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시사회는 계원의 예상대로 뻔하고 지루했다. 판에 틀어박힌 듯한 인터뷰와 인사들이 끝나고 상영을 위해 각자 지정석에 앉았다. 촬영의 결과물을 처음 보는 자리였으나 별 흥미가 들지 않는다. 연기만 잘 해줬으면 됐지 뭘 이렇게 오라 가라 하는지.
붕 들떠 촬영 비하인드를 주절주절 길게 늘어놓는 감독은 짜증 났고, 제게 인사를 건네 오는 사람들은 성가셨다.
“쯧.”
상영이 끝나고 또 마무리하려면 앞으로 장장 세 시간은 자리를 지키고 있어야 할 거다. 시사회를 이따위로 기획한 영화사의 목을 잡고 짤짤 흔들어대고 싶다.
“안녕하세요, 선배님.”
옆자리에서 별로 달갑지 않은 목소리가 차계원을 부른다. 고개를 돌리자 한태미가 차계원을 보며 생글생글 웃고 있다. 계원이 인사를 받아 주지 않고 싸늘한 표정 그대로 그녀에게 시선을 던진다. 굳이 알은척하는 여자의 오지랖이 귀찮았다.
“선배님?”
“…….”
대답이 없으면 포기할 만도 한데 한태미는 굴하지 않았다. 여러모로 귀찮은 유형의 인간이다.
“저 죄송하지만, 대표님한테 무슨 일 있나요?”
“왜요.”
“대표님이 연락을 안 받아서요. 혹시 어디 아프기라도 한 건가 해서요.”
걱정이라도 하는 양 팔자로 늘어뜨리는 한태미의 눈썹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백이서는 눈썹을 죽 내리면 주인한테 혼쭐이라도 난 강아지 같던데. 그것도 아무나 되는 건 아니었나 보다.
“네. 있네요. 무슨 일이.”
“진짜요? 어쩐지. 이유 없이 연락 안 받을 분이 아닌데. 무슨 일인데요? 정말 어디 아파요?”
태미의 질문이 끊기지 않는다. 무슨 일이 있다는 말에 오히려 안도감이 들었다. 제 연락을 피하는 건 아니라는 뜻이니까. 하기야 대표님은 제가 아는 한 이유 없이 연락을 피할 사람이 아니다.
어이없게도 자신이 회사를 나오자마자 기사들이 떴다. 제가 있던 그 긴 시간 동안 한 번도 받지 못한 주목이었다. 새로 옮겼다는 사무실은 높은 땅값으로 유명한 곳이었다. 자신도 안다. 대표님이 그동안 무던히 노력했었다는 사실을. 하지만 자신도 그랬다. 한순간도 뜨기 위해 노력하지 않은 적 없었다.
“아프면, 뭐.”
“네?”
다짜고짜 나오는 반말에 태미가 당혹스러운 얼굴을 숨기지 못한다. 차계원은 그 인기만큼 소문이 무성한 배우였지만, 촬영을 위해 대면한 그는 생각 이상으로 괜찮은 사람이었다. 촬영을 진행하는 내내 저는 물론 막내 스태프에게도 존댓말을 쓰는 인물이었다.
“네가 무슨 상관이냐고. 너 회사 나갔잖아.”
귀찮다는 티가 역력한 차계원의 목소리는 야멸찼다. 마치 구걸하는 뜨내기를 대하는 듯했다.
“그. 계약 이야기로 대표님이랑 할 이야기가 있어서요……. 대표님 연락되시면…….”
계약을 진행하려던 회사와의 계약은 미뤘다. 회사는 저를 신인과 별반 다를 바 없게 취급했다. 프로필에 올릴 만한 작품이라고는 이번에 찍은 영화 달랑 하나니 그럴 만했다. 하지만 제 노력의 시간을 부정하고 저를 무시하는 태도는 참을 수 없었다.
백이서 대표는 능력적인 부분은 부족해도 제게 잘 맞춰 줬다. 조금만 구슬리면 웬만한 말은 다 들어줬다.
“연락하지 마.”
“예?”
