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이건 속 좀 편해질 거예요. 아침 안 먹었죠?”
계원이 정갈하게 포장된 죽을 꺼낸다. 죽만 전문적으로 요리하는 한식집은 밑반찬으로 나오는 무생채와 장조림 맛이 일품인 곳이었다.
“됐어요.”
백이서가 손끝으로만 죽을 밀어낸다. 그 손끝이 야살스러워 보이는 걸 보면 저도 정상은 아닌 거겠지. 한 번 더 옅게 웃은 계원이 이번에는 곱게 포장된 도시락을 꺼낸다.
“과일 좋아하는 거 같던데.”
무심한 어투의 계원이 뚜껑을 열어 제일 탐스러워 보이는 딸기 하나에 포크를 꽂아 둔다. 그 옆으로 사과와 키위가 열 맞춰 들어 있었다. 향긋한 과일 내가 사무실에 풍긴다. 백이서의 시선이 슬쩍 과일로 향한다. 쭈뼛대는 꼴이 배가 고프긴 한 것 같았다.
“제사 지내요? 먹으라니까.”
한 번 더 권유하니 그제야 손을 뻗는다. 쳐다도 보지 않은 채 뻗은 손이 딸기에 꽂힌 포크를 쏙 가져간다.
“참나.”
차계원이 소파에 걸쳐 있던 제 손에 머리를 기댄다. 천천히 딸기를 가져간 백이서가 한입에 그걸 넣는다. 딸기가 들어가 볼록해진 볼이 느릿하게 움직인다. 백이서는 먹는 게 느리다.
볼록한 볼은 꼭 어제를 연상케 했다. 자신의 시선을 느꼈는지 백이서가 우물거리던 입을 멈춘다. 그리고 계원을 한 번 보더니 스윽 등을 모로 돌린다.
“하?”
어이없다는 듯한 계원의 뉘앙스를 들었는지 어깨가 움찔한다. 그러면서도 꿋꿋이 등을 돌리고 있는 게 그렇게 얄미울 수가 없다.
“지금 나한테서 등 돌리는 거예요?”
“…….”
비웃듯 입꼬리를 올린 계원이 도시락을 눈으로 훑는다. 그리고 개중 조각이 큰 사과 하나를 골라 든다.
툭.
“아?!”
계원이 던진 사과가 백이서의 머리에 명중한다.
툭.
“아!”
한 번 더 명중하자 백이서가 억울한 눈으로 돌아본다.
그러게 왜 등을 돌려.
“나 보면서 먹어요. 보면서.”
“…….”
“왜요.”
계원의 윽박에 자세를 바로 하고 앉은 이서가 불만스러운 표정을 숨기지 않는다.
“오늘따라 왜 이렇게 골을 부릴까.”
달래는 것처럼 조곤조곤 말하는 차계원이 실실 웃는다. 사람들이 왜 예능 따위를 보는지 알겠다.
사실 백이서가 왜 저리 골났는지 모르는 건 아니다. 그런데 그게 어디 제 탓인가. 먹음직스럽게 살랑댄 백이서 탓이지.
“너무 쳐다보시는데…….”
백이서가 포크를 내려놓으며 말한다. 웅얼웅얼 구시렁대는 입까지도 야살스럽다.
“어쩌라고요.”
“그냥……. 그렇다고요.”
“먹어요. 다시.”
계원이 이번에는 키위를 찍어 건넨다. 마지못해 받아 든 백이서가 힐끔거리더니 한입에 넣어 우물댄다.
“인삼즙이에요. 몸에 좋대요.”
과일을 다 먹은 걸 확인한 계원이 인삼즙 파우치를 하나 꺼내 건넨다. 백이서가 멀뚱히 그걸 보고만 있다.
“속도 편해진대요.”
백이서가 고개를 훽 돌린다. 그리고는 이번에도 손만 뻗어 받아 간다. 아무것도 없는 허공은 뭐 한다고 계속 보는지.
백이서는 감정 표현을 크게 하는 편이 아니었는데 계속해서 툴툴대는 걸 보면 골이 이만저만 난 게 아닌 것 같았다.
“아하하하. 미치겠네. 진짜.”
