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비도덕적 안락함-41화 (41/100)

#41

“아뇨. 마침 배고팠는데! 이리로 오세요.”

이서가 활짝 웃으며 그를 반긴다. 안 그래도 슬슬 배가 고파 오던 참이다. 본 기간이 얼마 되지 않는데도 이진강은 편한 느낌을 준다. 시골 청년 같은 수더분함 때문일 수도 있고, 왜인지 모르게 휘준과 비슷한 느낌이 들어서일 수도 있다.

“며칠 안 보이시더니, 오늘은 계셔서 다행입니다.”

소파로 걸어오는 이진강은 반가움을 숨기지 못했다. 보폭이 넓어서인지 금방 거리가 좁혀진다. 삼 주간 차계원네 머문 탓에 자연스레 이진강과도 볼 일이 없었다.

“아, 자주 찾아왔었어요?”

“예? 아. 예. 그 자주는 아니고 운동하는 데가 근처라. 그, 대표님 초밥 좋아하십니까?”

이진강의 눈이 갈 곳을 잃는다. 그가 허둥지둥하며 초밥들을 꺼내 놓는다. 다급한 손놀림에 장국이 쏟아질 뻔하기도 했다.

“네. 해물은 다 좋아해요. 그러다 다 쏟겠어요.”

이서가 장난스럽게 말하며 포장을 벗기는 걸 돕는다. 포장도 고급스러운 초밥은 생선 살에 윤기가 돌았다.

“다행입니다. 저도 해산물을 좋아해서요. 바닷가에서 자랐거든요.”

“정말요? 바닷가 어디요?”

“나루마 마을이라고 호주에 있는 곳입니다. 어릴 때는 호주에서 자랐어요. 덕분에 해산물은 가리는 게 없습니다. 회보다는 굴이나 익힌 생선을 더 많이 먹기는 했지만요.”

이진강에 대한 첫인상은 무뚝뚝하고 과묵했는데 그는 의외로 스스럼없이 본인의 이야기를 할 줄 아는 사람 같았다.

“와. 뭔가 잘 어울려요.”

“해산…… 물이…… 말입니까?”

“아뇨. 아뇨. 그거 말고요. 진강 씨는 되게 이국적인 느낌이 난다고 생각했었거든요. 호주 하니까 뭐라고 해야 하죠. 막 서퍼들도 생각나고 그래서요. 좀 핫한 외국 미남 느낌?”

“그, 아하하, 감사…… 합…… 니다.”

진강이 벌게진 얼굴로 나무젓가락만 들었다 놨다 한다. 그는 칭찬을 듣는 일, 특히 외모와 관련된 칭찬을 받을 때가 가장 낯간지러웠다.

“그럼 진강 씨는 혼혈인 거예요?”

“정확히는 어머니가 혼혈이십니다. 할아버지께서 호주분이셨어요. 할머니와 아버지는 한국인이시고요.”

어쩐지. 그의 외모는 토종 한국인이라기에는 조금 어색한 부분이 있었다. 높은 콧대나 유난히 도드라진 턱선, 깊은 아이홀이 한국적이라기보다는 혼혈 쪽에 가까웠다.

“그러셨구나. 국적은요? 그러면 이중 국적인가?”

“아! 지금 국적은 대한민국 국민 맞습니다. 군대도 다녀왔고요.”

이진강은 평범한 말을 할 때도 어디인지 모르게 각이 잡혀 있었다. 꼭 갓 군대에 입대한 스무 살짜리 청년과 비슷했다.

“국적은 진강 씨가 선택한 거예요? 멋있네. 부대는 어디 나왔어요?”

“해군이었습니다. 대표님은요?”

“저는 육군이요. 제일 평범한. 심지어 부대도 서울에 있었어요. 바다 쪽이었으면 좋았을 텐데.”

“바다……. 좋아하십니까?”

“네, 뭐. 산보다는요. 그나저나 해군 멋있네요. 잘 어울려요. 완전 바다 사나이네. 수영 이런 것도 잘해요?”

“멋있…… 기는요. 별로 멋있지는 않습니다. 수영은 어……. 잘하는 편입니다. 다이빙도 좋아하고 활동적인 건 다 좋아합니다.”

이진강의 벌게진 얼굴이 식을 줄 모른다. 그러고 보니 이서는 벌써 초밥의 반 가까이 다 먹어 가는데 진강은 한 점도 먹지 않고 있었다.

“뭘 그렇게 부끄러워해요. 진강 씨 잘생긴 거 온 세상이 다 아는데.”

매일 듣는 이야기일 텐데 저렇게 부끄러워하니 외려 제가 더 계면쩍다. 아닌 게 아니라 진강은 정말 바다와 잘 어울렸다. 까맣게 그을린 피부와 탄탄한 몸은 서퍼를 연상시켰다.

“아하하……. 감사합니다.”

“피부는 원래 어두운 편이에요?”

“네? 네. 원래도 어두운 편이고. 조금 활동적인 운동을 많이 하는 편이라……. 많이 타서 그런 것 같습니다. 너무…… 어둡습니까?”

“아니요. 부러워서 물어본 거예요. 부러워서.”

“아……. 부러우실 것까지야. 저는 차라리 대표님처럼 환한 피부가……. 아니 제 피부가 싫다는 건 아니고요. 그……. 대본! 보고 계셨나 봅니다.”

어찌할 바를 몰라 하며 허둥대던 진강이 탁자 위의 대본을 가리킨다. 이서가 잘됐다며 젓가락을 내려놓고 손뼉을 친다.

“맞다. 맞다. 진강 씨 영화 들어갈 생각 없어요?”

“영화요?”

