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다 잤는데요…….”
“난 다 안 잤어요.”
백이서는 씻고 와서인지 머리가 젖어 있었다. 몸에서도 물 향이 가득 풍겼다. 사람마다 체향이 있다면, 백이서의 체향은 단 편이었는데, 청포도 비슷한 향과 비 냄새, 시원한 풀 내음이 섞인 묘한 향이었다.
계원이 이서를 품에 넣고 젖은 머리 정수리에 제 턱을 비빈다.
“그건 다시 사 줄게요.”
“……어떤 거요?”
“옷.”
이서의 머리에 쇼핑백이 찢어져 더러워진 패딩이 떠오른다. 필요 없다는 데도 도무지 듣지를 않았다.
“아……. 괜찮은데.”
“괜찮은 게 뭐 그렇게 많아요.”
“어차피 주셔도 안 입을 거 같아요.”
“왜. 잘 어울릴 것 같은데.”
차계원이 중얼거리며 이서의 귀 연골 뼈를 아프지 않게 문다. 등 뒤로 느껴지는 품이 단단했다.
“멍청하다고 하실 거잖아요.”
“그렇죠.”
“…….”
“아. 그래서 안 입는다고 한 거예요?”
계원이 이서의 등 뒤에서 피식피식 웃는다.
“꼭 그것 때문만은 아니고…….”
“알았어요. 속으로만 생각할게요. 됐죠?”
차계원의 말투는 많이 물러나 줬다는 식이었다. 그의 태도로 보아 옷을 받으면 또 왜 안 입느냐고 타박할 게 안 봐도 비디오다.
“안 됐는데…….”
이서가 들릴 듯 말 듯 한 목소리로 말한다. 작은 목소리였으나, 뾰로통함이 느껴지는 투였다.
“속으로 생각하는 것도 안 돼요? 되게 까다롭네.”
“저, 계원 씨.”
“왜요.”
차계원은 귀를 넘어 머리통을 앙 물고 있는 중이었다. 머리통이 입 안에 다 들어갈 리도 없는데, 계속해서 보이지도 않을 잇자국을 낸다.
“저는 언제까지 머무나요.”
“모르죠.”
머리에서 목으로 가는 뒷덜미가 물린다.
“빨리 가고 싶어요?”
백이서는 대답하지 않았으나, 집에 가고 싶다는 걸 어떻게 돌려 말할까, 고민 중인 게 뒤통수에서 느껴졌다.
“……아니라고 대답해요.”
계원이 물었던 뒷덜미를 아프게 다시 문다. 잇자국이 하얀 목덜미 위로 깊게 새겨졌다.
“으…….”
“빨리.”
“아, 알았어요. 안 가고 싶어요.”
자근자근 깨물고 있는 계원에게 이서가 항복을 선언한다.
“그래요. 집도 넓은데, 있고 싶을 때까지 있어요. 대표님한테 그 정도도 못 해 주겠어요.”
“…….”
“이렇게까지 제 집을 마음에 들어 할 줄은 몰랐네요.”
차계원은 제 좋을 대로 생각하는 데는 1등이었다. 이서가 계원의 품에서 힘을 빼고 몸을 늘어뜨린다. 그와 대화하면 몇 마디 나누기도 전에 지치는 기분이다.
“대표님.”
“예?”
“내가 그깟 구두 약속했다고 정말 안 건드릴 거 같아요?”
차계원이 이서의 귀에 속삭인다. 체향을 풀풀 풍기며 몸을 맡기는 걸 보니 구미가 당겨 왔다.
“……네.”
“뭘 믿고?”
“어……. 성격이 좀 나쁘시긴 해도 파렴치한까지는……. 아니시지 않을까요.”
고개를 젖히고 뒤로 돌아다보는 눈이 또랑또랑하다.
“파렴치한이라…….”
차계원이 이서를 제 쪽으로 마주 보게 한다. 한 번에 돌려지는 몸이 가벼웠다.
“대표님 혹시 알고 보면 대통령 손자 뭐 이런 거예요?”
“예?”
