외울 정도다. 발신인에 적힌 백이서 세 글자가 둥글다. 계원이 커피를 들고 서재로 향한다. 서재에는 작동 중인 보안 카메라 화면이 12분할로 나오고 있었다.
“음?”
서재에 들어선 차계원의 시선이 모니터 화면을 향한다. 왼쪽 제일 아래 귀퉁이. 동글동글한 머리통 하나가 화면에 걸린다. 대문 앞을 비추는 카메라였다.
피식.
그 익숙한 인영은 같은 자리를 몇 번씩 맴돌았다. 신발로 애꿎은 바닥을 몇 번 차기도 했다.
“흐음.”
턱을 괸 계원이 커피를 마시는 것도 잊고 그 모습을 감상한다. 일부러인지 백이서는 제가 일전에 입으라던 아이보리색 숏 패딩을 입고 있었다.
“구미호 아닌가 몰라.”
저러다 토실토실 걸어와서 간이라도 빼 먹겠다 하는 건 아닐까.
차계원이 쓸데없는 상상을 할 동안에도 백이서는 초인종을 누르지 않았다. 손을 뻗는 걸로 보아 시도는 하는 것 같은데 엄두가 안 나는 듯했다.
“쯧.”
백이서는 목도리도 장갑도 하지 않은 상태였다. 아무리 추위를 안 타는 체질이라 해도 눈까지 오는 날씨에 저게 뭐 하는 짓인지. 이쯤 되면 제 신경을 긁으려고 작정한 사람 같다.
딩동.
차계원이 커피를 한 모금 들이켜기 위해 손을 가져다 댈 때야 딩동 하는 초인종 소리가 집 안을 울렸다.
“우리 대표님 빠르기도 하지.”
날 새는 줄 알았더니.
바로 대답해 주지 않고 속으로 5초를 센 차계원이 즐겁다는 얼굴로 입을 연다.
“누구시죠?”
* * *
“안녕하세요……. 저 백이서인데요.”
진눈깨비로 시작한 눈은 밤새 쌓여 소복했다. 차계원의 집 앞에서 맴도는 동안 사각사각 소리를 내는 눈이 발에 밟혔다. 겨울인 걸 티 내듯 아침 공기가 꽤 쌀쌀하다. 오랫동안 서 있어 얼어붙은 볼은 감각이 무뎠다.
“계원 씨?”
한참이 지나도 계원은 아무 말 없었다. 분명 초인종에서 누구냐는 말이 들렸는데.
덜컹.
육중해 보이는 문이 큰 소리를 내며 열린다.
‘들어오라는 뜻인가?’
아무도 없는 주변을 이리저리 두리번거리던 이서가 대문 안으로 들어선다. 한 번 와 본 경험이 있지만 차계원네 집은 다시 봐도 절로 위압감이 들었다. 웅장한 마당의 돌계단을 따라 걸으니 중앙에 위치한 분수에 물이 얼어 있었다.
마당을 가로지른 이서가 숨을 깊게 들이마시며 현관문 손잡이에 손을 가져다 댄다. 휘준의 말이 맞다. 어차피 이기지도 못할 차계원, 뜻대로 맞춰 주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그러다 보면 제풀에 꺾여 나가겠지. 일단 맞춰 주며 회사나 키우다가 멀어지면 그만이다.
“들어와요.”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겨 들어가자 차계원이 현관문 앞에 삐딱하게 기대 있었다. 팔짱 낀 그의 딱딱한 표정에선 아무것도 읽히지 않았다.
“좋은……. 아침이에요, 계원 씨.”
이서가 어색한 입꼬리를 끌어당기며 아침 인사를 한다. 사실 차계원이 하도 연락을 받지 않길래 집에 있어도 문을 열어 주지 않을 거라고 추측했었다.
“무슨 일이에요?”
이서가 신발을 벗고 들어서기가 무섭게 냉랭한 물음이 떨어진다.
“연락이……. 안 되셔서. 건이 씨 연락도 안 받는다 하시고.”
아무 언질도 없이 스케줄을 펑크 낸 것도 차계원이었고, 이 사달이 난 원인도 차계원인데 그는 놀랍도록 당당했다. 아직도 실시간 검색어 1위는 차계원의 이름이었다.
“일단 앉아요.”
차계원이 가볍게 턱짓으로 소파를 가리킨다.
“네.”
그래도 문전박대는 아니라서 다행이었다. 이서가 턱짓을 따라 소파 한쪽 끄트머리에 살짝 걸터앉는다.
“마실 거라도 줘요?”
“아니요. 괜찮습니다.”
“그래요 그럼.”
차계원이 머리를 쓸어 넘기며 반대쪽에 앉는다. 그는 항상 머리를 올리고 다녔었는데, 오늘은 아니었다. 세팅하지 않은 머리에 물기가 약간 어려 있었다.
“…….”
“그래서. 여기까지 온 이유가 뭐예요?”
“…….”
