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비도덕적 안락함-40화 (40/100)

#40

“어제 팟타이 먹고 싶다 했잖아요.”

씻으러 가며 혼자 중얼거린 말이었는데 그걸 또 그새 들었나 보다.

“팟타이…… 요.”

“안 내키나 봐요?”

“아뇨……. 맛있겠어요. 그냥 까다로운 요리니까. 힘드셨을까 봐…….”

“그게 뭐라고 힘들어.”

이서는 아침을 안 먹어 버릇해서 메뉴가 뭐든 그게 그거였는데 차계원은 아니었다. 덩달아 하루에 한 끼 내지는 많아야 두 끼를 먹던 이서도 끼니를 제때 챙기게 되었다. 이서가 해물이 잔뜩 든 팟타이를 입 안 가득 넣어 우물거린다. 본연의 맛을 잃은 새우가 퍼석했다.

“괜찮아요?”

“……네 맛있어요.”

“다행이네요.”

차계원이 환하게 웃으며 이서의 앞 접시에 가득 올려 준다. 이서가 그걸 물끄러미 보다가 크게 한 입 더 먹는다. 정말인지 아무 맛도 안 난다. 어디선가 탄 냄새도 희미하게 나는데 용케도 탄 부분은 숨긴 것 같았다. 차계원은 미각이 없는 걸까. 그런 생각을 할 즈음 핸드폰이 울렸다.

징. 징.

“아. 저, 잠시 전화 좀.”

“받고 와요.”

이제는 굳이 저장하지 않아도 알아볼 만큼 익숙한 빚쟁이 번호였다. 이서가 후다닥 화장실로 뛰어가 전화를 받는다.

“……여보세요?”

[예. 백이서 씨. 어째 연락이 한번 없어? 바다라도 빠져 죽은 줄 알았네. 어?]

“죄송합니다…….”

[죄송이고 나발이고. 왜 이번 달에는 소식이 없냐고. 거 이자까지 밀리는 건 너무하는 거 아닙니까? 회사 잘나가는 거 온 세상이 아는데.]

걸쭉한 목소리의 남자는 화가 많이 난 듯싶었다. 하지만 이번 달은 정말 여유가 없었다. 차계원이 소속사에 들어왔다고 기사야 잔뜩 났지만, 그는 소속사를 옮겨 온 뒤 맡은 작품이 없었다. 화보 촬영도 저번 소속사와 계약됐던 촬영을 마무리 지은 것뿐이었다.

“제가 여유가 없어서……. 다음 달에 한 번에 드리면 안 될까요…….”

이서의 목소리가 절로 기어들어 간다.

[이야. 대표님 지금 장난해요? 대표님네가 저번에 우리 애들 패 놔서 깽값 어마어마하게 들었어. 우리 일도 못 하고 있다니까?]

“그, 그건 차계원 씨가 해결했다고 들었는…….”

[아. 그래 그건 맞는데……. 아무튼. 벌써 기일 넘었으니까 알아서 하시라고. 나는 하루도 빠짐없이 이자 받아낼 거니까. 다음은 무슨 다음.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 하고 앉았네.]

“그럼 이자는 얼마나 더…….”

[됐고. 입금 계좌 바뀌었으니까 여기로 보내요. 문자 지금 넣었으니까.]

“잠, 잠시만요.”

용건을 끝낸 남자가 바로 전화를 끊어버린다. 이서가 욕실 벽에 머리를 기댄다. 세면대 위에 장식된 디퓨져의 우드 향이 코를 찌른다.

“하아…….”

항상 이랬다. 잠깐 멍하게 있으면 곧바로 현실이 치고 들어왔다.

똑. 똑.

“네! 네. 나가요.”

노크 소리에 나가려고 문고리를 잡기가 무섭게 문이 벌컥 열린다.

“급하게 들어가길래. 무슨 전화인데 그래요. 뭔 일 있어요?”

“예? 아, 아뇨.”

