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좋아요! 편하게 지내요. 어려운 일도 아니고 진강 씨가 좋다면야. 어……. 그럼 뭐라 불러야 하지. 뭐가 좋을까요?”
“편하게 진강이라고 해 주면 될 것 같습니다. 휘준 씨처럼요.”
“그래요 그래.”
“감사합니다.”
그제서야 계속 경직되어 있던 진강이 살풋 웃는다.
“하긴, 계속 볼 사이인데 그게 지내기 편하겠습니다.”
휘준이 고개를 끄덕거리며 오이장아찌 한 움큼을 집어 이서의 앞 접시에 올려놓는다.
“너는……! 에휴. 아니다. 휘준이도 그럼 이제 말 놔. 너 죽을 때까지 나한테 존대할 거야?”
“저는 이게 편합니다.”
“아무튼, 고지식해서는. 쟤가 저래요. 옛날부터 저랬어요. 그래도 착한 애니까……. 진강 씨만 놔요. 그럼.”
이서가 웃으며 고개를 까딱일 때마다, 손질하지 않은 반곱슬 머리카락이 제자리에서 푸슬거린다. 이진강이 대답 없이 이서의 시선을 피한다.
“…….”
“진강 씨?”
“저도 천천히 놓겠습니다.”
“……장난하시나요?”
이서의 눈이 배신감으로 물든다. 눈에 힘껏 힘을 주는 모습이 무섭다기보다 그 반대에 가까웠다.
“누구한테 반말한 적이 없어서 말입니다. 부모님한테도 존댓말을 쓰거든요. 학교 다닐 때는 동기들한테도 존댓말 썼습니다.”
“저라고 뭐…….”
“대신 형이라고 부르겠습니다.”
“참나. 알았어요. 그래도 휘준이보다는 낫네. 저 녀석은 맨날 대표님이야. 가끔만 형이라 불러 주고.”
이서가 못 이기겠다는 듯 디저트를 떠먹는다. 후식으로 나온 셔벗은 얼음과 함께 딸기 씨가 같이 씹혔다.
“아. 이런…….”
제 몫의 셔벗을 이서 쪽으로 슥. 밀고 핸드폰을 확인한 휘준이 작게 탄식을 내뱉는다.
“왜 그래?”
“오늘 찾아올 물건이 있는데 깜빡했습니다. 오후에는 매니저들 면접이 잡혀 있는데.”
오늘은 회사 소속 매니저들을 몇 명 뽑기로 한 날이었다. 차계원이 데려온 인력들은 모두 회사 운영에 필요한 필수 인원이거나 차계원에게 필요한 인력들이었다. 이진강과 앞으로 들어오게 될 배우들을 위해서는 매니저 일을 맡아 줄 몇 명이 추가로 필요했다. 그리고 그 일은 휘준이 맡았다.
“그럼 내가 가지러 갈게. 오늘 할 일도 끝났어.”
“됐습니다. 제가 저녁때 가면 됩니다.”
“그럼 너는 언제 쉬어. 내가 다녀올게.”
“매장으로 주문한 거라 매장까지 가야 합니다. 개인적인 물건을 대표님께 부탁드리기도 싫고요.”
“무슨 소리야. 우리 사이에 네 일 내 일이 어디 있다고. 섭섭하게…….”
“그런 뜻 아닌 거 아시잖습니까. 제가 내일이라도 가면 되니까 그런 겁니다.”
“그니까 내가 갈게. 아니면 면접을 내가 보거나.”
“매니저 면접까지 대표님이 보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럼 난 뭐 해?”
이서가 지지 않고 제 의사를 피력한다. 휘준은 은근히 고집이 세서 이래야만 말을 들었다. 특히 휘준은 일적인 면에서 그랬는데, 매번 그건 대표가 할 일이 아니라며 제가 잡일들을 도맡으려 들었다.
“……그럼 부탁드립니다.”
휘준이 더는 안 되겠다 싶었는지 위치를 보내 준다. 이곳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곳이었다.
“저도 같이 가도 됩니까?”
“진강 씨……. 아니 진강이도? 나 혼자 가도 되는데?”
“어차피 할 일도 없고 집에 들어가기도 싫어서요.”
“나야 안 심심하고 좋지. 알았어. 지금 출발할까, 그럼?”
“네. 먼저 차 빼 놓고 있겠습니다.”
그렇게 식사를 끝마친 세 사람이 몸을 일으켰다.
이서가 뒷자리에 쇼핑백을 놓는다. 휘준이 찾아와야 할 물건이라는 건 개인적인 일도 아니었다. 회사에 구비해 놓을 손님용 찻잔과 중요 손님을 대비해 주문한 선물용 와인 몇 병이었다. 회사는 건물이야 크고 휘황찬란했으나, 그에 반해 필요한 것들이 적었다. 손님용 물품들 같은 게 대표적인 예다.
물건을 찾아오고 저녁까지 먹으니 날이 벌써 어둑어둑했다.
“이제 집으로 들어가십니까?”
“네, 네. 아니. 응.”
“……제가 너무 부담 드렸나 봅니다.”
“응? 아니야. 익숙하지 않아서 그래. 근데 넌 정말 안 불편해? 내가 나이가 더 많기는 하지만…….”
이서가 벨트를 매며 대답한다.
“처음에 이 회사로 들어오자고 결심했을 때, 형 보고 들어오자고 결심했습니다.”
“나를? 왜?”
이서가 손가락으로 저를 가리킨다. 저를 보고 안 들어오면 안 들어왔지, 들어오려는 결심을 하는 사람은 드물었다. 성아나 태미만 해도 부리나케 도망간 곳이 제 회사다.
