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비도덕적 안락함-35화 (35/100)

#35

unrequited love

“우리 굿이라도 해야겠어요.”

다가온 굵은 목소리에 이서가 뒤를 돌아봤다. 어느새 뒤에 서 있는 계원이 부드럽게 웃는다.

“아……. 인사는 다 하셨어요?”

“아무래도 마가 낀 거 같아. 그쵸.”

차계원이 다정한 투로 중얼거리며 백이서의 어깨를 감싼다. 작은 중얼거림이었지만 진강에게도 충분히 들릴 만한 크기였다. 진강이 머뭇거리며 인사할 틈을 찾는다. 이제 막 제 의견을 피력하려던 참이었다.

“안녕하십니까. 선배님.”

진강이 일부러 크게 인사를 건넨다. 차계원은 마치 이진강이 이 공간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인 양 눈길도 주지 않고 있었다.

“……그래요. 반가웠어요.”

차계원이 간결하고 예의 있게 대꾸하며 발길을 돌리려 했다.

“저기, 선배님.”

“저기, 계원 씨.”

“…….”

진강과 이서가 그런 차계원을 동시에 불렀다. 진강은 이서와 하던 이야기를 마저 끝내고 싶었고, 이서는 진강에 대한 이야기를 묻고 싶었다. 이진강이 회사에 들어오고 싶어 한다는 걸 차계원은 알고 있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 없는 사이에 입이라도 맞췄어요? 말이 딱딱 맞네.”

차계원은 만면에 여유가 가득 묻어나 있었지만, 별로 기분이 좋은 것 같지는 않았다.

“죄송하지만……. 대표님이랑 나누던 대화가 있습니다. 바쁘십니까?”

진강이 이서의 다치지 않은 쪽 팔을 다급하게 붙잡았다. 이진강의 말투는 어쩐지 딱딱하게 느껴졌는데, 그의 성격 자체가 그런 것 같았다. 멋쩍어하는 듯도 했으나 자세히 살피지 않으면 티 나지 않았다.

“네. 바쁘네요.”

차계원의 말투에는 오만한 뉘앙스가 함께 서려 있었다.

“그…….”

단호한 태도에 당황한 이진강이 계원과 이서를 번갈아 본다. 그렇다고 백이서를 잡은 손을 놓을 수는 없었다.

사실 진강이 케이뉴에 연락한 건 화보 촬영이 끝난 바로 그날이었다. 보기와 달리 그는 낯가림이 심했고, 한참을 고민한 끝에 겨우겨우 연락을 취했었다. 전화를 받은 직원은 용건을 들은 후 가타부타 말도 없이 다시 연락드리겠다는 뜻만 표했다.

당연히 처음의 그는 얌전히 기다렸다. 그러는 동안 계약 종료일은 다가왔고, 회사에서는 재계약을 요구하고 있었다. 마음이 조급해진 진강은 메일도 보냈으나 묵묵부답이었다. 포트폴리오까지 첨부한 메일이었다. 분명 읽었다는 표시는 되어 있으나 답이 없었다. 핸드폰을 붙들고 몇 번이나 메일함을 들어갔지만 마찬가지였다.

그런 와중에 백이서를 마주쳐서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내색은 하지 않았으나 정말 그랬다. 한 번 본 사람을 함부로 판단해서는 안 되는 일이지만, 백이서 대표라면 거절한 이유 정도는 말해 줄 거라 생각됐다.

“가죠.”

진강이 할 말을 고르는 동안 차계원은 백이서를 데리고 자리를 뜨려고 했다.

“아, 아뇨. 계원 씨. 잠깐만요.”

“…….”

이번에 발을 멈추게 한 건 이서였다. 이서로서는 이진강이 회사에 들어와 준다면 나쁠 게 없었다. 물론 계원에게 덴 적이 있어 조심스러웠으나, 이진강 정도면 거물이었고, 차계원처럼 성격이 더러워 보이지도 않았다.

차계원이 대꾸 없이 이서를 길게 내려다본다.

“그……. 진강 씨가 저희 회사에 들어오고 싶으시다 해서요.”

“아. 그래요?”

차계원이 정말이냐는 듯 진강을 보며 웃는다. 그는 살갑게 미소 지으며 백이서의 팔을 잡고 있는 진강의 손을 느릿하게 떼어냈다. 진강의 악력도 꽤나 센 편이었는데 한 번에 떨어졌다.

“네. 지금 그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이서가 말끝을 흐린다.

“회사 측에 연락하면 될 텐데요.”

차계원이 진강을 똑바로 보며 말한다. 넌 그런 것도 모르냐며 질책하는 것 같은 태도였다. 진강의 키는 190으로 차계원과 비슷했는데, 꼭 차계원이 자신을 내려다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차계원이 싱긋 웃으며 백이서를 제 뒤에 세웠다. 그 탓에 시야가 차단된 이서가 뒤에서 고개를 빼꼼히 내민다.

“여러 번 연락을 드렸는데 답이 없으셔서요. 지금 대표님께 여쭤보던 참입니다.”

“연락 가겠죠. 기다리세요.”

진강이 뒤에서 고개를 내밀고 있는 이서와 눈을 마주친다. 이건 꼭 차계원이 대표 같았다.

“……언제 주실지 말씀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아니면 제가 회사로 가서 직접 얼굴 뵙고 대화 나누고 싶습니다.”

“지금 실컷 했잖아요. 대화.”

턱을 까딱이는 차계원의 눈빛이 날카롭다.

“답변을……. 못 들어서 말입니다.”

진강이 무뚝뚝하게 말한다. 그는 근성 있는 성격이었고, 지금을 놓치면 답변 따위 오지 않을 거라는 걸 알았다. 실제로 회사도 몇 번 가 볼까 했지만, 약속을 잡으려 할 때마다 ‘대표님이 출타 중이시다.’라는 말만 돌아왔었다.

