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
어제 일찍 귀가한 덕인지, 귀가하자마자 잠든 이서는 실로 오래간만에 일찍 일어났다. 일어나자마자 부지런히 씻고 나온 이서가 차를 우린다. 이서는 신맛이 나는 음식을 즐겨 찾지는 않았는데 레몬그라스 티의 상큼한 향은 좋았다.
“오늘은 여유롭겠네.”
아침 일찍 일어나니 하루가 길 것 같은 느낌이다. 향긋한 차향이 좁은 집 안을 금방 채운다.
“차계원 씨한테 따로 연락 안 해 봐도 되겠지…….”
차계원네 집을 나온 후 며칠이 지났다. 그와는 연락할 일도 마주칠 일도 딱히 없었다. 덕분에 일상은 다시 순조로워졌다. 김건은 차계원이 영화에 출연한다는 확답을 전해 왔다. ‘잘 결정하셨어요.’ 내지는 그 비슷한 연락을 취해야 할 것 같은데 막상 손이 움직이지 않았다.
“건이 씨가 있으니까.”
차계원에게 문자라도 넣을까 하던 이서가 곧 마음을 접는다. 일 이야기야 건이 있으니 문제 되지 않았다. 독려 차원의 연락이나 감사 인사도 건을 통하면 될 일이다.
“오늘은 일찍 나가 볼까.”
어제 찾아온 물건도 가지고 갈 겸, 일찍 일어났으니 부지런히 일도 할 겸 일찍 출근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테다. 이서가 시간을 확인하기 위해 충전기에서 핸드폰을 찾아 들었다.
“어……? 뭐야…….”
핸드폰을 든 이서의 손이 잠시 굳는다. 수십 통의 부재중 전화가 와있었다. 죄다 서휘준 내지는 이진강이었다. 이서가 급하게 통화 목록을 확인한다. 부재중 전화는 어젯밤부터 이어지고 있었다. 그때 핸드폰에 또다시 전화가 걸려온다. 휘준이었다.
“여, 여보세요?”
[대표님?]
“어. 휘준아 무슨 일이야? 웬 전화를 이렇게 많이…….”
[후. 어제부터 전화했었습니다.]
휘준의 목소리는 어딘지 지쳐 있었고 한숨이 묻어 나왔다. 좀처럼 지친 티를 잘 내지 않는 녀석이라 불길함이 감돌았다.
“응응. 안 그래도 지금 봤어. 미안해. 무음으로 돼 있었나 봐. 그나저나 무슨 일인데? 우리 뭐 큰일이라도 났어? 그런 거야?”
이서가 입술을 잘근잘근 깨문다. 휘준은 예사로운 일로 이렇게 전화할 사람이 아니었다.
[대표님 혹시 기사 보셨습니까?]
“기사? 무슨 기사? 나 일어나서 핸드폰 처음 보는 거야. 왜? 차계원 씨 또 사고 쳤대? 나 지금 심장 떨어질 것 같아. 빨리 말해 줄래?”
[아니요. 그런 건 아니니까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그렇게 큰일은 아닙니다.]
“무슨 소리야. 큰일이 아닌데 네가 이렇게 전화를 해?”
[스캔들……. 기사가 떴습니다.]
이서의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진다. 차계원이 스케줄을 펑크 냈던 이후로 기사라면 아주 지긋지긋했다. 검색어를 오르내리던 이름들과 자극적인 타이틀 문구, 기사들 밑으로 달리는 댓글들만 생각하면 지금도 눈앞이 아찔하다.
“차계원 씨가? 누구랑?”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지도 못하고 묻는다. 이럴 줄 알았다. 차계원이 조용한 게 이상하다 했다. 일을 쳐도 단단히 칠 징조였던 거다.
[차계원 씨가 아니라……. 이진강 씨요.]
“뭐……?”
순간 멍해진 이서의 머릿속에 순박한 이진강의 표정이 스쳐 지나간다. 이진강은 만나는 사람이 있다면 회사에 먼저 알렸을 성격이다.