계원이 또 큰 소리로 웃는다. 병신 같은 주제에 골도 부릴 줄 아니 그렇게 웃길 수가 없다. 꼴에 지도 사람이라고.
돌아간 백이서의 목덜미가 붉다. 받아 간 즙은 먹을 생각을 안 하고 들고만 있다.
“줘요. 까 줄 테니까.”
“……?”
그 말을 들은 백이서가 보란 듯이 제 손으로 즙 파우치 귀퉁이를 뜯는다. 계원의 도움은 필요 없다는 듯 야무지게 뜯은 즙을 입으로 가져다 넣는다.
“잘 빠네요.”
“……?”
즙을 마시던 백이서의 목울대가 멈춘다. 계원의 말이 외설스럽게 들린 탓이다.
“콜록, 크흠.”
이서가 사레들릴 뻔한 목을 겨우 추스른다.
“놀라기는. 칭찬한 거예요.”
계원이 대수롭지 않게 대꾸한다.
“……안 먹을게요.”
“왜 또 안 먹어.”
순식간에 웃는 낯을 지운 차계원이 정색하며 목소리를 내리깐다. 즙을 내려놓으려던 이서가 얼른 다시 가져가 마저 마신다.
쫍. 쫍.
거의 다 마셨는지 쫍쫍대는 소리가 울린다. 한 소리 했다고 저렇게 열성적으로 먹을 일인지. 계원이 이제는 끅끅대며 웃는다.
“대표님 그거 알아요?”
“……어떤걸요?”
“개 새끼도 밥 주는 사람은 알아본대요.”
그렇게 말하는 차계원의 어조가 그와 어울리지 않게 자애롭다.
“…….”
“그냥 알아 두라고요.”
계원이 다 마신 즙 파우치를 가져가 쓰레기통에 버린다. 이서의 입에 박하 향이 나는 사탕도 한 알 넣는다.
“저 사탕 안 먹는데.”
“그건 안 달아요.”
못 이기는 척 오독오독 사탕을 깨무는 소리가 사무실에 맑게 울린다.
“점심이나 먹을래요?”
“아침 댓바람인데요. 죽도 사 오셨으면서.”
백이서가 시계를 가리킨다. 오전 열 시였다. 아침밥까지 챙겨온 사람이 할 말은 아니었다.
“그래요, 그럼 좀 더 놀다가 점심 먹고 그다음 저녁 먹어요.”
그게 뭐 문제냐는 듯이 차계원이 대꾸한다. 정말 저녁때까지 사무실에 있을 것처럼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던 잡지도 집어 든다.
“……점심 지금 먹을래요.”
백이서가 다급하게 대답한다. 꼭 초등학생이 발표하는 것처럼 손까지 들고.
“아하하. 아. 왜 이렇게 재미있지.”
“…….”
백이서가 인상을 찌푸린다. 아까부터 뭐만 하면 웃어대는 계원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게 일부러가 아니라고요?”
계원이 그런 백이서를 앞에 두고 한참 동안 웃는다. 찌푸린 얼굴도 우스운 걸 본인은 알까. 저 멍청한 인간은 그마저도 모를 것이다.
아무래도 저게 어제 제 간을 빼 간 게 맞는 것 같다.
* * *
점심이나 먹자던 차계원은 그 후로도 계속 이서를 끌고 다녔다. 더 놀다가 저녁 먹자는 말이 장난이 아니었는지, 정말 저녁까지 함께 먹었다.
차계원과 한 건 별로 없었다. 자신은 그대로 사무실에 앉아서 일했고, 차계원은 코앞에 앉아 그걸 구경했다.
점심을 먹은 후에는 계원의 손에 이끌려 다녔다. 그는 여러 취미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전시품을 보는 것이라 했다.
사람이 없는 개인 전시회장에 들어선 그는 진지하게 전시품들을 감상했다. 이서는 원래 그런 곳을 좋아하지 않았다. 사람이 많은 곳을 피하다 보니 자연스레 문화 생활과도 멀어졌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서의 눈길을 사로잡은 건 청량한 느낌이 나는 그림이었다.
이서의 키보다 조금 작은 캔버스는 붓질로 빼곡히 차 있었다. 조금의 공백도 없었다. 언뜻 보면 팝아트처럼 보이기도 하는 그림은 파도와 야자수가 윗부분에 질서 없이 그려져 있었고, 구름과 유리 파편으로 보이는 것들이 밑 부분에 겹쳐 그려져 있었다.