“아니지. 그건 아니던데. 아니면 마피아 뭐 이런 건가?”
“아, 아뇨.”
“그럼 밤톨만 한 주제에 뭘 믿고 이렇게 맹랑해요?”
“…….”
이서는 그제야 계원이 제게 시비를 걸고 있었다는 걸 알아차렸다. 그의 눈에 짓궂은 빛이 가득했기 때문이다.
“입 삐쭉이는 건 어디서 배웠어요.”
백이서의 입이 삐쭉거리며 세모꼴이 된다.
“아하하하하.”
그 모양이 꼭 모이를 바라는 새 새끼 같다. 계원의 큰 웃음소리에 이서가 고개를 훽 돌려 다른 곳으로 시선을 옮겼다.
“다시 해 봐요.”
이서가 그 말을 듣자마자 양 입술을 입 안으로 집어넣고 앙다문다.
“…….”
“다시 해 보라고 입 삐쭉 하는 거.”
“시흔데여.”
두 입술을 안으로 말고 있는 탓에 발음이 새어 나간다. 차계원은 뭐가 그리 웃긴지 침대 커버까지 구겨질 정도로 웃었다. 한참을 웃던 계원이 이서를 일으켜 세운다.
“밥이나 먹어요. 아침부터 웃었더니 배고프네.”
* * *
“아.”
“…….”
“아. 몰라요? 아.”
“제가 먹을 수 있는데…….”
밥을 먹자던 계원은 넓은 식탁에 이서를 앉혀두고 바로 옆에 자리 잡았다. 그리고는 반찬을 집어 이서의 입에 넣으려 했다.
“당분간 사용 자제하라는 거 잊었어요? 이제 내 말도 모자라 의사 말까지 안 들으려 하는 거예요?”
“다친 건 왼쪽인걸요……. 전 오른손잡이라.”
“아.”
“…….”
입을 벌리지 않자 계원이 이서 손에 들린 젓가락을 뺏어 간다. 앞에 뒀던 앞 접시도 저 멀리 손이 닿지 않는 곳으로 옮겨 놓는다.
“아.”
“……아.”
차계원네는 집안일을 도와주는 사람이나 식사를 준비해 주는 사람이 있었는데, 이상하게 한 번도 마주친 적이 없었다. 완성된 음식만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맛깔스러워 보이는 음식들이 고급스러워 보이는 회색 접시에 담겨 있었다.
누군지 모를 이의 음식 솜씨는 훌륭했다. 라면을 끓일 때도 물을 못 맞춰 맛없게 만드는 이서와는 딴판이었다.
“맛있네요.”
“그래요? 자. 아.”
특히 감자채 볶음과 시원한 뭇국이 일품이다. 아침을 잘 안 먹는 편인데도 깔끔하니 잘 넘어갔다.
“계원 씨는 안 드시나요?”
“먹을 거예요. 아.”
“……아.”
우물대는 볼을 계원이 숟가락 손잡이 부분으로 꾹 누른다.
“오늘 갈 데 있어요.”
“아……. 잘 다녀오세요.”
“같이 가는 거예요.”
차계원이 눈을 접으며 사르르 웃는다.
“……어디요?”
“아는 디자이너가 개업했어요. 별로 가고 싶지는 않은데, 신세 진 게 있어서.”
“네…….”
“밥 잘 먹으니까 특별히 데려가 줄게요.”
“전 굳이 안 가도 되는데…….”
“아.”
“……아.”
이서의 말을 가볍게 무시한 계원이 감자채 볶음을 욱여넣듯 입에 넣는다.
* * *
차계원을 따라온 곳은 청담동에 위치한 쇼룸이었다. 새 브랜드를 런칭했다는 디자이너는 이서도 익히 들어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잘 맞아요?”
“네……. 감사합니다.”
어딘가 어정쩡해 보이는 이서를 계원이 데리고 들어간다. 지금 이서가 입은 코트부터 구두까지 모두 계원이 이곳을 오기 전 장만해 준 것이었다.