“진강이가? 그런 기색은 없었는데? 일단 사실 여부는 확인해 봤어? 아. 상대는? 그쪽도 연예인이야? 스캔들 때린 언론사는 어딘데?”
이서가 침착하게 하나하나 묻는다. 보통 스캔들의 3분의 1은 억측이나 허위 기사고, 또 3분의 1은 결정적인 증거를 잡혀 소속사와 합의한 기사들이다. 나머지 3분의 1은 공격적인 신문사 측에서 합의도 확인도 없이 뜬소문이나 데이트 장면을 빌미로 내보내는 기사였다. 그리고 회사 측에는 아무런 연락 온 게 없었다.
[스캔들 기사에 사진도 같이 떴는데 말입니다.]
“그럼 확실하네. 거기 언론사 대체 어디야? 어디길래 연락 하나 없이 그렇게 막 내보내냐고.”
비열하기 그지없다. 보통 업무를 끝낸 밤에 기사를 터트린 것부터가 악질이었다.
[근데 사진이 대표님 아파트 주차장입니다.]
“어?!”
“그리고 사진 속 사람이 대표님…… 같습니다. 물론 타이틀에는 일반인 여자라고 떴지만…….”
“이게 무슨 소리야!”
이서가 비명 같은 새된 소리를 내뱉는다. 이건 또 무슨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란 말인가. 스캔들도 당황스러운데 휘준의 설명 전부가 어이없었다.
[우선 지금 링크 보내 드릴 테니까 한번 확인해 보십시오.]
“알았어. 바로 보내. 끊는다.”
당황으로 덜덜 떨리는 손을 부여잡고 휘준이 보낸 링크를 누른다. 기사를 낸 언론사는 언론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유사 언론 수준의 언론사였다. 연예인이나 유명인들의 사생활을 주로 캐고 다니며 자극적인 타이틀로 대중들의 관심을 끌기로 유명한 곳이다. 그들에게 제일 맛있는 먹잇감은 다름 아닌 연애 스캔들이었다.
“이…… 이……!”
기사를 확인한 이서가 황당함에 말을 금치 못한다. 세상에 있는 온갖 욕들이 잔뜩 떠오른다.
기사의 사진에는 어제 자신을 데려다주던 진강의 차가 떡하니 올라와 있었다. 아주 교묘하게 진강의 얼굴은 다 나오고, 자신은 차 시트와 그림자에 가려져서 여자인지 남자인지 형태조차 분간이 안 간다.
“양아치들…….”
그들이 건수를 잡기 위해 어제 따라다녔다면, 진강의 옆에 앉은 사람이 여자가 아니라 남자라는 것 정도는 알았을 거다. 이건 명백히 관심을 끌기 위한 수작이었다. 해당 언론사는 안 그래도 수많은 허위 기사로 유명했다. 하지만 문제는 허위인 것을 알면서도 대중들은 그것을 이슈로 삼고, 해당 기사의 조회 수를 높여 준다는 것이다.
이서가 마음을 가다듬고 다시 휘준에게 전화를 건다. 욕설이 나오려는 걸 겨우 참아냈다.
[네, 대표님. 보셨습니까?]
“그래. 아주 잘 봤어. 진짜 미친놈들 아니야? 이거 일단 정정 기사 내고. 이 신문사 연락해 봤어?”
[아침에 연락해 봤죠. 죄송하다고. 몰랐다고. 그 측에서는 당연히 그렇게 말하죠. 상의도 없이 이러면 되냐고 따지니까, 오늘 안으로 정정 기사 올리겠다는데……. 최대한 시간 끌려고 할 게 뻔합니다.]
“아니 말이 안 되잖아. 그 사람들은 내가 안 보였대? 카메라 뷰파인더는 맞추면서 나는 안 보였냐고.”
