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비도덕적 안락함-32화 (32/100)

#32

“너는 진짜……. 성격이 왜 그러냐.”

이서의 뺨에 소독약을 발라 주던 의사가 타박을 놓는다. 둘은 일면식이 꽤 깊어 보였다.

“빨리하고 가기나 해. 느릿느릿. 병원에서도 이렇게 일하나?”

“하도 지랄하길래 자다 말고 와 줬더니 말본새 봐라 저거. 네 팬들은 네 성격 이런 거 아냐?”

“알겠어? 생각하고 말해. 의사라는 사람이 그렇게 머리가 나빠서 어디다 쓰지?”

차계원의 비웃음은 누가 봐도 거만했다. 이서가 둘 사이에서 어깨를 웅크리고 눈치 본다.

“뻔뻔한 새끼……. 싸가지 없는 새끼…….”

“나도 아니까 나가. 다 된 것 같은데.”

“나간다, 나가! 내가 다신 오나 봐라! 너 아파 죽어도 이제 나 부르지 마라. 알았어?!”

씩씩거리는 앞에서 차계원은 넓은 보폭으로 걸어가 친히 현관문을 열어 준다. 이서가 황급히 일어나 그 뒤를 따랐다.

“오늘 감사했습니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차계원의 눈초리가 느껴지면서도 이서가 꿋꿋이 인사를 건넨다. 제 상처 때문에 이 시간에 오게 만들었다는 게 고맙고 죄송스러웠다.

“아까 내 말은 어디로 들었어요? 감사해야 할 사람 나라니까.”

“어휴……. 그럼 푹 쉬세요. 이서 씨. 다음에 기회 되면 한 번 봬요.”

혀를 쯧쯧 찬 의사가 신발을 신고 돌아갈 채비를 마친다.

“네. 안녕히 가세…….”

마저 인사를 나누는 이서의 앞을 차계원의 등이 가로막는다.

쾅.

더 보기도 싫다는 듯 의사가 소리 나게 현관문을 닫고 나간다.

“저러면서 누구 성격을 운운해.”

차계원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양 중얼거렸다.

“친하신가 봐요.”

“사촌 형이에요. 친하지는 않고.”

“아. 가족이셨구나.”

그제야 서로를 대하던 태도가 이해 갔다. 혼자 고개를 끄덕거린 이서가 올라가기 위해 계단을 향했다.

차계원의 집은 복층이었는데, 차계원의 방과 손님 방, 욕실 모두 위층에 위치해 있었다. 이서가 발을 돌리자 이번에는 등이 아닌 차계원의 정면이 앞을 가로막았다.

“……?”

이서가 의문 가득한 표정으로 멀뚱히 그를 본다.

“어디 가요.”

“방에…….”

“…….”

계원이 뚫어져라 이서를 쳐다본다.

“아. 소파에서 잘까요?”

이서가 물었다. 아무래도 그편이 저도 편하기는 했다.

“아!”

그러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차계원에게서 딱밤이 날아왔다.

“왜…….”

백이서가 두 손으로 이마를 가리고 계원을 올려다본다. 퍽 억울한 그 표정에 계원이 헛웃음을 친다. 빚쟁이들한테는 그렇게 처맞고도 억울한 기색이 하나도 없더니, 장난스러운 딱밤에는 울먹거리는 백이서가 어이없다.

“나한테는 왜 안 해요.”

“뭘…….”

“감사합니다, 하면서 꾸벅거리는 거.”

“아…….”

“저기에는 두 번이나 해 놓고. 이건 경우가 아니죠. 경우가.”

차계원이 다리를 건들거리며 딱밤을 때리는 흉내를 낸다.

“……감사합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서 입장에서는 그렇게 고맙지만도 않았다. 차계원은 본인이 알아서 해결하겠다고 했으나, 널브러져 있던 빚쟁이들을 어떻게 해결하겠다는 건지 감이 안 잡혔다.

