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
김건이 집에 찾아온 건 다름 아닌 차기작 때문이었다. 어떻게 된 건지 차계원은 앞으로의 계획도 일절 상의하지 않았으면서 연락도 받지 않았다. 그렇다고 대표님에게 연락하면 차계원이 대신 받아 연락하지 말라는 말과 함께 전화를 끊었다.
“왜 집까지 와요. 휴식 기간이라 한 거 못 알아들었어요?”
“쉴 때 쉬더라도 다음 작품은 정해야 할 거 아냐.”
“어련히 알아서 할까.”
기껏 큰마음 먹고 왔건만 역시나 돌아오는 건 냉대였다.
“대표님은? 요즘 너네 집에서 지내고 계신다며.”
“자요. 코오……. 하고.”
차계원이 어울리지 않게 두 손을 겹쳐 제 머리에 가져다 대며 자는 흉내를 낸다. 건이 눈을 크게 뜨며 제 두 팔을 마구 비빈다. 온몸에 소름이 오스스 돋아난다.
“으아악! 뭐야아!”
“시끄럽게 하지 말고 자야 하니까 빨리 꺼져요.”
차계원이 건의 목덜미를 잡아 질질 끌고 나가려고 한다.
“야. 야! 잠깐만! 이것만! 응? 이것만 봐 주면 귀찮게 안 할게. 진짜야. 너한테도 대표님한테도 연락도 안 하고. 푹 쉬게 도울게. 제발, 계원아.”
건이 품 안 가득 안고 있는 대본과 기획안을 들고 우는 소리를 냈다. 몇 개만 추린다고 추린 작품들은 하나같이 놓치기 아까운 작품들이었다. 다들 캐스팅 막바지에 돌입한 터라 빨리 선택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하……. 줘 봐요. 어디.”
이때다 싶은 건이 테이블로 다가가 작품 세 개를 늘어놓는다. 와락 구겨진 차계원의 얼굴이 보였으나 애써 모른 척한다.
“일단 이건 독립 영화기는 한데, 친숙한 이미지 쌓는 데도 도움 될 것 같고. 스토리가 너무 좋아. 막 추천하는 건 아닌데 한 번쯤 읽어 봐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아서 갖고 왔고. 어……. 두 번째건 액션인데. 이 작품은 감독님이 하루가 멀다 하고 연락하시네. 투자도 꽤 받았더라고. 같이 하는 배우들도 쟁쟁해.”
“대충 말해요.”
차계원이 귀찮다는 손짓으로 휘휘 내젓는다. 낮잠 시간을 방해한 김건은 계원의 눈에는 그저 방해꾼에 지나지 않았다.
“마지막! 이게 진짜 마지막이야. 이건 대표님이 먼저 추천한 건데. 장근호 감독 거거든? 연출팀도 잘 붙었어. 전개도 신선하고. 나도 이걸 제일 추천하고 싶기는 한데…….”
“백이서가?”
“어, 어. 미스터리 장르인데 느와르 느낌 나고 플롯도 되게 탄탄하더라.”
심드렁한 얼굴의 차계원이 시놉시스를 집어 든다. 휘리릭 넘기는 그의 손이 빠르다.
“……스페인?”
“작품 배경이 스페인이랑 한국이 번갈아 나와서…… 현지 촬영 비중이 더 큰 것 같더라.”
“이걸 백이서가 추천했다고요?”
“얌마! 넌 대표님한테 자꾸 백이서가 뭐야. 백이서가!”
건이 누가 듣기라도 할까 검지 하나를 펴 제 입에 가져다 댄다.
“대표님이 보시기에 그게 제일 나았나 봐. 휘준 씨 의견도 그렇고, 내가 보기에도 제일 괜찮아. 상업적으로 봐도 나무랄 데 없잖아. 작품성만 따져도 그렇고. 캐스팅도 하나같이 다 좋더라고. 장근호 감독이면 작년에 칸 영화제 입성한 저력도 있는 데다가…….”
