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계단을 오른 이서가 털레털레 현관문을 향해 걷는다. 차계원과 있다 보면 하는 것도 없이 기운이 빠졌다. 쇼핑백이 다리에 부딪혀 바스락댔다.
“어……?”
현관 앞에 보통 사람보다 큰 인영이 하나 서 있었다. 방금 헤어졌으니 차계원은 아닐 터였다. 이서가 조심스레 한 발 한 발 디딘다.
“누구…….”
“아이고. 선생님. 잘 지내셨습니까.”
걸걸한 목소리의 남자가 이서를 반긴다. 목과 얼굴에 칼자국이 난 남자는 한겨울임에도 얇은 잠바 하나가 다였다. 풍채 좋은 몸은 위압감을 느끼게 했다. 익숙한 이다.
“아, 사장님……. 잘 지내셨……. 어요?”
그는 대부업체 사람 중 하나였다. 회사 빚 대부분이 그 대부업체에서 진 빚이었다.
“어유. 잘 지내기는 그냥 배곯으면서 사는 거지.”
이서가 한 걸음 뒷걸음질 친다. 당연한 말이지만 그가 찾아올 때는 좋은 경우가 없었다.
“이자는……. 드렸는데요.”
“아이고. 그래. 이자. 줬지. 맞아 줬어. 받았지 내가. 그 쥐좆만 한 이자. 응 받았고말고.”
몸을 푸는 시늉을 한 남자가 이서에게 다가온다. 다가오는 기운이 흉흉했다. 남자는 가끔 찾아와 이자를 재촉하기는 했어도 이렇게 공격적으로 군 적은 없었다.
“그런데 왜…….”
초반에 사업을 막 떠넘겨 받았을 때 빼고 그가 직접 찾아온 적은 없다. 처음 사업을 벌인 건 김승주였다. 그리고 그가 사업을 떠넘기고 도망갈 때 그가 진 빚도 같이 떠넘겨졌다.
그가 도망가고 나서야 안 사실이지만 그는 애초에 빚 자체도 이서의 이름으로 진 것이었다. 대표 이름으로 이서의 이름을 올린 것도 그래서였고, 사업 자금을 불법 대부업체에서 끌어온 것도 그 이유였다.
“아. 그러니까 말이야. 우리 백 대표님이 빚을 진 게 언제야. 4년 전 아냐. 4년 응? 그래 4년이다. 4년. 1년도 아니고 2년도 아니고 자그마치 4년, 그치?”
김승주가 백이서를 제물로 삼은 건 대부업체 역시 알았다. 그러나 그게 무슨 상관인가 자신들은 이자나 듬뿍 씌워 받아내면 되는데. 오히려 이런 제물은 반갑다. 최대 이율을 씌울 수 있으니.
“밀린 이자는……. 없는 거로 아는데요…….”
백이서도 처음에는 그들에게 따져 물었었다. 자신은 못 갚는다며 배 째라는 식으로 나간 적도 있었다. 그러나 상식과 도덕이 없는 자들에게 그건 통하지 않았다. 외려 진짜로 이서의 배를 가르려 들었다. 겁을 주려던 요량이었든 아니든 그건 충분한 협박이 됐다.
그 후로 이서는 원금은 몰라도 이자는 꼬박꼬박 갚고 있었다. 그래 봐야 원금에 비교하면 얼마 안 되는 돈이었으나, 그마저 힘들었다. 그들이 떼 가는 이자는 20퍼센트를 웃돌았다. 그것도 사정 봐줘서 깎아 줬다며 생색은 생색대로 냈다.
“그렇지. 밀린 이자는 없어. 없는데. 아, 나도 귀가 있고 눈이 있으니까 말이야. 별별 소리가 다 듣기데?”
김승주가 도망가고 이서도 도망갈까 싶었던 그들은 초반에 이서를 감시하기까지 했었다. 그런 그들을 상대로 매번 제 일인 양 난리 치던 휘준 덕에 감시당하는 꼴은 얼마 안 가 면할 수 있었다.