그러나 이서를 보는 차계원의 표정이 마치 천하의 양심 없는 놈을 보는 듯해 울며 겨자 먹기로 감사 인사를 한다.

“한 번 더요.”

“감사……. 합니다.”

“한 번 더 해 봐요.”

차계원은 개구지게 웃고 있었다. 꾸벅 감사 인사를 하던 작은 머리통이 불만스럽다는 듯이 빳빳해진다.

“두 번이나 했는데…….”

“오늘 한 번 본 사람이랑 나랑 똑같다는 거예요? 대표님 그렇게 경우 없는 사람이었어요? 나에 대한 예의는 개나 줬나 봐요? 그 개새끼는 좋겠어요. 배불러서.”

“아니, 그……. 하……. 감사합니다.”

고작 인사 한번 안 한 게 다인데, 차계원의 비난은 신랄했다. 이서가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꾸벅 숙인다.

“뭘요. 서로 돕고 사는 거죠. 올라가요.”

어깨까지 으쓱하며 얄밉게 말한 차계원이 앞장서 올라간다. 제 방문 앞에 다다르자 이서에게 들어가라는 손짓을 했다. 이번에도 손님방을 줄 생각은 없어 보였다.

“저 오늘도 계원 씨 방에서 자나요?”

“아니면요.”

“방 많으신 것 같은데요.”

“다 서재예요.”

“저번에 집에 서재 없어서 회사에 만드신 거라고…….”

백이서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계원의 말에 반박한다. 기가 찬다는 듯한 계원의 웃음소리에도 눈치만 볼 뿐 방으로 들어가지는 않는다. 정말인지 백이서는 단박에 제 말을 듣는 법이 없었다.

“대표님이 집주인이에요? 내가 줄 방 없다는데 왜 말이 많아요?”

“…….”

“들어가요. 들어서 던지기 전에.”

차계원의 말에도 이서는 들어가지 않고 문 앞에서 주춤거린다. 그리고는 할 말이 있는 사람처럼 입을 벙긋거린다.

“그, 그럼 약속 하나만 하시면.”

“뭔 약속.”

“저 안 건드린다고.”

“…….”

그러면서 백이서는 꾸물꾸물 손가락을 내밀었다. 이걸 야무지다고 해야 할지 아둔하다고 해야 할지 분간이 안 간다. 살짝 굽혀진 새끼손가락이 희다.

“약속하면 내가 지킬 거라 믿어요?”

“네.”

“……그래요. 약속할게요.”

차계원이 순순히 이서의 손가락에 제 손을 걸어 준다. 백이서는 신체에 비해 손이 작은 편이었다.

“이제 빨리 코해요.”

침대에 자리 잡고 모로 누운 차계원이 옆자리를 툭툭 친다. 차계원의 침대는 둘이 눕기에도 넓은 사이즈지만 그가 누워있으니 이상하게도 좁게 느껴진다.

“빨리 자요. 잘 시간 넘었잖아.”

멋대로 이서의 잘 시간을 정한 차계원이 팔을 끌어와 눕힌다.

풀썩.

“저 원래 늦게 자서 괜찮아요.”

“할 게 뭐 있다고 늦게 자요?”

차계원이 이서의 목 끝까지 이불을 덮어 준다. 안 그래도 집 안이 따듯했는데 이불까지 두툼해 더웠다.

“그냥 별 이유 없어요.”

“그럼 오늘부터 일찍 일찍 자요.”

“…….”

“대답해요.”

“……네.”

차계원은 그의 성질과 상반되게 곧잘 상냥한 투로 이야기하고는 했는데, 대답이 없거나 반응이 제 마음에 들지 않으면 순식간에 태도나 목소리가 사나워졌다.

“……저기, 계원 씨.”

“왜요?”

“궁금한 게 있어서요.”

“말해 봐요.”

계원이 백이서의 내려온 앞머리를 뒤로 넘긴다. 백이서는 이마도 둥글었다.