“없어요?”

“네, 네. 별일 없어요.”

“……밥 마저 먹어요.”

“네.”

차계원이 이서를 다시 끌어다 식탁 앞에 앉힌다. 이서가 앞에 쌓인 팟타이를 마저 입에 넣는다. 꼭 자갈들을 씹는 것처럼 혀가 까끌거렸다.

* * *

“저 정말 집에 돌아가야……. 할 거 같아요. 너무 오래 머물렀네요.”

밥을 다 먹고 갓 내린 커피를 내미는 계원에게 이서가 머뭇거리다 말을 꺼낸다. 이래 봐야 또 갖은 핑계로 능숙하게 제 주의를 돌릴 게 분명하다. 이서가 더 휘둘리지 말자고 속으로 굳게 다짐한다. 벌써 3주였다.

“그래요.”

그러나 의외로 차계원은 순순히 이서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신랄한 말들로 제 풀을 꺾어 놓거나, 무시할 거라고 생각한 이서의 예상과 달리 평온한 표정으로 커피만 삼킨다.

“오늘 가요 그러면.”

“예, 예?”

“어차피 가실 거 더 미뤄 봐야 뭐 해요.”

“아, 네. 그렇죠.”

“짐 챙겨요. 데려다줄 테니까.”

차계원이 커피잔을 소리 나지 않게 내려놓고 자리를 뜬다. 그 높낮이 없는 음색과 군더더기 없는 움직임이 낯설었다. 잠시 당황한 이서가 제 몸에 걸쳐져 있는 차계원의 옷을 내려다본다. 그래 이유야 무슨 상관인가. 드디어 자신이 귀찮아졌거나 그 특유의 변덕이 발휘된 거겠지. 그 이유가 뭐건 간에 이서에게는 다행이었다.

* * *

“진짜요? 차계원 씨가 대본도 읽어 보고 싶으시다 하셨다고요?”

“그렇다니까요. 작품을 좋게 보셨나 봐요.”

이미 유선상으로 상황 설명을 다 들었을 텐데도 제작사 측은 믿기지 않는지 몇 번을 반복해 물어왔다.

“솔직히 기대도 안 했거든요. 이번 영화 작업도 끝난 지 얼마 안 되셔서요.”

“워낙 좋은 작품이니까요. 놓치기 아쉬운 영화잖아요.”

“어휴. 대표님도, 참. 신경을 많이 쓰기는 했어요. 저희도 엄청 기대하고 있는 작품입니다. 감독님과도 정말 오랜 회의 끝에 시작하게 된 거고.”

“네, 네. 그럼요.”

“저희 연출 감독님이랑 대본 감독님 친구인 건 아시죠? 두 분이 계속 계획해 오던 이야기예요.”

“어쩐지 플롯이 탄탄하더라고요.”

30대 중반으로 보이는 여자는 열의가 넘쳤고 그 열정이 주는 빛은 그녀를 멋있어 보이게 만들었다. 무테안경 뒤의 눈은 진중하면서도 패기가 느껴진다. 그녀는 이번 영화의 담당자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보는 안목이 좋으시다니까. 여기 대본이요.”

김건은 차계원이 해당 영화를 진지하게 논의해 보고 싶어 한다고 전해왔다. 은연중에 느끼는 거지만 차계원은 중요한 일은 제게 말하지 않았다. 그의 집에서 지내는 3주 동안 영화에 대한 이야기는 조금도 들은 적이 없다.

“감사합니다. 잘 전달해 드릴게요.”

처음 영화사에서 보낸 건 시놉시스와 대략적인 시나리오 내용이 들어간 트리트먼트였고 차계원은 대본을 살펴본 뒤 결정하겠다고 했다. 아직 확정된 건 아무것도 없었으나 흘러가는 분위기는 긍정적이었다.

“저희가 감사하죠.”