“네. 촬영장에서 처음 뵀을 때 대단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재는 것 없고, 모든 사람 똑같이 대하고. 그런 사람 이 바닥에서 드물지 않습니까.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커피까지 직접 돌리시는 대표도 드물고요.”
“그거야. 뭐. 내가 딱히 잘난 것도 없으니까…….”
이진강은 꽤나 진지했다. 출발하지도 않은 차 안에서 핸들에 손을 올린 채 정면만 보고 말을 이었다.
“……그날 칭찬해 주신 것도 크게 위안됐었습니다. 매일 다들 똑같이 말하는 칭찬들이 부담스럽고 불편했는데 그건 안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괜찮습니다. 편하게 대해 주시면 주실수록 좋습니다.”
이진강은 부끄럼을 잘 타는 것 같았는데, 이런 낯간지러운 소리는 또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잘만 늘어놓았다. 형이라고 부르는 것도 어색함이 없었다. 진강은 덩치만 커다란 어린 짐승 같았다. 아무래도 우연치 않게 배우가 된 만큼 마음 붙일 곳이 필요했던 것 같아 짠한 마음도 약간 들었다.
“나도 그래. 난 사실 사람들하고 쉽게 못 편해지는데 너는 안 그래. 되게 편해. 꼭 몇 년은 알고 지낸 사람 같아.”
“……감사합니다. 앞으로 일하는 게 더 즐겁겠네요. 아, 형은 주소가 어떻게 되십니까? 데려다 드리겠습니다.”
“번거롭게 신경 쓰지 마, 나 그냥 회사 앞에 내려 줘. 어차피 저것도 회사에 가져다 놔야 되니까.”
“내일 출근하실 때 챙기시면 되죠.”
“그건 또 그렇네.”
듣고 보니 맞는 말이라 이서가 고개를 주억거린다.
“아니면 가까운 역에 내려 줘. 혼자 갈게.”
“밤도 늦었는데요.”
“지금 8시인데?”
“해가 빨리……. 졌지 않습니까.”
진강이 서둘러 차에 시동을 켜고 액셀을 밟는다.
“어…….”
“저번에 자택이 회사랑 가깝다고 들은 것 같은데 맞습니까?”
“으응……. 그렇기는 한데.”
“별로 돌아가는 것도 아니니 가요. 역에 내려 드려도 짐 가지고 들어가기 힘들잖습니까.”
진강의 목소리는 매우 묵직하면서 부드러운 느낌을 줬는데 그 때문인지 그의 말은 별말이 아니어도 설득력 있게 느껴졌다.
진강이 주소를 입력하라는 듯 제 내비게이션을 가리킨다.
“알았어. 우선 여기서 왼쪽으로 꺾으면 돼.”
차가 좌회전하는 동안 이서가 내비게이션에 주소지를 입력한다. 안내를 시작한다는 낭랑한 음색을 들으며 편하게 시트에 몸을 기댔다.
“주신 대본은 다 읽어 봤습니다.”
“벌써? 대단하네.”
대본을 전달해 준 게 불과 며칠 되지도 않았는데. 하긴 이진강은 워낙 노력파로 유명했다. 애초에 노력이 아니었다면 순간의 기회를 그렇게 틀어잡기 힘들었을 거다.
“그냥 읽으니 금방 읽혀서요. 형 말씀대로 좋은 작품 같았습니다.”
“그치. 네가 보기에도 괜찮다니 다행이다.”
“작품성도 좋고……. 제가 하기에는 오히려 과분할 정도던데요.”
“에이. 과분하다니 그 배역 너만큼 소화할 수 있는 사람 없을 거야.”
이서가 웃으며 너스레를 떤다. 자신은 이번 영화가 잘될 것 같다는 확신이 들었다. 차계원이야 성질은 더러워도 연기력이나 캐릭터 소화력은 대한민국에서 손에 꼽을 정도였다. 탑이 괜히 탑이 아니다. 이진강 또한 믿을 만하다. 영화 캐릭터와 이미지가 딱 부합하고, 거기에 노력파니 더 걱정할 게 없었다.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요.”
“안 봐도 알 수 있어. 나 네 작품 몇 개 봤었다니까.”
“…….”
“현지 촬영 괜찮지?”
“형도 같이 가십니까?”
“어디를? 촬영을?”
“예.”
“현지까지 배우 촬영을 따라다니는 대표도 있나……?”
“없…… 죠. 그냥 여쭤봤습니다.”
“좋을 거야. 스페인에서 느와르라니 멋있잖아. 느와르에 미스터리라니 흥미롭고.”
“아. 그거 말인데. 촬영 때 무섭지는 않겠죠.”
“어? 공포도 아닌데 뭐가 무섭겠어.”
“배경이 어두운 게 많아서.”
“혹시 겁 많아?”
“……아닙니다.”
“맞는 거 같은데?”
“아닙니다.”
이진강이 목에 힘을 주며 말한다. 말과 말 사이에 침을 한 번 꿀꺽 삼키는 걸 보니 제 추측이 맞는 것 같다. 이서의 얼굴에 장난기가 돈다.
“왁!”
“왜 그러십니까!”
주차장에 도착하고 차가 멈춘 걸 확인한 이서가 진강을 놀라게 한다. 진강답지 않게 우는소리가 나와 이서의 재미가 배가 됐다. 이진강은 매번 비슷한 톤의 낮고 굵은 목소리였는데 이건 또 처음 들어본다.
“미안. 미안. 놀려 주고 싶어서 그랬어.”
“형…….”
“진짜 미안. 나 들어간다! 조심히 가.”
“……조심히 들어가십시오.”
이서가 손을 흔들며 아파트 입구로 들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