‘휴양지 좋아해요?’
‘글쎄요.’
쨍한 파란색과 녹색으로 뒤덮인 그림은 휴양지를 연상시켰다. 자신이 그런 곳을 좋아했던가. 잘 모르겠다. 휴식을 목적으로 여행을 떠나 본 적이 없었다. 아니, 여행 자체를 해 본 기억이 없다.
그 그림은 그날 저녁쯤 회사 로비에 걸렸다. 나란히 걸린 캔버스 두 개를 보며 이서는 자신이 그림을 좋아하는지 아닌지를 한참 동안 고민했다.
“무슨 생각 해요?”
“그냥…….”
“그냥 뭐요.”
“별생각 아니었어요.”
“별생각이어야 말해요? 그럼 지구상에 입 닫아야 하는 사람 천지예요.”
골똘한 머리통을 보던 차계원이 묻는다. 계원은 말 많은 사람은 질색이었는데, 이상하게도 백이서가 입을 다물고 있으면 궁금했다.
“차계원 씨는 그림이나 작품 보는 거……. 재미있나요?”
“대표님 보는 것보다야 덜 재미있죠.”
“…….”
“그런 게 궁금했어요?”
“……제가 그림 보는 걸 좋아하는지 아닌지 모르겠어서요.”
“그래요?”
“재미있는 것 같지는 않은데……. 보고 있으면 기분은 괜찮은 것 같고…….”
“앞으로 알아보면 되죠. 좋아하는지 아닌지.”
“…….”
이서가 말을 멈춘다. 차계원의 차는 어느새 제 집에 다 와 가고 있었다. 말없이 운전하던 계원이 입을 연다.
“신기하네요.”
“예? 뭐가요?”
“대표님 나 안 궁금해하잖아요.”
“…….”
“아니에요?”
차계원이 저를 보며 싱긋 웃는다.
“아…….”
생각해 보니 차계원 자체가 궁금했던 적은 없었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저 그림을 보는 그의 태도가 어울리지 않게 진중해 보여 물은 거였다. 그림을 좋아하는 사람은 그걸 재밌어하나 하고.
“다 왔네요. 내려요.”
차계원이 이서의 벨트를 풀어 준다.
“네……. 들어가 보겠습니다.”
결국, 오늘도 차기작에 관한 이야기는 꺼내지 못했다. 안 그래도 작품 보는 눈이 까다롭다는 차계원이 스페인 촬영을 승낙할지가 의문이었다.
김건도 아직 차계원에게 말을 안 했는지 감감무소식이었다. 제가 슬쩍 흘리려 해도 입이 안 떨어졌다. 차계원을 멀리 보내고 싶은 속내가 그에게 금방 들킬 것만 같았다.
“이거 가지고 들어가요.”
“이게…… 뭔데요?”
차계원이 차 뒤에서 큼지막한 쇼핑백 하나를 챙겨 이서의 품에 안긴다.
“롱 패딩이요.”
“진짜…… 사셨네요…….”
얼마 전 차계원이 흘리듯 말한 것이었다. 입으면 멍청해 보일 것 같다던 옷. 그때도 분명 안 입는다고 했었는데.
“계원 씨 입으세요…….”
이서가 쇼핑백을 다시 차계원에게 돌려준다. 예상외로 차계원은 순순히 받아들였다.
“아 커플룩 하자고요? 보기보다 남사스러운 걸 좋아하시네요.”
차계원이 기분 좋아 보이는 표정을 짓는다.
“……제가 입을게요.”
“역시 그게 좋겠죠?”
가만 보니 색도 분홍색이었다. 그것도 파스텔 분홍. 여러모로 제 스타일은 아니었다. 도착하자마자 옷장 속에 박아 놔야겠다는 다짐을 한 이서가 차에서 내린다.
“들어가서 코 자요. 다른 데 새 나가지 말고.”
차계원의 당부에 대꾸하지 않은 이서가 집으로 들어간다. 들어가면서 잠깐 돌아봤으나, 차계원의 차는 움직이지 않고 그대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