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
새벽녘쯤, 소파에서 잠깐 눈을 붙이려던 이서는 저도 모르게 깊이 잠들어 버렸다. 눈을 뜨니 출근한 휘준이 저를 깨우고 있었다.
“으음…….”
이서가 소파 위에서 몸을 웅크리며 뒤척인다. 아침이 되니까 어제보다 추운 것도 같았다.
“나 10분만 더 잘게…….”
“그러게 저도 있겠다 하지 않았습니까. 기어코 보내시더니.”
“나 계속 일해써……. 진짜야. 잠깐 잠든 거야 잠깐…….”
잠에 취해 새어 나오는 발음에 설핏 웃은 휘준이 이서를 일으켜 세운다.
“들어가서 주무십시오. 집도 가까우신 분이.”
“아우……. 좀. 넌 또 왜 이렇게 일찍 출근한 거야. 나 30분만 이따 깨워 주면 안 돼……?”
“왜 더 시간이 늘어납니까. 안 됩니다. 일어나세요.”
휘준이 이서의 양팔을 붙잡은 채 짤짤 흔든다.
“어헝…….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놈아…….”
“여기서 주무시면 안 좋습니다. 대리 불렀으니까 정신 차리십시오. 어서요.”
“내가 운전해도 되는데…….”
“그러다 사고 납니다. 물 한잔 드시고요.”
휘준이 물을 받쳐 준다. 꼴딱꼴딱 잔의 물을 반 정도 마신 이서가 기지개를 켠다. 웅크리고 잤더니 몸이 찌뿌둥했다.
“기사들은?”
“하나둘 뜨고 있습니다. 반응이 아주 좋아요.”
휘준이 핸드폰으로 기사 몇 개를 보여 준다. 화면에 뜬 기사들은 벌써 그 수가 엄청났다. 댓글과 반응 또한 폭발적이었다.
“차계원 씨랑 엮이니까 매번 실시간 검색어네.”
“밥만 먹어도 검색어 순위에 뜰 사람이니까요. 이제 들어가서 쉬세요.”
“그래그래. 고생해라. 일 생기면 연락하고.”
“네. 가서 푹 주무십시오.”
“오냐.”
기사까지 확인하고 나니 큰 고비는 넘긴 기분이었다. 털레털레 걷는 걸음이 한결 편하다. 휘준이 부른 대리 기사가 벌써 주차장에 와 있었다.
* * *
약간 잔소리가 많기는 해도 휘준 덕에 편하게 집에 도착한 이서가 아파트 계단을 오른다.
“언제쯤 이사 갈 수 있으려나.”
지은 지 30년이 다 돼 가는 아파트는 군데군데 벗겨진 페인트칠도 몇 년째 방치 중이었다. 내 집은 고사하고, 지금처럼 전세여도 좋으니 좀 더 멀쩡한 곳에 둥지를 틀고 싶은데 마음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어릴 때 바랐던 30대의 모습은 조금 더 근사하고 멋있었던 것 같은데 그마저도 기억이 잘 안 난다.
“……?”
이서가 계단을 다 올라 복도의 끝자락에 섰을 때였다. 이서의 집 현관문이 열려 있었다. 다른 집인가 싶어 이리 보고 저리 봐도 자신의 집이 맞다.
“누, 누구세요? 뭐 하시는 겁니까?!”
놀란 이서가 집 안으로 뛰쳐 들어간다. 양복을 입은 남자 둘이 외려 뻔뻔하게 이서를 돌아다본다.
“집주인입니까?”
남자는 사무적이지만 껄렁한 태도였다. 기가 막혀 사고가 움직이지 않는다. 요 며칠 이서를 괴롭히던 불길한 예감이 발끝부터 차근차근 기어 올라왔다.
“네. 제가 집주인인데 누구시냐니까요? 남의 집에 허락도 없이……. 문은 어떻게 열었고, 아니 됐어요. 지금 신고할 테니까…….”