담당자는 연락을 받자마자 자신이 직접 대본을 챙겨 들고 회사까지 찾아왔다. 팩스나 등기 등의 방법이 있는데도 직접. 그녀가 얼마나 이번 영화에 열성을 붓고 있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아직 확실히 결정하신 건 아니에요. 차계원 씨도, 저희도 긍정적으로 검토해 보도록 할게요.”

“그럼요. 천천히 결정하셔도 돼요. 충분히 심사숙고해 보시고 연락 주세요.”

“외부로 새어 나가지 않게 부탁드릴게요. 혹시나라는 게 있으니까…….”

고스란히 느껴지는 그녀의 열정과 들뜸에 덩달아 들뜨는 마음 반, 조금 미안한 마음이 반 들었다. 아직 섣부르게 진행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확정된 게 아무것도 없는 만큼 언제든 물거품이 될 수 있다. 검토 단계나 논의 단계에서 엎어지는 경우야 허다하지만, 이서는 그런 게 익숙지 않았다.

“걱정하지 마세요. 함께하게 되든 아니든 보안은 철저히 해야죠. 그렇다고 김칫국을 아예 안 마신 건 아니지만요.”

여자가 유쾌하게 웃는다.

“차계원 씨께서 읽고 싶어 한다는 사실 자체랑 이렇게 연락 주신 것만도 저희는 기뻐요. 차계원 씨가 고른 작품 중 대박 안 난 작품이 없잖아요. 그만큼 저희 작품이 가망성 있다는 뜻이니까.”

“잘됐으면 좋겠습니다.”

“맞다. 대표님. 케이뉴에 이진강 배우도 들어왔다고 하던데요?”

“예. 어쩌다 보니 이야기가 잘돼서요.”

“음…… 저희 아직 캐스팅 안 된 배역이 몇 개 있는데 그 중 주·조연 캐릭터가 하나 있거든요. 거기 나오는 강무 캐릭터요.”

“아. 저도 봤어요. 거의 주연급이던데요.”

“맞아요. 좀 강인한 이미지라 쉽게 캐스팅을 못 하고 있었거든요. 혹시 이진강 배우가 맡아보시는 건 어때요? 시놉이랑 대본 한 부 더 드려 볼게요.”

“좋죠. 한 번 말씀드려 볼게요.”

“네. 잘 부탁드려요. 그럼 저는 이만 가 볼게요!”

“오늘 정말 수고 많으셨어요. 조심히 들어가시고요.”

“수고는요. 이게 제 일이죠. 대표님도 수고하세요!”

“네! 결정되는 대로 연락드리겠습니다.”

“그럼 기대 가득 안고 기다릴게요!”

담당자가 손을 팔랑팔랑 흔들며 대표실을 떠난다. 활기찬 사람이다. 이서가 파라락 대본을 훑어본다. 장근호 감독은 영화의 색감을 잘 살리는 거로도 유명한 감독이었다. 연출가 출신이라 세심하고 감각이 좋았다. 여기에 스페인 배경까지 합쳐지면 그 풍경이 기가 막힐 것이다.

“로맨스 영화였어도 좋았겠는데.”

이번 영화 장르는 느와르였다. 미스터리 요소가 첨가된 느와르.

“잘 어울리네.”

언뜻 떠올려 보기만 해도 차계원과 딱이다.

그는 저를 집에 데려다준 후로는 연락이 없었다. 회사로 찾아오지도 않았다. 그게 당연한 건데. 다행인 건데 마음 한구석이 찝찝했다.

똑. 똑.

“네!”

이서가 찝찝함을 애써 떼어내려 할 때 노크 소리가 울렸다.

“대표님 바쁘십니까?”

“아! 진강 씨. 무슨 일이에요?”

“이 앞에 지나다가 대표님 계시면 같이 점심이라도 먹을까 해서 말입니다. 혹시 식사하신 건…….”

아직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는 커피잔 두 잔을 보며 이진강이 뒷목을 긁적인다. 그의 손에는 종이로 된 쇼핑백이 들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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