“장근호 감독님 영화인데 음. 여기! 이 캐릭터거든요. 진강 씨 이미지랑 잘 어울릴 것 같아서요. 사실 제작사 측에서 진강 씨를 욕심내는 것 같아요. 자세한 건 한 번 읽어 보고 이야기해 봐요.”

이서가 담당자가 두고 간 시놉시스와 대본 한 부씩을 겹쳐 내민다. 잠깐 고민하던 눈치였던 진강이 대본을 받아들며 입을 연다.

“네. 하겠습니다.”

“예? 한다고요? 시놉시스라도 읽어 보고 결정하는 게 맞지 않아요?”

“대표님이 고른 작품이지 않습니까. 괜찮겠죠.”

“그런 게 어디 있어요. 가져가서 천천히 읽어 봐요. 나중에 결정해도 되고. 그렇게 섣불리 결정할 필요는 없으니까. 제 눈만 어떻게 믿어요.”

이서가 가볍게 웃으며 초밥 하나를 입 안 가득 넣는다.

“……안 됩니까.”

“네?”

“믿으면 안 됩니까. 대표님인데.”

이진강이 눈을 바로 맞춰 오며 묻는다. 이진강은 그의 성격만큼 눈빛도 굳센 빛을 담고 있었는데, 때 타지 않은 강건함이 묻어나와 꼭 제가 말실수라도 한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갑자기 진지해진 분위기에 이서가 우물거리던 초밥을 꿀꺽 삼킨다.

“물론 믿어 주시면 고맙죠. 그냥……. 제 입으로 말하기는 그렇지만 아시다시피 제가 경력도 얼마 안 되잖아요. 저는 진강 씨가 최선의 선택을 했으면 해서 한 말이에요. 뭐. 작품이 진강 씨 스타일이 아닐 수도 있고. 여러 가능성이 있잖아요.”

“저는 좋습니다. 하고 싶어요. 하겠습니다.”

진강은 꿋꿋했다. 꼭 대단한 임무를 맡은 사람처럼 몸에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그 근원지 없는 믿음에 부채감이라도 생길 것 같다.

“알았어요. 전달할게요. 물리기 없기예요. 나는 이제 몰라요. 이건 진강 씨 거니까 틈틈이 보시고.”

이서가 하는 수 없다는 듯이 웃으며 이진강이 든 대본을 톡톡 건드린다. 이진강이 그 대본을 품에 꼭 안고 고개를 작게 끄덕인다. 190이 다 되는 체격 좋은 장신의 남자가 대본을 꼭 끌어안고 있으니 그 그림이 영 안 어울렸다.

“네 열심히 할 겁니다.”

“……다행이네요.”

“뭐가 말입니까?”

“진강 씨한테 계속 미안했거든요.”

“대표님이 미안할 일이 어디 있습니까.”

“제대로 해 준 게 없잖아요. 작품도 못 찾아 주고. 신경도 못 써 드리고. 그나마 영화가 마음에 든다 하셔서 마음이 한결 편하네요. 뭐. 아직 읽어 보시진 않으셨지만.”

“미안해하실 거 없습니다. 하나도 안 불편했습니다. 신경은……. 이제부터 써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진강이 자리에 앉은 자세 그대로 꾸벅 허리를 숙인다. 큰일을 부탁하기라도 하듯 공손한 자세다. 몸집과 어울리지 않는 행동에 이서가 이를 꽉 깨문다. 여기서 웃으면 그에게 너무 미안할 것 같았다.

“고마워요. 근데……. 그 대본은 계속 그렇게 안고 있을 건가요?”

“아, 아뇨.”

당황하는 진강 앞에서 이서가 참지 못하고 푸핫 웃음을 터트린다. 대본 안 뺏어 가겠다며 웃는 이서의 웃음소리가 대표실을 울린다.

* * *

“그래서. 할 거야, 이 작품?”

“한 번만 더 물어보면 길바닥에 던져 버릴 거니까 알아서 해요.”

“아니……. 대본만 받고 가타부타 말이 없으니까 그랬지…….”

“하.”

차계원이 읽던 대본을 내팽개치고 김건을 노려본다. 김건은 아까부터 어떻게 할 거냐며 여러 번을 물어댔다. 하지만 건의 입장에서도 조바심 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대본을 가져오라길래 대표님께 전달받자마자 부리나케 가져왔는데, 막상 차계원이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괜찮다. 재미있다. 아니면 그저 그렇다. 뭐라도 많은데 그냥 아무 말 없이 앉아 있기만 하니 궁금한 게 당연하다.

“미안하다. 입 닫을게. 운전만 할게. 편하게 마저 읽어. 음악이라도 좀 틀까?”

“닥치고 운전이나 해요.”

게다가 오늘 차계원은 심기가 매우 불편해 보였다. 차계원이야 워낙에 기분 좋은 날이 손에 꼽지만, 오늘은 특히 심하다.

“백이서는.”

“어, 어?”

속으로 차계원의 욕을 백만 번쯤 하던 건이 부름에 답한다. 백미러로 보이는 차계원의 표정이 심상치 않다. 그의 주변만 어디 영하 20도의 남극 같다. 이럴 때의 차계원 앞에서는 고분고분 묻는 말에만 대답해 줘야 한다는 게, 10년 동안의 노하우였다.

“오늘 회사 갔다 왔잖아요. 봤을 거 아냐 백이서.”

“어어. 봤지. 대표님. 잘 계시지.”

“뭐 하는데요?”

그건 네가 여쭤보면 되지 않을까, 라는 말이 목 끝까지 나왔으나, 그대로 말했다가는 정말 달리는 차에서 길바닥으로 떨어질 수도 있었다. 그리고 쥐도 새도 모르게 시체마저 없어지겠지.

“식사…… 하시던데?”

“혼자?”

“이진강 씨랑.”

“누구?”

“이진…… 강. 얼마 전에 회사 들어온 배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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