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
“명색이 대표인데 대화는 나눠야 할 거 아니에요. 계약도 하고. 뭐, 대표님은 힘들 테니까 직원들이 진행해도 좋고요.”
“아니요. 제가 직접 대화 나누고 싶어요. 몇 시에 오시기로 돼 있나요?”
이서가 다급하게 묻는다. 직접 연락도 못 줬으니, 저도 만나서 이야기하고 싶었다.
“1시?”
“어……. 이미 늦지 않았나요?”
시간은 이미 12시가 훨씬 넘어 있었다. 지금 출발한다 해도 늦을 터였다.
“급한 사람이 기다려야죠.”
무표정한 계원이 대수롭지 않게 대답한다. 손에서 놓지 않은 백이서의 머리칼을 이번에는 아프지 않게 당긴다.
“그럼 연락이라도 해 줘야……. 계속 기다릴 텐데…….”
“이진강 연락처 알아요?”
“아니요. 모르는데…….”
생각해 보니 자신도 이진강도 서로 연락처를 몰랐다. 어제 대화 나누면서 명함이라도 줬어야 했는데 딱 명함을 꺼내려는 찰나 차계원이 대화에 끼어들었었다.
“그럼 말아요.”
“직원분한테 연락해 달라고 전하면…….”
“기다리는 게 뭐가 어렵다고요. 가만히 앉아 있으면 되는 거.”
차계원의 목소리에 귀찮음이 잔뜩 묻어 나왔다.
“그래도…….”
1시에 미팅 약속을 잡아 놓고 늦는다는 건 예의가 아니었다. 애초에 조금만 일찍 말해 주면 됐을 일을 이제야 말해 주는 차계원이 얄미웠다.
“왜, 왜요!”
차계원이 이서의 티셔츠 안으로 손을 넣어 옷을 벗기려 했다. 화들짝 놀란 이서가 제 옷자락을 잡고 내리누른다.
“이진강이 그렇게 마음에 걸린다면서요. 빨리 옷 갈아입고 가야 할 거 아냐.”
“제, 제가 갈아입을 수 있는데요.”
“환자잖아요. 내가 도와야죠. 나 아니면 누가 대표님을 돕겠어.”
생각해 주는 양 착실하게 옷을 벗겨 나가는 차계원의 중얼거림은 퍽 다정한 음성이었다.
“아니요! 아니요!”
얌전히 앉아 있던 이서가 한쪽 팔을 퍼덕이며 계원에게서 벗어난다. 그런 이서를 가볍게 든 계원이 옷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 * *
차에 앉은 이서는 출발할 때부터 창문 쪽으로 고개를 틀고 움직이지 않았다. 안전벨트를 꼭 부여잡고 있는 한 손에서 대화하지 않겠다는 굳은 의지가 엿보였다.
“표정이 왜 그래요?”
그걸 그냥 보고만 있을 인물이 아닌 차계원이 백이서의 볼을 톡톡 두드리며 묻는다. 마디로 긁듯이 문지르기도 한다.
“제 표정이 왜요…….”
“털 세운 고양이 새끼처럼 굴잖아요.”
“…….”
대답하지 않는 백이서의 귀 끝이 붉게 달아오른다. 즐거움이 가득 묻어난 표정의 차계원이 이서의 머리칼 속으로 손을 집어넣는다. 쓰다듬는다고 하기에는 거칠지만, 그렇다고 아주 사납지도 않았다.
“설마 아까 그거 만졌다고 토라졌어요?”
“만, 만지기만 하신 거 아니잖아요.”
이서가 제 머리칼을 헤집는 계원의 손을 탈탈 털어내며 나름대로 쏘아붙인다.
“참나. 내가 키스를 했어, 섹스를 했어. 그깟 가슴팍 좀 만졌다고 도와준 사람한테 면박 주는 거예요, 지금?”
“도와 달라고 한 적 없어요. 제가. 혼자 입을 수 있다고 말씀드렸는데……. 그리고 엉덩이……. 엉덩이도…….”
“그건 대표님이 꼬신 거잖아요. 만져 달라고.”
“제가 언제, 대체 언제요!”
“그게 꼬시는 게 아니면 뭐예요. 앞에서 엉덩이 살살 흔들어 놓고. 난 해 달라는 대로 해 준 죄밖에 없어요.”
능청스럽게 말 같지도 않은 말들만 골라서 늘어놓는 차계원은 당당했다.
“이…….”
그 뻔뻔함에 이서의 얼굴이 이제는 터질 것처럼 붉어진다. 입술을 앙다문 게 못내 억울한 모양새라 계원의 입매가 올라간다.
“이따 올 때 대표님 집 들를까요?”
“집은 왜요……?”
“짐 가져와야죠. 뭐. 계속 내 옷 입어도 난 나쁘지 않아요.”
바지춤을 붙잡고 엉거주춤 걷는 꼴도, 제 맘에 드는 옷을 골라 입힐 수 있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이참에 아예 바지를 주지 않는 것도 괜찮을 거다.
당연히 제 집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던 이서가 멈칫한다.
“다음 주에는 제 집으로 갈 생각이에요.”
“굳이? 그냥 우리 집 살아요. 넓고 편하잖아요.”
“그다지……. 편하지는……. 팔도 이제 안 아프고요.”
“안 편해? 왜?”
그 집이 편하지 못한 이유를 꼽으라면 하나부터 열까지 다 차계원이다. 그러나 차계원은 정말 모르겠다는 듯 의아해한다.
“그야……. 제 집이 아니니까요.”
“그게 문제가 돼요?”
“제 집이 있는데 굳이 신세 질 필요 없으니까요.”
“……아아. 그런가.”