이서가 핸드폰을 들어 112를 누른다. 남자들의 행색으로 보아 도둑 같지는 않았다. 번호를 누르는 손이 잘게 떨린다.
탁.
남자가 번호를 누르는 이서의 손을 쳐냄과 동시에 핸드폰이 현관을 굴렀다.
“당신 미쳤어?!”
이서의 고함에 남자가 같잖다는 듯 바닥에 떨어진 핸드폰을 주워 옆의 동료에게 내민다. 동료로 보이는 다른 남자는 구둣발 채 집 안을 헤집고 있었다.
“이것도 목록에 올려.”
“네.”
“뭐라는 거야! 뭘 올려요! 당신들 이거 절도야. 무단 침입이라니까!”
“백이서 씨 맞죠?”
“맞아요. 제가 백이서 맞는데. 당신들 대부업체 사람이죠? 이번 달 이자 드렸잖아요! 아무리 원금을 못 갚았어도 이건 아니에요. 일단 제 핸드폰부터 내놔요.”
“예. 백이서 씨. 본인 맞으시고.”
“네. 맞으니까 핸드폰 주고 나가시라고요!”
이서의 얼굴 앞에서 대놓고 한숨을 쉰 남자가 한심한 표정으로 입을 연다.
“채권자분께서 채권 압류 진행을 신청하셨어요.”
남자가 갈색 파일의 서류를 힘 있게 넘기며 말한다. 서류에 시선을 고정한 남자의 목소리에는 낮잡아 보는 듯한 말투가 묻어 나왔다. 이서가 멍하게 남자의 손에 들려 있는 서류만 바라본다. 제 핸드폰을 든 다른 이는 무언가를 열심히 적고 있었다.
“예? 압류…… 요?”
“추심 명령 떨어졌다고요. 부동산 강제 집행도 같이 들어갑니다.”
순간적으로 발밑이 푹 꺼지는 착각이 든다. 상상도 못 한 일이었다. 머리가 띵했다. 와중에도 남자는 바쁘게 서류에 무언가를 차곡차곡 적고 있었고, 그의 동료는 이서의 집을 뒤지고 있었다. 이서가 굳은 입술을 겨우 움직여 연다.
“그게……. 이게 지금 무슨 뜻…….”
“유체동산 압류도 같이 진행될 거고요. 여기 보이시죠.”
남자가 제자리에서 몸을 빙 돌며 손가락으로 이곳저곳을 가리킨다. 남자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마다 압류 딱지가 붙어 있었다. 눈앞의 사람들에게 정신이 팔려 미처 보지 못한 것이었다.
“어제까지도 별말 없었잖아요. 갑자기 이러시는 법이…….”
“아. 그쪽 사정은 모르겠고. 저희는 시키는 대로 하는 겁니다.”
남자는 앞에 서 있는 이서의 상태나 상황 따위는 상관없다는 듯 값이 될 만한 물건들을 찾아 딱지를 붙였다.
“이게……. 이게…….”
“저희 일은 여기까지고요. 딱지 붙은 물건들은 처분하시면 안 됩니다. 리스트 올려서 다 알아요.”
자신들의 볼일은 끝났다는 듯 나가려는 남자의 팔을 이서가 다급하게 붙잡는다.
“잠깐, 잠깐만요. 그럼……. 이 집은……. 이 집은 어떻게 되는 건가요. 저는, 저는 어떻게 해야 하는데요.”
“그건 저희는 모르겠고요. 일 끝났으니 가 보겠습니다. 언제 처리될지는 채권자분이 알아서 하실 겁니다.”
남자는 모르겠다는 말에 힘을 주며 설렁설렁 필요한 인사만 하고 나가려 했다.
“잠시만요! 5분만요! 설명은 해 주셔야죠. 이대로 그냥…… 이러는 법이…….”
“이봐요. 설명 다 드렸잖아요. 예? 저희도 바쁜 사람입니다.”
“갚을 수 있어요. 이제 좀 있으면 회사 사정도 좋아질 거고. 아니. 애초에 제가 진 빚도 아니었어요. 이건 아니에요. 아니잖아요.”