“징. 징. 짜증 나니까 하지 말라고. 되묻는 것도 하지 말고.”
“개인적으로 저희 대표님이랑 나눌 이야기가 있어서 그래요.”
“백이서가 왜 너네 대표야.”
말을 끊는 차계원의 목소리에는 비웃음이 가득 담겨있었다. 경멸에 가까운 비웃음.
“선배님 죄송하지만 저한테 지금 너무 막 대하시는 거 아닌가요? 제가 뭘 했다고 저한테 이렇게…….”
한태미가 벌게진 얼굴로 따지려 든다. 아무리 급이 다르다고 하지만 저도 배우였다. 아까부터 차계원은 자신을 노골적으로 하대하며, 무시하고 있었다. 이런 대우는 차계원이라도 모욕적이다. 자존심에 생채기가 나다 못해 박박 긁힌 기분이었다.
“한태미 씨.”
앞을 보던 차계원이 한태미와 눈을 마주치며 이름을 불러 온다. 차계원에게 따지기 위해 입을 열었던 그녀는 제게 단번에 꽂히는 살벌한 시선에 말을 멈추고 말았다.
“이 영화가 네 능력에 과분하지?”
“……뭐?”
“백수로 굴러먹고 싶은 거 아니면 그 입 좀 닥치세요. 떠들 시간 있으면 이나 좀 닦든지.”
그 말을 끝으로 차계원이 곧장 고개를 돌린다. 자신이 버러지라도 되는 것처럼, 조금이라도 닿기 싫다는 듯 몸을 반대편으로 기댄다. 한태미가 분을 참지 못하고 자리를 뛰쳐나갔다. 스태프 몇이 웅성거리며 그녀의 뒤를 쫓는다.
“……파리 새끼가 끝이 없네.”
차단을 하면 뭐 하나. 저렇게 틈만 나면 들러붙으려 하는데.
한태미는 정말인지 끈덕졌다. 백이서와 연락이 닿지 않자 회사로도 연락을 해 왔다. 이유야 안 봐도 뻔하다. 다시 들러붙겠다는 속셈이겠지.
“그 꼴은 못 보지.”
계원이 중얼거리며 의자 손잡이에 팔꿈치를 기댄다. 이제야 영화 타이틀이 올라가고 있었다.
* * *
뒤풀이네, 어쩌네. 자신을 잡는 사람들을 뿌리치고 온 집은 어두웠다. 한태미가 뛰쳐나갔으니 불화니 뭐니 뒷말이 나돌 것이다.
“…….”
신발장에 있어야 할 백이서의 밤색 단화가 보이지 않았다. 백이서는 발도 저보다 훨씬 작았다. 나가기 전까지 따듯하다고 느낀 집 안은 찬 공기만 내려앉아 있었다. 신발을 벗고 들어온 계원이 온 집 안을 천천히 둘러본다. 인기척은 나지 않았다.
이윽고 제 방까지 둘러봤으나 역시 아무도 없다. 곱게 갠 이불만 저를 반길 뿐이었다. 힘들다더니 와중에 이불 갤 힘은 있었나 보다.
피식.
계원이 옅게 웃으며 입을 연다.
“……없네.”
* * *
시사회가 끝난 후 차계원의 일정은 없었다. 그가 차기작을 고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광고, 화보, 영화. 어떤 것도 선택하지 않았다. 이서에게는 잘된 일이었다. 작품 고르는 걸 이유 삼아 차계원의 얼굴을 마주할 필요 없으니. 배우들이 한 작품을 끝내고 휴식을 취하는 경우는 많았다.
“…….”
그리고 이서는 그의 휴식기를 반가워했던 게, 얼마나 차계원이라는 인간을 간과했던 것인지 반나절도 안 돼서 깨달았다.
“참 좋은 특기를 가지셨어요.”
지금 차계원은 사무실에 나와 제 앞에 앉아 있다. 옅은 회색 코트 안의 검은색 셔츠가 깔끔하다.
“이런 걸 먹튀라고 하죠. 먹튀.”
물론 그의 뒤끝은 옷차림과 달리 깔끔하지 못해 보였다. 차계원은 외모만큼이나 비아냥대는 실력이 훌륭했다.