“……곧 드리죠.”

차계원이 몸을 돌려 백이서의 양어깨를 잡고 발걸음을 뗀다. 진강의 시선에서 백이서는 이제 아예 보이지 않았다.

“대표님이! 직접 연락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진강이 더 멀어지기 전에 말했다. 명함이라도 받아 놔야 했는데 그러지를 못했다. 그새 차계원과 백이서는 50미터 정도 멀어져 있었다. 우뚝 멈춰 선 차계원이 느릿하게 고개를 돌린다.

“……그럼요. 우리 대표님이 직접 연락 주실 겁니다.”

* * *

차계원이 검지의 뼈마디로 제 관자놀이를 누른다. 백날 천날 눈치 없던 백이서는 이럴 때만 눈치가 빨라서 씻는다며 자리를 피했다.

같지도 않은 날파리 때문에 골치가 아픈 건 아니었다. 침대 헤드에 기대 있던 계원이 핸드폰을 소리 나게 협탁 위에 내려놓는다. 와중에도 계속 진동이 울린다.

강지묵이었다. 그는 아까부터 계속해서 계원의 집에 오겠다며 난리였다. 환자의 상태를 봐야 한다는 둥, 동생 집인데 뭐 어떠냐는 둥 핑계도 가지각색이었다. 여태 왕래도 딱히 없었을뿐더러 서로 만나기만 하면 이 갈기 바빴던 사이다.

“수작질하고 앉았네.”

아파 죽어도 부르지 말라던 인간이 오겠다는 이유는 뻔하다. 백이서를 구워삶아 저를 놀려 먹어 보려는 심산이겠지.

계원이 내려놨던 핸드폰을 들어 강지묵의 번호를 차단한다. 이렇게 해도 불시에 들이닥칠 인간이다.

탁.

그때 머리에 수건을 얹은 백이서가 방으로 들어온다. 몸에 걸친 계원의 옷이 헐렁하다.

“그냥……. 제 옷 입으면 안 될까요?”

“외출복이잖아요. 그리고 아직 안 말랐어요.”

“그래서 제가 집에 간다고…….”

“와요. 머리 말리게.”

계원이 이불을 걷으며 침대 귀퉁이를 톡톡 두드린다. 짐을 쌀 때 재촉 탓에 제대로 짐을 챙기지 못한 이서는, 잠옷으로 사용할 여분 옷이 한 벌뿐이었다. 그런데 그 한 벌도 차계원이 세탁기에 넣어 버렸다.

결국, 이서는 계원의 옷을 입을 수밖에 없었다. 이서가 한 손으로 엉거주춤하게 허리춤을 잡는다. 분명 허리끈으로 묶는 밴딩 바지인데 끈이 없었다. 차라리 제 외출복을 입는다니까 차계원은 실수인 척 그마저도 욕조에 던져 버렸다. 결과적으로 가져온 옷 모두가 물을 뚝뚝 흘리며 세탁실에 걸려 있었다.

“……여기서 말릴게요.”

“그러든지.”

백이서가 엉거주춤 걸어 안락의자에 앉는다. 흰 수건으로 머리를 탈탈 터는 게 사람이 아니라 말티즈 같아 계원이 빤히 바라본다.

“어떻게 할래요?”

“……어떤 걸요?”

“이진강 씨요.”

“글…… 쎄요.”

이서가 머리 말리던 손을 멈추고 눈을 도록도록 굴린다. 눈치를 보는 모양새였다.

“…….”

“저는 나쁘지 않은 것도 같고……. 어차피 지금 회사에 배우도 없고. 이진강 씨 정도면 괜찮지 않을까요?”

이서의 입장에서는 이진강이 들어와 준다면 그저 고마울 따름이었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 봐도 빚도 갚고 차계원을 내보낼 방법이란, 제 힘이 커지는 것뿐이었다. 회사가 성장해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우리 대표님은 저 하나로는 부족한가 봐요. 나는 배우가 아니라 개그맨인가?”

“아, 아뇨! 그럴 리가요. 그냥 저는…….”

“장난이에요.”

계원이 화사하게 웃는다. 이서가 다행이라는 듯 작게 숨을 내쉰다.

“그…… 계원 씨는 어떠신지.”

이서가 다시 눈을 도록 굴려 차계원의 눈치를 살핀다. 계원은 이럴 때의 백이서가 좋았다. 눈치도 없는 주제에 뭐라도 제 의중을 알아내겠다고 눈만 굴려댈 때.

“뭐 하러 물어요. 내 말 안 들을 거면서.”

계원이 심드렁하게 대꾸한다.

“……들으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이서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한다. 기죽은 듯 축 내려가는 어깨가 처량했다.

“아하하. 노력하고 있었어요? 하는데 그 모양 그 꼴이었던 거예요?”

“……네. 하는데 이 모양이네요.”

이서가 눈을 내리깔며 퉁명스러운 소리를 냈다.

“마음대로 해요.”

“……?”

“마음대로 하라고요. 대표님 회사잖아요. 대표님이 결정하는 거죠.”

“아…….”

“이리로 와요.”

차계원이 손을 까딱여 이서를 부른다. 아직 머리가 반도 마르지 않았다. 이서가 잠시 망설이다 어기적거리며 그의 앞까지 걸어갔다. 머리에 얹힌 수건이 떨어질 것처럼 위태했다.

“……지금 나랑 밀당 하는 거예요?”

침대 앞까지 간 이서가 앉지는 않고 뚝 멈춘 채 제 발끝을 내려다본다.

“계원 씨.”

“네.”

“……혹시 제가 개 같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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