“인터넷이고 유튜브고 다 난리야 난리. 아주 우리 백 대표님 이야기뿐이 없어.”
다가온 남자가 힘 있게 이서를 밀친다. 이서가 억지로 신음을 참았다.
“나 참. 뒤통수를 쎄려도 응? 정도껏 쎄려야지. 야. 니 회사 대박 났다메.”
“아니에요……. 그건 그냥…….”
“장난하냐? 어? 씨발 우리랑 장난해?”
남자가 이서의 말을 끊는다. 쇼핑백이 떨어져 나뒹군다. 남자의 뒤로 남자보다는 풍채가 작은 이가 다가왔다. 일행 같았다. 앞의 이보다 마르고 더 사납게 생긴 남자는 철골 비슷한 것까지 들고 있었다.
“야. 이 개새끼야. 돈을 빌려 갔으면 갚을 생각을 해야 할 거 아냐. 갚을 생각을. 대가리는 장식이냐?”
솔직히 말하면 갚고 싶지 않았다. 제가 진 빚도 아닌데 갚고 싶은 사람이 세상 어디에 있을까. 게다가 갚으려 해도 갚을 여력이 안 됐다. 이자도 겨우 내는 판국에 원금은 무슨 수로 갚는단 말인가.
“3억 금방 아니야. 어? 나 참 씨발. 3억이 뭐냐. 30억도 금방이겠구만. 가만 보니 갚을 생각이 없어. 생각이. 내가 요즘 세상에 이렇게까지 해야 하냐?”
퍽.
작은 남자가 이서의 얼굴을 향해 주먹을 날린다.
“윽!”
앓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순식간에 몸이 바닥을 뒹굴었다. 남자는 풍채만큼 힘도 좋았다.
“씨발. 요즘 잘나가더만! 3억이면 껌값 아니냐고! 이 씨발 새끼야!”
남자가 이서 앞에 쭈그리고 앉는다. 이서의 턱을 아프게 툭툭 친다.
볼 안쪽이 터졌는지 피 맛이 났다. 이서가 겨우겨우 바닥을 짚고 상체를 일으켜 앉았다. 시멘트의 찬 기운이 느껴졌다.
“이건 또 뭐야. 쇼핑도 하고 다니고? 살판났네. 살판났어. 이야. 남의 돈 떼먹는 새끼들이 제일 잘 살아요.”
퍽.
쇼핑백을 발로 찬 남자가 이를 바득바득 간다.
“그게 아니에요. 안 갚으려는 게 아니고…….”
퍽.
남자가 말하고 있는 이서의 멱살을 들어 올려 주먹질을 한다. 둔탁한 파열음이 울린다. 아까보다 더 감정이 실린 주먹은 눈앞을 하얗게 만들었다.
“까고 앉았네. 아니기는 씨발. 니 같은 새끼들 한두 번 본 줄 알아? 이러다 꽁무니 빼고 도망가려는 거 누가 모를 것 같냐고. 엉?”
“우리가 헛돈 달라냐? 우리 돈 내놓으라고 우리 돈! 우리 돈 이 개새끼야!”
남자가 소리친다. 우악스러운 얼굴이 이서의 눈앞에 들이밀어졌다.
“허윽. 여윳돈이……. 여윳돈이 없어서 그랬어요. 진짜예요. 드린 게 다예요. 이번 달 이자도 겨우, 겨우 드린 거예요.”
폐가 압박된 것처럼 말을 꺼내는 게 힘들었다. 이서가 떨리는 목소리로 겨우 말을 끌어내 이었다.
“우리도 이러기 싫어요. 어? 요즘 세상에 이러는 게 얼마나 위험한지 알아? 근데 안 이러면 돈을 안 갚잖아. 어?”
덩치 큰 남자가 이서에게 윽박지르며 키 작은 남자의 어깨를 두드린다.
