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
“…….”
“으윽…… 흐윽…….”
백이서가 울먹거리기 시작한다. 곧이어 그 울먹거림은 히끅거림으로 변한다.
계원이 양손으로 백이서의 두 뺨을 감싼다. 양손에 들어차 하얗게 질려 바들대는 꼴이 이렇게 이쁠 수가 없다. 웬만하면 우는 걸 본 적이 없는데 지금의 백이서는 하염없이 눈물만 뚝뚝 흘려댄다. 이런 얼굴은 생경하다. 애써 몰아붙일 때도 백이서는 담담한 얼굴로 저를 보거나 눈물을 그렁그렁 매다는 게 다였다. 차가운 얼굴을 계속해서 어루만져 주자 얼마 가지 않아 혈색이 돌았다.
“쯧.”
현관에 주저앉아 있던 계원이 백이서를 들어 제 위에 올린다. 제 품에 넣어 안고 토닥거리자 백이서는 엉엉 울기 시작했다. 꼭 뒤늦게 억울함이 몰려온 사람처럼.
“으헝……. 흐윽……. 으흑…….”
온몸에 힘을 뺀 백이서는 안으면 안는 대로 안기고 토닥이면 토닥이는 대로 기대 왔다. 제 어깨에 고개를 파묻고 조막만 한 얼굴을 비벼 온다. 계원이 그의 머리와 등을 한참 동안 쓰다듬어 준다. 절망에 빠진 미약한 움직임은 계원의 가슴을 뻐근할 정도로 충만하게 만들었다.
“숨넘어가겠네.”
계원이 백이서의 눈 밑에 입을 맞춘다. 발개진 눈가는 내일이 되면 부어 있을 거다. 그건 또 그거대로 마음에 들겠지.
“집이……. 집이……. 흐윽……. 넘어간대요…… 전셋값도.”
“…….”
백이서가 절망을 토해낼수록 충만감이 자리를 넓혔다. 백이서는 히끅거리면서 말을 이어 갔다. 울음에 묻힌 문장은 온전하지 못했다. 어깨에 닿은 귀나 목 부근도 뜨거워지기 시작한다. 드문 일이다.
“…….”
“내가 한 게 아니에요. 흐읍……. 내 빚이, 흐엉……. 아니에요.”
“그랬어요.”
어린아이를 달래듯 토닥이며 정수리에 턱을 가져다 대자 백이서가 가슴께에 기대 온다. 제게 맡겨 오는 온몸의 무게가 더할 나위 없이 마음에 든다. 이럴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한 톨도 다른 데로 새 나가게 하고 싶지 않을 정도로.
“나는……. 난, 난. 허윽. 그래도……. 갚았어요. 이자를 갚다 보면 해결될 거라고. 해결은 안 돼도……. 이런 게 어디 있어. 흐윽……. 나한테만. 왜 나한테만 이래. 나만…….”
“그래서 서러웠어요?”
가슴께에 파묻힌 고개가 끄덕끄덕 움직인다. 그 후로도 이서는 한참을 울었고, 자신이 말하면서도 뜻 모를 말들을 늘어놓았다. 두서없고 주어 없는 말들을 차계원은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가끔 제 상체를 쓰다듬거나 고개를 들게 해 입을 맞추는 게 다였다. 왜냐고도, 이제 그만 울라고도 하지 않았다. 어쭙잖은 위로도 그는 건네지 않았다.
“으흑……. 다 싫어. 관두고 싶어…….”
누군가의 앞에서 이렇게 울어 본 건 처음이다. 현관은 더러웠고 집 안은 너저분했다.
“흐음……. 어떡할까.”
“…….”
“춥지는 않아요?”
백이서가 또 품 안에서 끄덕거린다. 두 번이나 끄덕거려 놓고 제 코트 안을 꼼지락거리며 파고든다.
“식사는요.”
“…….”
“안 했어요?”
“…….”
“밥 먹으러 갈래요? 아침.”