“씨씨티비 고장 난 거요……. 어떻게 알았어요?”

“그냥 알고 있었어요.”

“어떻게요?”

차계원이 생각보다 자신에 대해 잘 파악하고 있다는 건 이미 아는 사실이었다. 말한 적도 없는데 형제 관계나 채무 관계 등을 알고 있었으니까.

“어떻게 아셨는데요?”

차계원에게서 대답이 나오지 않자 이서가 다시 한번 묻는다.

“그게 왜 궁금한데.”

“…….”

대답 없이 눈만 내리까는 백이서의 가슴을 계원이 토닥인다.

“내가 무서워요?”

“조금…… 요.”

백이서가 느리게 눈을 깜빡인다. 눕혀 주니 졸리기는 한 모양이었다.

“그래서. 무서우면 어쩌려고요. 대표님이 할 수 있는 게 있나?”

차계원이 조용하고 사근사근한 어투로 속닥인다. 자장가처럼 느린 목소리라 이서의 말도 덩달아 느릿해졌다.

“어……. 아니요. 없는 거…… 같아요…….”

이서가 웅얼거리듯 대답하며 눈을 감는다.

“이렇게 반푼이 같아서 어떻게 살았어요?”

차계원이 이서의 미간을 둥글게 문지른다. 토끼들은 이렇게 하면 잠든다는 걸 어디서 본 기억이 있었다. 제가 보기에 백이서는 토끼보다 여우에 가깝지만.

“……자요?”

그래도 효과가 있었던 모양인지 금세 도롱도롱 잠이 든다. 배 위에 곱게 손도 포개고 있다. 저번에도 느낀 거지만 백이서는 머리만 대면 자는 인간 같았다.

“무섭다 해 놓고 자는 거예요?”

이렇게 잘 잘 거면서 손님방은 뭐 하러 찾는 걸까. 계원이 이서의 머리를 제 팔에 얹는다. 그는 추위를 잘 타고 성정이 예민해 깊게 잠드는 일이 드물었다. 그래서 이렇게 금방 잠드는 백이서가 신기했다. 자신은 한 번 잠들 때도 두어 시간은 누워있어야 잠들었다. 아무리 피곤한 하루를 보내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기이하게도 백이서를 끌어안고 잔 날에는 잠이 잘 왔다. 다른 날과 달리 중간중간 깨는 일도 없었다.

“쯧.”

머리를 옮기고 자세를 바꾸는데도 백이서는 세상모르고 자고 있었다. 이런 주제에 건들지 말라니. 혀를 찬 계원이 조용히 잠을 취했다.

* * *

“뭐 해요.”

“출근 준비…… 요.”

먼저 일어난 이서가 부산스럽게 움직인다. 그 사부작거리는 소리에 덩달아 잠이 깬 차계원은 얼굴에 못마땅한 기색이 역력했다.

“쉬죠. 주말인데.”

계원이 이서를 끌어당긴다.

“평일 주말 따로 있나요.”

“일할 것도 없잖아요.”

깨어난 지 얼마 안 된 탓에 차계원의 목소리는 착 가라앉아 있었다. 그의 말처럼 가 봐야 할 일도 별로 없기는 했다. 차계원이 필요한 인력들을 적재적소에 배치한 덕에 더 그랬다.

거기에 소속 배우도 아직 차계원밖에 없는 상황이라 그가 휴식을 취하고 있는 요즘에는 더욱 할 일이 없었다.

하지만 집에 있으면 하루 종일 같이 있게 될 것 같았고, 그건 아무래도 불편했다.

“그래도…….”

“환자는 돌봄 받아야죠. 잠이나 더 자요.”

풀썩.

차계원이 어제처럼 이서를 끌어다 눕힌다. 이서는 평균보다 조금 좋은 체격이었고, 힘도 약한 편이 아니었는데 계원의 손에는 늘 쉽게 휩쓸렸다.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