부담스러워 몇 번을 거절하던 이서도, 런칭 자리에 잘 차려입는 게 예의라는 말에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차계원이 초대된 걸 보면 분명 유명 인사들이 모이는 격식 있는 자리일 것이다.
보통 초대받는 자리에 잘 가지 않는 차계원의 성향으로 볼 때 더 그랬다.
“와…….”
그리고 이서는 처음으로 차계원의 말을 듣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초대받은 사람의 수는 생각보다 적었지만, 자리한 이들이 거의 다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유명한 이들이었다. 제가 이곳에 온 게 실례가 되지 않을까 우려될 정도다.
“샴페인 마실래요?”
“아, 네.”
차계원이 샴페인 한 잔을 손에 쥐여준다. 투명한 선홍빛 액체가 찰랑인다.
“나 인사하고 와야 하니까 여기 있어요.”
“네…….”
“잠깐만 인사하고 올 거예요. 어디 다른 데 가지 말고, 이상한 사람 따라가는 것도 안 돼요.”
끄덕끄덕.
이서가 고개를 주억거린다. 어차피 갈 곳도 없고, 아는 사람도 딱히 없다. 그러나 차계원은 꼭 유치원생을 대하듯이 당부하고 나서야 발을 옮겼다.
계원이 멀어지자 이서가 천천히 내부를 구경한다. 회색 대리석 바닥은 보통 쇼룸에서 잘 쓰지 않는 소재였다. 띄엄띄엄 걸려 있는 옷들도 특유의 개성 있는 디자인이 그대로 녹아 있었다. 차계원을 초대한 것으로 봐서, 추후에 협찬을 넣으려는 가능성도 있었다.
“어……?”
조금씩 둘러보던 이서의 눈에 낯익은 사람이 들어왔다. 일전에 화보 촬영장에서 만난 사진작가와 보조 작가였다. 사진작가는 그 호탕함이 반가워 먼저 인사 걸고 싶은 마음이 컸으나 옆에 선 보조 작가를 보니 맞닥뜨리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더 커졌다.
일전에 되도 않는 말로 시비를 걸던 그는 괜찮은 사람 같지는 않았다. 다쳤다는 곳이 다 낫지 않았는지 팔부터 손까지 깁스를 한 상태였다.
‘다른 쪽으로 가야겠다.’
이서가 그들을 피해 테이블 바 뒤로 몸을 숨길 때였다.
“대표님?”
“어! 진강 씨!”
딱딱하면서 묵직한 목소리가 자신을 불렀다. 이진강이었다. 이진강을 보는 것 또한 화보 촬영 이후 처음이다.
“대표님도 오셨네요. 차계원 선배님 오시는 건 알았는데.”
진강이 반갑다는 듯 눈을 살짝 휜다. 무표정할 때의 그는 무서운 인상이었는데, 웃으니 순박한 느낌이 났다.
“네. 계원 씨랑 같이 왔어요.”
이서가 웃으며 손을 내민다. 맞잡아 오는 손이 그때와 마찬가지로 다부졌다.
“이렇게 뵙게 되다니 반갑습니다. 팔은……. 다치셨나 봅니다.”
진강이 이서의 목과 어깨에 연결돼 감긴 붕대를 보며 걱정스레 말한다. 수더분한 그의 표정에는 진심이 묻어났다.
“하하. 넘어지다가 부딪혔어요. 별로 아프지는 않아요.”
“조심하시죠……. 그래도 안 아프시다니 다행입니다.”
“걱정해 주셔서 고마워요.”
“뭘요. 그나저나 대표님…….”
“네?”
“그, 이런 말씀 드리기 좀 그렇지만……. 혹시 제가 많이 부족했을까요?”
“예? 갑자기 무슨…….”
영문을 알 수 없는 소리에 이서가 당혹스러운 티를 숨기지 못한다. 이진강은 부끄러운지 까무잡잡한 피부가 벌게져 있었다. 말하는 모양새도 좀 조심스러운 게 아니었다.
“회사로 컨택 드렸는데 연락이 없으셔서 말입니다. 연락드린 지 꽤……. 된 것 같은데.”
“컨택…… 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