김건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한 차계원이 피식 한쪽 입꼬리를 당겨 웃는다. 워낙 차가운 인상이라 그 웃음에서 매서운 느낌이 났다.
탁.
“야. 왜…….”
시놉시스가 둔탁한 소리를 내며 탁자 위로 던져진다.
“밥 주는 사람도 못 알아보니……. 이걸 어떻게 하면 좋을까…….”
“밥? 뭔 소리야? 너 밥 안 먹었어?”
“매니저님.”
“어?”
“개수작 부리는 게 귀여워 보이면 내 정신이 나간 거겠죠?”
* * *
느리게 눈을 뜬 이서가 이불 속으로 몸을 한 뼘 더 집어넣으며 뒤척인다. 옆에서 느껴지는 딱딱한 온기가 이상하게도 크게 거슬리지 않았다.
“깼어요?”
“으음…….”
안 봐도 이미 해가 중천임을 알 수 있다. 아침잠이 많은 이서가 저절로 눈을 뜰 때는 오후가 가까워진다는 뜻이었다.
“더 잘래요?”
“아뇨…….”
백이서가 꼼지락거리며 고개를 빼꼼 내민다. 반만 나온 얼굴에는 잠이 덕지덕지 묻어 있다. 계원이 그 말간 얼굴을 한 손으로 감싼다. 엄지로 눈가를 살살 문지르니 꿈뻑 눈을 깜빡인다. 아침의 백이서는 체온이 더 따듯하고 얼굴은 더 맹해 보인다.
“아침에 일어나는 걸 유독 힘들어하네요.”
“네……. 혈압이 낮아서 그런가 봐요…….”
“잘 때 시체처럼 자는 거 알아요? 움직이지도 않고 가만히.”
“그런가요.”
무딘 성격은 이런 일에도 영향을 주는지, 백이서는 잠자리를 안 가리는 것뿐만 아니라 쉬이 잠들고, 한 번 잠들면 소리도 잘 못 들었다.
“업어 가도 모르겠네. 누가 주물럭거려도 세상모르고 자겠어요.”
차계원이 이불을 들쳐 안으로 들어온다. 팔베개를 해 주는 자세가 썩 자연스럽다. 계원을 보는 이서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진다.
“눈이 왜 세모가 돼요?”
“……여태 저 잘 때 만지셨나요?”
그동안 설마설마하며 속으로만 생각했는데, 조금 전 계원의 말에 꺼림칙한 확신이 들었다.
“네.”
“…….”
“없던 눈치가 쑥쑥 자라네요. 잘 먹여서 그런가.”
차계원은 대견하다는 투였다. 그리고 뻔뻔스럽게도 그걸 이제 알았냐며 타박까지 했다. 잠에 취해 있던 눈이 이제는 또렷이 계원을 응시한다. 그동안 원인 모를 울혈이나 쓰라림을 제공한 장본인은 눈을 휘며 웃고 있다.
“동의 없이 그렇게, 막 만지고 그러시는 거 성추행이에요.”
“만지기만 했겠어요? 물고 빨고 다 했지.”
지금도 은근슬쩍 들어온 손이 가슴께를 지분거리며 유두 근처를 살살 건드린다.
“읏…….”
“억울하면 고소하든가. 그럼 나도 망하고 회사도 망하고 대표님도 망하는 거죠. 뭐.”
피식 비웃는 계원이 얄미워 이서가 엉덩이를 뒤로 쭉 뺀다.
“진, 진짜 하면 어쩌시려고…….”
“하라니까. 근데 난 은퇴해도 잘 살겠지만, 대표님은 진짜 깡통 차지 않겠어요? 괜찮아요?”
차계원이 정말 걱정된다는 투로 이서의 귀에 나직하게 속닥인다.
“깡통…….”
“빚쟁이한테 쫓겨서 낑낑거려도 난 안 도와줄 거예요.”