“개좆만 한 새끼가, 씨발. 니 회사도 옮겼다메. 근데 돈이 없어? 돈이 없어? 우리가 장님이야?”
“아악!”
키 작은 남자가 철골을 들어 이서의 팔을 내려쳤다. 눈앞에 별이 튀었다. 어깨 부근이 아프다 못해 저릿하다.
“니는 씨발, 내가 보니까 말로 해서는 안 되는 새끼야. 내가 니 원금 갚게 만든다, 씹새끼.”
남자가 다시 한 번 철골을 높게 쳐들었다.
턱.
이서가 양팔로 얼굴을 가리며 눈을 질끈 감았을 때였다. 고통 대신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이건 또 뭐야.”
목소리의 주인은 심기가 불편한 듯싶었다. 팔을 풀고 고개를 빼꼼히 들자 익숙한 긴 다리가 굳건히 서 있다. 차계원이 이서에게 내리쳐질 예정이던 철골 끝을 잡고 있었다.
“이야. 이거 차계원 아니야.”
“…….”
칼자국이 길게 난 남자가 어깨를 풀며 건들거린다. 키 작은 남자는 제가 든 철골이 차계원에게 잡히자 당황한 듯 보였다. 잡힌 철골을 빼내려 용쓰고 있으나, 차계원의 손아귀 힘이 더 셌다.
“코 자라는 게 어려워요?”
차계원이 뒤를 돈다. 그는 몹시 기분이 나빠 보였고, 그걸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다. 차계원이 잡은 철골을 힘 있게 쳐내 빼앗는다. 그 반동에 키 작은 남자가 뒤로 나자빠졌다.
“이, 이!”
남자는 나자빠지자마자 몸을 일으켜 달려들었다. 창피함으로 열 오른 얼굴이 어둠 속에서도 느껴졌다.
“이, 이 개새끼가.”
퍽.
“컥. 으윽.”
차계원이 기다렸다는 듯이 남자의 복부를 발로 찬다. 둔탁한 타격음이 공간을 싸하게 만들었다.
“뭐, 뭐야? 씨발 너 뭐야! 왜 이래!”
일행인 남자가 당황해 소리친다. 차계원이 철골을 높이 치켜든다. 그리고 소리치는 남자를 향해 팔을 휘둘렀다.
퍽.
차계원이 내려친 건 칼자국이 길게 난 남자의 머리통이었다. 차계원의 동작에는 조금의 망설임도 엿보이지 않았다. 그저 모든 움직임이 하나의 장면처럼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으억! 으으. 으아!”
“계, 계원 씨!”
그제야 멍하니 주저앉아 있던 이서의 입에서 새 된 소리가 나왔다. 남자가 쓰러지고, 쓰러진 남자의 으깨진 머리에서 불그죽죽한 피가 진득하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어렵냐니까. 왜 대답을 안 해.”
“잠, 잠깐……!”
퍽.
차계원이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이미 으깨진 머리를 축구공 차듯 발로 찬다. 남자의 얼굴이 순식간에 참혹해진다. 동료의 끔찍한 비명에 나자빠져 있던 남자가 덜덜 떤다. 소변을 지렸는지 온통 지린내가 풍긴다. 제 발 가까운 데까지 오는 오물을 보며 차계원이 그쪽으로 발을 옮긴다.
“으으, 가! 가라고 씹새끼야! 너 뭐냐고! 뭔데 씨발!”
엉덩이 걸음으로 뒷걸음질 치며 남자가 소리친다. 무언가를 잡으려는 양 바닥을 더듬지만 잡히는 게 있을 리 없다. 질질 끌리는 철골 소리가 금속 특유의 소름 끼치는 소리를 냈다.
“가! 꺼지라고!!”
“꺼져 줘?”
“뭐, 뭐?”
“꺼져 주느냐고.”
바깥의 칼바람을 다 몰고 온 것처럼 차계원의 표정은 서늘했다. 그러나 그와 반대로 그의 말투는 퍽 상냥해서, 듣는 이로 하여금 이질감을 느끼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