“얌전히 자고 있으라니까.”
그러나 비아냥거리는 말과 다르게 그의 얼굴 만면에는 만족스러운 미소가 달려 있었다. 말의 내용과 다르게 목소리도 나긋했다.
“어제 집에 가서 얼마나 상처를 받았던지…….”
그렇게 말하는 그는 조금도 상처받은 얼굴이 아니었다. 하긴 차계원이 상처라니 말 같지도 않은 소리다.
“그러셨…… 어요.”
대충 대꾸한 이서가 허공에 시선을 던진다. 차계원의 집을 나오면서도, 그가 한 소리 할 걸 예상했었다. 오히려 사납게 달려드는 게 아니라 놀랍다.
“잠은 잘 잤어요?”
차계원이 소파에 팔을 걸치고 묻는다. 잘 잤을 리가 없다. 어깨며 허리며 온몸이 쑤셨고 목까지 칼칼했다. 이서가 마른침을 삼킨다. 어제부터 먹은 게 없어 속도 안 좋았다.
“예……. 뭐. 시사회는 잘 끝내셨어요?”
“잘 끝냈죠. 대표님이 몸 바쳐 보냈는데.”
따스한 차계원의 웃음에 소름이 돋는다. 이서가 슬쩍 제 팔을 문지른다.
“추워요?”
우습게도 그는 진심으로 걱정되는 얼굴이었다. 옷이라도 벗어줄 기세라 더 소름이 돋았다. 제 몸이 아직도 욱신거리는 게 누구 때문인데.
“아뇨.”
이러다 얼굴에까지 소름이 돋을까 싶은 이서가 재빨리 대답한다.
“왜 그렇게 말수가 줄었어요. 내가 뭐라 할까 봐?”
“뭐라 하려고 오신 거 아닌가요.”
“뭐라 안 해요. 빨빨거리며 싸돌아다녀 봤자지. 어차피 갈 데도 없잖아요?”
차계원이 심드렁하게 대꾸한다.
“…….”
“몸은 괜찮아요?”
이서의 아래턱이 살짝 앞으로 나온다. 부아가 치밀었다. 힘들다는 사람 붙잡고 안 놔줄 때는 언제고.
그뿐이랴. 어깨고 목이고 안 씹어 놓은 데가 없어서, 목도리도 안 하는 제가 폴라 티까지 입었다. 차계원은 진짜 짐승도 아닌 주제에 발등까지 씹어댔다. 그래 놓고 걱정하는 척이라니. 배우 아니랄까 봐 연기력도 좋다.
“고양이 쥐 생각하시나요…….”
결국, 분을 못 이긴 이서의 입에서 저도 모르게 불퉁한 말이 나온다.
“아하하.”
차계원이 사무실이 떠나가라 웃는다. 한 손으로는 본인의 이마를 잡는다. 그의 이상한 행동에 슥 눈을 굴려 눈치 보던 이서가 안 본 척 다시 눈을 돌린다.
“……뭐 이런 게 다 있지.”
계원의 입에서 절로 바람 빠지는 소리가 난다. 백이서가 제 허파에 바람을 잔뜩 넣어 놓은 게 분명했다.
“…….”
“아. 대표님 진짜 화났구나.”
계원이 조용히 중얼거린다. 비틀린 제 입에서 헛웃음이 끊이지 않는 게 저 자신도 느껴졌다. 백이서는 눈치 보는 게 다 티 나는 주제에, 곧 죽어도 저를 똑바로 보지는 않는다.
병신. 쳐다도 못 볼 거, 눈에 힘은 뭐 하러 주고 있을까.
“이거 약이에요. 바르는 것도 있고, 먹는 것도 있고.”
계원이 상체를 숙인다. 가까워진 거리만큼 백이서가 등을 뒤로 뺀다.
“괜찮아요.”
백이서는 싫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계원이 약이며 잡다한 것들을 바리바리 싸 온 봉투와 쇼핑백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는다. 평소에도 아침을 안 챙겨 먹는다는 백이서가 오늘이라고 챙겨 먹었을 리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