마치 진상을 대하듯 성가셔하는 태도가 느껴졌으나 그런 걸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매번 조금만 조금만 하며 버텨 왔다. 조금만 있으면 김승주를 찾을 수 있을 거다. 조금만 있으면 회사 상황이 좋아질 거다. 조금만.
그 조금만은 허황한 희망이었고 부질없었다.
“아. 그러니까. 저희는 볼일 끝났고요! 나머지 일은 모르겠다고요.”
남자가 이서를 밀치듯이 떼어내고 사라진다. 남자 뒤로 바짝 붙어 나가는 그의 동료가 흘끗 시선을 던진다. 그 눈초리가 불쌍하지만 자신과는 상관없는 사람을 볼 때의 것이라, 이서는 더 이상 남자를 잡지 않았다.
신발도 벗지 못한 채 이서가 현관에 털썩 주저앉는다. 남자가 닫지 않고 나간 현관문에서 겨울바람이 앞다투어 들어온다. 이 시린 바람은 왜 항상 제 집에만 들어오는 걸까. 열린 현관문으로 보이는 복도의 벽이 위태롭게 허물어질 것만 같다.
“이런 게…… 어디 있냐고…….”
비참함, 처량함 이런 감정보다 먼저 이서를 찾아온 건 절망감이었다. 화도 나지 않는다. 이제 이 집에 제 것은 없게 될지도 모른다. 이 작은 전셋집마저 제 공간이 아니게 될 수도 있다. 아니 그렇게 된다. 아무것도 손에 쥐지 않은 채 맨바닥에 나앉게 된 거다. 이제 정말 아무것도 없게 된 거다.
“하.”
열심히 살아도 안 된다는 건 진작에 깨달았다. 평온한 삶을 위해서는 노력과 운, 노련함, 그 모든 게 다 있어야 한다는 걸.
“하하.”
단전에서부터 헛웃음이 터져 나온다. 저도 이런 자신이 미친 건가 싶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뭘 어떻게 한다 한들 달라지는 게 있을까. 자신이 4년간 뛰어다닌 결과로 남은 건 어디 아침 드라마에서나 볼 법한 딱지들이다. 앞으로라고 다를까. 뭘 해도 똑같다면 차라리 이대로 사라지는 건 어떨까. 김승주는 잘 살까. 자신이 맨바닥에 나앉게 돼도 그는 계속 잘 살아가는 걸까.
헛웃음마저 끊겨 나오지 않을 무렵. 뚜벅뚜벅 걸어오는 구둣발 소리가 울렸다. 느릿하고 규칙적인 구둣발 소리가 이서의 앞에서 멈춘다. 제 앞에 선 곧고 긴 다리를 허망한 시선으로 올려다본다. 지금 제 집에 찾아오는 사람이 누구여도 놀라지 않을 것 같았다. 혹여 그게 사태의 원인인 김승주일지라도.
“왜 이러고 있어요? 비 맞은 개새끼처럼.”
“아…….”
천천히 고개를 올려다보자 눈앞에 있는 건 차계원이었다. 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그도 마찬가지였다. 자리에 서서 이서의 집 안을 둘러볼 뿐이다. 주저앉아 일어날 생각이 없는 이서를 꽤 오랫동안 내려다본다. 차계원이 이서 앞에 쭈그리고 앉아 눈을 맞춘다. 아직도 올려다보고 있는 이서의 머리를 쓰다듬는 손이 따듯하다. 추운 날씨에도 차계원의 체온은 온기가 가득하다. 그의 손은 항상 차가웠는데, 지금은 아니었다.
“왜요. 누가 혼냈어요?”
이서가 대답 없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아니면. 망태 할아버지가 잡아간대요?”
또 절레절레 흔들리는 고개에 힘이 빠져 있다. 쪼그려 앉아 있던 차계원이 이서처럼 털푸덕 주저앉는다. 들이치던 바람이 차계원에게 막혀 들어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