차계원이 뒤로 물러난 엉덩이를 한 손으로 콱 쥐어 제 쪽으로 당긴다. 터트릴 것처럼 잡힌 엉덩이에 이서가 계원의 팔을 찰싹찰싹 때린다.
“안 도와주고 옆에서 구경할 거예요.”
“놔, 놔요……!”
“놔요?”
이서의 손은 나름 매운 편인데도 계원은 꿈쩍도 안 했다. 외려 이서의 손바닥이 아프기 시작했다.
“네. 빨리 놓으시라니까요! 손도 빼시고.”
“흐음…….”
찰싹. 찰싹.
백이서가 쉬지 않고 저지하며 팔을 때려댄다. 계원이 그를 물끄러미 내려다본다. 이 병신은 학습 능력이 없는 건지 매번 제 손에서 벗어나려고 안달이었다.
“언제쯤 소용없다는 걸 깨달을지.”
계원이 백이서를 들어 제 위에 올려놓는다. 계원의 위에 겹쳐 엎드리게 된 이서가 파닥거린다. 계원이 한 팔로 이서의 허리를 감싸 안고 다른 손으로는 머리를 반복해서 쓰다듬어 내린다.
“쉬이…….”
“…….”
파닥거림이 한숨과 함께 잦아든다. 배 위의 무게감이 적당하다.
“꼭 힘을 빼야 얌전해지네요.”
이서가 한숨을 쉬며 사지를 축 늘어뜨린다. 막 일어났는데 100미터 달리기라도 한 것처럼 체력이 모자라다. 차계원네 집에 머문 지 벌써 3주가 지나가고 있었다. 집에 돌아가려 할 때면 차계원은 자잘한 일들로 이서를 잡아 두었다. 그러면 또 자신은 저도 모르게 어물쩍 넘어가고 마는 것이었다.
“어휴…….”
“왜 한숨이에요.”
나긋한 속삭임에 귓가가 간지럽다. 허리를 감고 있던 손이 은근슬쩍 옷 안으로 들어온다. 요 며칠 차계원은 이상했다. 널뛰기하듯 행동이나 기분을 종잡기 어렵던 그의 태도가 묘하게 부드러웠다. 하지만 부드러우면서도 은근히 불안했고, 그의 눈빛은 종종 의문스러웠다.
붕대를 푼 날부터 계원은 이서를 가만두지 않았다. 육체적 관계까지 가는 일은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으며, 차계원이 늘 그렇게 만들었다. 이런 식의 관계는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다가도 정신 차리고 보면 또 반복이었다.
거의 매일같이 섹스를 하고, 일어나면 밥을 먹고, 자잘한 일들을 함께하다가 잠자리에 들었다. 의도치 않게 차계원의 휴식 기간 동안 저 또한 쉬고 있었다.
“……회사에 가 봐야 하는데…….”
이서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어제도 별일 없었어요. 이진강은 CF 고려 중이라네요. 저번 주에 대표님이 좋다고 한 광고 기획 있잖아. 자동차 광고.”
“어……. 촬영은 언제인데요?”
“음. 계약 성사되면 다음 달? 자세한 일정은 내일 알려 줄 거예요.”
이런 식이었다. 일어나면 항상 차계원은 회사 일을 알려 주었고, 매일 오후쯤 되면 회사에서 보고서를 보내왔다. 그리고 회사는 놀랍도록 잘 돌아가고 있었다.
“오늘따라 골똘하네요. 이제 일어나요. 밥해 놓은 거 식겠네.”
“밥…… 이요? 또 직접 하셨어요?”
차계원이 몸을 일으키며 이서도 일으켜 올린다.
“대표님 늦게 일어나니까 해 놓고 올라왔죠.”
요즘 그는 항상 본인이 아침을 했다. 한식, 양식, 간단한 브런치 등 메뉴도 다양하게. 집안일을 도와주는 분도 계시는데 굳이 본인이 손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그리고 차계원은 요리를 못했다. 신기하게도 매번 다양하게 맛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