“와 놓고 왜 말을 안 해.”
차계원의 말투는 날카로웠고, 여기까지 온 용기가 무색하게 이서는 탁자만 바라보고 있었다. 말재주가 있는 편도 아니라, 어디서부터 말을 꺼내야 할지 막막했다. 차계원을 잘 설득해 달라는 건에게 최선을 다하겠노라 말하고 왔는데, 이래서야 건의 얼굴을 볼 면목이 없다.
“기사들은…… 혹시 보셨어요? 검색어 순위……. 랑.”
“네. 재미있던데.”
“재미…… 요.”
“왜요. 대표님은 재미없었어요?”
재미라니. 오늘만 회사로 걸려 온 전화가 수십 통이 넘어갔다. 아직도 전화벨 소리가 환청처럼 윙윙거린다.
“포털 사이트 메인에도…… 떴어요. 추측들이 다 공격적…… 이더라고요.”
“그러게요. 요즘 사람들 참 자극적인 거 좋아해. 기자들도 먹고살기 힘들겠어요. 안 그래요?”
차계원은 꼭 다른 사람의 일을 말하는 것 같은 태도였다. 실시간으로 속속들이 올라오는 기사들 따위는 아무 상관도 없는 양 태평하다.
그 태평함에 ‘시사회를 멋대로 안 간 이유가 대체 뭐냐, 오늘은 가는 것 맞냐’ 등의 말들이 목 안에서만 맴돌았다. 초조하게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던 이서가 결국 본론을 바로 꺼내지는 못하고 계원을 부른다.
“저 계원 씨.”
“네.”
짤막하게 대꾸하는 차계원의 반응은 예외 없이 냉담했다. 다리를 꼰 그의 발끝에 매달린 슬리퍼가 까딱, 까딱 흔들린다.
“혹시 저 때문에 화나셨어요?”
“네.”
겨우겨우 짜내어 말하는 이서와 다르게 계원은 망설이지 않고 대답한다.
“제가…… 연락 무시해서요?”
“잘 아네요. 설마 모르나 했지.”
차계원이 여유롭게 커피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신다. 이서는 그 앞에서 마른침만 꼴딱 삼킬 뿐이다.
“……그래도.”
“그래도 뭐요.”
“허락 없이 키스한 건 차계원 씨가 잘못하신 거 같은데……. 요…….”
탁. 소리 나게 커피잔을 내려놓은 계원이 어이없다는 듯 이서를 본다. 대리석 탁자에 울리는 소리에 이서가 눈을 질끈 감는다.
“잘잘못 따지고 싶어서 여기까지 왔어요?”
“아, 아뇨. 그러려던 건……. 아니고요…….”
“……그래도 꾸역꾸역 온 건 칭찬할 만하네요.”
백이서는 우물쭈물하며 차계원을 쳐다보지 못했다. 최대한 차계원이 원하는 대로 해 주고자 다짐을 했는데 마음처럼 쉽지가 않다.
백이서가 꿀꺽 한 번 더 침을 삼킨다. 침을 삼키느라 움직이는 목울대가 하얘 계원의 음심을 자극했다. 현관 앞에 서서 되도 않는 인사를 건넬 때부터 저 하얀 목이 눈에 들어왔다.
“그래도 연락 무시한 건…… 죄송해요.”
“알면 됐어요.”
“그럼 일정은…….”
차계원의 반응에 약간의 기대를 품은 이서가 계원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시사회까지는 일곱 시간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
“그건 좀 귀찮은데요.”
“그, 그래도 스케줄인데…….”
“안 가죠. 뭐. 스케줄이 별건가.”
계원이 어깨를 으쓱한다. 이서의 기대가 무색하게 차계원은 간단한 말로 일축했다.
“화……. 많이 나셨네요.”
“…….”
대답 없는 차계원은 딱히 부정하지도 않는다. 그렇다는 뜻이었다.
“어떻게 하면 화가 풀리실까요. 사과는…… 드렸는데…….”
백이서가 손가락을 꼼지락대며 말한다. 입을 삐쭉삐쭉하는 게 계원의 태도에 영 답답한 듯 보였다. 바깥 날씨가 추워서일까, 실내에 들여놓은 지 꽤나 시간이 지났는데도 백이서의 코끝이 붉었다. 코나 귓불에 있던 제 잇자국은 시일이 흐른 걸 알려 주듯 흐릿해져 있었다. 계원이 느릿하게 소파에서 일어난다.
“……?”
탁자만 보고 있던 이서가 인기척을 느꼈는지 고개를 든다. 차계원이 탁자를 빙 돌아 이서의 앞에 섰다. 씻은 지 얼마 안 된 비누 냄새와 물 냄새가 풍겨 왔다.
“그러게. 나도 그걸 모르겠네요.”
“어…….”
“어떻게 해야 화가 풀릴까. 대표님이 대답해 볼래요? 어떻게 하면 내 화가 풀릴 것 같은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