[대표님도 아시지 않습니까. 이 사람들 뻔히 알면서 이런 겁니다. 어차피 조회 수만 올리면 되니까요. 아마 이진강 씨 화보도 반응 좋았고, 요즘 상승세라 그런 것 같습니다. 소속사 저희 측으로 옮긴 것도 인기 검색어에 계속 노출돼 있었고 말입니다.]
“우리 진짜 왜 이러냐. 어디 용한 무당이라도 불러야 하는 거 아냐? 오늘 영화 홍보 기사도 내기로 했잖아. 어떻게 하필 오늘이래?”
오늘은 차계원과 이진강. 그리고 장근호 감독이 함께 영화 촬영에 들어간다는 기사들을 띄울 예정이었다. 기자들과도 이미 다 기사 내용을 말 맞춰 놨고 기사에 올라갈 사진들도 정성스레 골랐다.
[안 그래도 그거 때문에 연락드렸던 겁니다. 스캔들이야 정정 기사 내면 되고 그냥 해프닝이지만, 지금 영화 관련 기사 내 봤자 묻힐 것 같아서요. 아니면 이진강 씨 스캔들 기사로 초점이 맞춰지거나.]
“하아……. 나 진짜 울고 싶다 휘준아. 정정 기사는 언제쯤 뜰 거 같아?”
[기자분들 몇 연락했는데 한 시간 내로 뜰 것 같아요. 스캔들 낸 언론사는……. 뭐 눈치 봐 가면서 최대한 나중에 내겠죠.]
“그럼 영화 관련 기사는 내일 아침에 내 달라고 해 보자.”
[네. 알겠습니다.]
“응. 부탁할게. 네가 고생이 많다, 휘준아.”
[됐습니다. 제 일인데요. 기사는 너무 신경 쓰지 마십시오. 혹시나 해서 말씀드립니다. 그냥 가벼운 해프닝이니까요. 정정 기사 나면 다들 웃고 넘길 겁니다.]
“응……. 고맙다. 나 이제 슬슬 나갈 거야. 조금 이따 봐.”
[네, 조심히 오십시오.]
전화를 끊은 이서가 침대에 발랑 몸을 내던진다.
“진짜……. 어디 섬이라도 들어가서 쉬고 싶다.”
평생 더도 덜도 말고 그저 평온한 삶만을 꿈꾸며 사는데, 그게 이렇게 힘든 일일 줄 몰랐다. 침대에 대자로 누운 이서는 그로부터 30여 분의 시간이 지난 후에야 몸을 일으킬 수 있었다.
* * *
정정 기사는 예상보다 빨리 떴다. 이진강의 옆에 있던 사람이 여성이 아닌 회사 대표라는 걸 안 대중들은 유머 거리로 기사를 소비했다. 다행히 모두 웃으며 지나가는 분위기라 내일 영화 관련 보도에도 영향을 주지 않을 정도였다.
“바쁘다. 바빠.”
회사에 도착한 이서가 대표실로 향하며 문자를 친다. 휘준과 통화하고, 정정 기사를 확인하느라 급해서 막상 이진강에게는 연락을 주지 못했다.
[진강아! 정정 기사 잘 났으니까 걱정 마. 고생했다. 나도 이제 막 회사 도착했어. 이따가 점심때 보자.]
이서가 막 전송 버튼을 누르고 대표실로 들어선다.
“어. 차계원…… 씨?”
“…….”
문을 열고 들어선 대표실에는 차계원이 소파에 긴 다리를 꼬고 앉은 채 차를 마시고 있었다. 그 모습이 하도 고고해, 꼭 자신이 남의 공간에 쳐들어간 불청객 같았다.
“연락도……. 안 주시고 어쩐 일로.”
이서가 부자연스럽게 차계원이 앉은 앞 소파에 앉는다. 차계원의 시선은 주머니에 넣고 있는 이서의 핸드폰에 가 있었다.
“내 건물 내가 오는데 허락받고 와야 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