그렇구나. 하며 읊조리는 계원이 부드럽게 코너를 돈다. 회사에 거의 도착해 가고 있었다.
* * *
자그마치 두 시간 가까이 앉아만 있는 이진강은 처음 자리한 그대로 묵묵히 기다렸다. 진강을 사무실로 안내했던 서글서글한 직원이 두 번째 커피잔을 가져다줄 때였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많이 기다리셨죠.”
미안한 얼굴의 백이서가 헐레벌떡 사무실 안으로 뛰듯이 들어왔다. 그 뒤로 차계원이 태연자약한 걸음으로 따라 들어오고 있었다. 그의 표정에는 성가시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아닙니다. 제가 너무 일찍 왔나 봅니다.”
“제가 늦은 게 잘못이죠. 바쁘실 텐데…….”
오랜 기다림에도 불구하고 수더분하게 머리를 긁적이는 이진강을 보며 이서의 눈썹이 팔자로 내려간다.
“바쁘면 다음에 이야기 나눠도 됐을 텐데요.”
어느새 소파를 차지하고 앉아 다리를 꼰 차계원이 냉담하게 말한다.
“차계원 씨!”
“하하. 괜찮습니다. 약속이지 않습니까. 어서 계약하고 싶기도 하고요.”
“계약서는 표준대로, 우선 제 임의대로 준비해 봤어요. 저번 소속사와 비슷한 조건으로 맞춰봤는데……. 어떨지 모르겠네요.”
직원을 통해 전달받은 이진강의 계약 종료 날짜와 조건들을 참고해 작성한 계약서였다. 진강이 백이서가 내미는 계약서를 한 장 한 장 넘기며 천천히 읽는다. 여타 소속사들이 그렇듯이 크게 별다를 것은 없었다.
“이진강 씨가 원하는 조건들이나 세세한 사항들은 말씀해 주시면 최대한 반영해 추가하도록 할게요. 편하게 말씀해 주시면 돼요.”
백이서가 뭐든 말해달라는 듯 고개를 주억거린다.
“그……. 우리 회사는 아직 성장 중인 곳이라 이진강 씨가 보기에 많이 부족할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진강 씨의 선택이 헛되지 않게 노력하겠습니다. 서로 좋은 영향을 주면서 함께 걸었으면 해요.”
진심을 담뿍 담은 말투에 진강이 티 나지 않게 살풋 미소를 띤다. 어차피 이곳을 다음 소속사로 선택한 이유는 하나였다.
“부족하다니요. 제가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계약서는 이대로 진행하면 될 것 같습니다.”
사실, 사람들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과는 반대로 진강은 연예계 생활 자체에 회의를 느끼고 있었다. 한순간의 주목으로 데뷔를 하고, 좋은 평가를 받으며 성장 가도를 달리고 있으나, 늘 마음 한편이 얹힌 것처럼 꽉 막혀 있었다.
자신은 천성부터가 연예인과 맞지 않았다. 묵묵하게 제 할 일만 하던 때와 달리 배우는 눈치가 빨라야 했고, 더러운 꼴도 못 본 척 지나쳐야 했다.
서로가 서로의 비위를 열심히 맞췄고, 앞에서는 살갑다가도 돌아서면 칼을 던졌다. 요령 없는 제 성격은 가끔 오해를 불러일으키기도 했고, 하루하루 지날수록 버텨내는 꼴에 지나지 않았다.
“어……. 이대로 바로요? 다른 원하는 조건이나 그런 건 없으신가요.”
“네 없습니다. 이대로면 충분합니다.”
막막함과 회의감으로 점철되어 있을 때 마주친 백이서는, 자신에게 여태 쌓인 연예계에 대한 선입견을 부수기에 충분했다.
촬영장에 온 대표라는 사람은 허술하고 어설펐으며, 스태프들의 말 한마디, 차계원 배우의 한 마디에 쩔쩔매며 돌아다녔다. 혼자 커피를 한가득 이고 오는 모습은 소속사 대표라기보다 어디 수직적인 회사의 신입 사원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그러면서도 다음 촬영을 걱정하는 자신을 볼 때는 올곧은 눈이었다. 이상하게도 그가 해 주는 칭찬은 입에 발린 소리가 아니라 진심이라고 여기게 되었다.
“그래도…….”
백이서의 머뭇거림에 진강이 누가 뺏어 갈세라 챙겨 온 도장을 꺼내 면면마다 찍는다. 그리고 백이서의 옆에 자리한 차계원을 흘긋 본다. 그는 자신이 존경하는 선배라고 할 수 있는 이였다. 화면을 통해 보는 그는 언제나 프로다웠고, 멋있었다. 그러나 백이서와 함께 있는 차계원은 어딘가 분위기가 달랐다.
우선 그는 묘하게 자신을 경계했다. 백이서에게 말을 걸 때마다 시선이 느껴져 고개를 돌리면 차계원이 자신을 보고 있었다. 지금도 그는 대놓고 진강을 관찰하고 있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샅샅이 훑는 눈빛이 칼날처럼 날카롭다. 배우와 대표가 계약하는 자리에 다른 배우가 자리하는 게 보통은 아닐 텐데도 차계원은 자연스럽게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저를 살폈다.
더 묘한 것은 그런 차계원을 이상하게 생각하기는커녕 외려 그의 눈치를 보는 백이서와, 백이서가 제 눈치를 보는 걸 꽤나 마음에 든다는 듯이 내려다보는 차계원이었다.
“이제 정말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대표님.”
“네. 저도 잘 부탁드려요. 진강 씨.”
진강이 뭐라 규정하기 힘든 기분을 숨기고 이서에게 악수를 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