다정한 물음에 이서가 살짝 몸을 뗀다. 눈물로 얼룩진 얼굴도 손으로 박박 닦아낸다. 정신이 조금씩 추슬러질수록 창피함이 물밀듯 쏟아져 온다. 왜 차계원은 어울리지도 않게 저를 달래 주고 있고 자신은 거기에 기대고 있는지. 이서가 몸을 물려 차계원의 품에서 일어나려 한다.
“왜. 더 있지.”
계원이 이서를 더 끌어 몸에 밀착시킨다.
“괜찮…… 아요.”
“…….”
“죄송해요…….”
“뭐가요.”
“그냥…… 지금이요.”
“흐음.”
차계원이 이서의 얼굴을 매만진다. 그 손길이 아주 달가운 건 아니었으나, 또 피하기에는 따듯했다.
“저 계원 씨. 아침부터 저희 집에는 무슨 일로…… 오신 거예요?”
“이제 묻는 거예요?”
“죄송해요…….”
이서가 고개를 푹 숙인다.
“괜찮아요. 별거 아니니까. 이것 좀 전해 주려고요.”
“이게……. 뭔데요?”
“영화사에서 보냈던 계약서요.”
차계원이 서류 봉투를 내민다. 계약이 확정되고 이진강과 차계원 모두에게 한 부씩 전달했던 계약서다.
“이건 왜…….”
“안 하려고요. 이 영화.”
“예?”
물어 오는 표정이 얼치기 소년이라도 된 것처럼 얼떨떨하다. 아직 물기가 가득한 눈과 얼떨떨한 표정의 합이 잘 맞는다. 저런 덜떨어진 얼굴이 어울리는 건 백이서밖에 없다.
“영화.”
“……네.”
“안 한다고.”
긴 손가락으로 계약서를 가리키며 설명하는 모습이 누구보다 차분하다. 이서의 얼굴 앞에서 계약서가 팔랑거리며 나부낀다. 얼마 전 차계원이 제 손으로 직접 서명까지 해 보냈던 계약서 중 한 부다. 다른 한 부는 회사에, 또 다른 한 부는 제작사 측에 있었다.
“왜…… 요?”
“음……. 하고 싶지 않아서?”
백이서가 이해가 전혀 가지 않는 얼굴로 차계원의 입 모양만 바라본다.
“하지만……. 계약서까지 썼잖아요. 사인도…… 하셨는데……?”
“응. 알죠.”
“그럼……. 어떻게…….”
“엎으려고요.”
“위약금도…… 생길 텐데.”
“물어 주면 되죠. 얼마 되지도 않는 거.”
고개를 살짝 꺾은 차계원은 날씨라도 말하는 것처럼 가볍게 말한다.
“왜요? 왜…….”
“말했잖아요. 하기 싫다고.”
“마음에 든다고 하셨잖아요. 대본도 좋다고……. 해 보고 싶으시다고……. 정말, 정말 괜찮은 작품이에요. 감독님도 그렇고 제작사 측도……. 다 나무랄 데가 없고…….”
“맞아요. 대본도 좋고 감독도 좋고 제작사도 괜찮더라고요.”
“근데 대체 왜…….”
“마음이 변해서?”
차계원은 지독하게도 누구보다 다정한 목소리였다. 아직도 그의 손이 끊임없이 이서의 어깨를 매만지고 등을 쓸어내린다.
“그런 게……. 어디 있어요…….”
“살다 보면 이런 일도 있고 저런 일도 있는 거죠.”
이서의 목에서 물에 잠긴 듯한 소리가 나온다. 그러나 차계원은 모든 게 태연하고 여유로웠다.
“다 울었어요?”
“…….”
“대표님도 달래 줬고 계약서도 돌려줬으니까…….”
차계원이 이서를 품에서 떼 현관 바로 앞에 앉혀 놓는다.
“나는 가 볼게요.”
“간다……. 고요?”
“추운 날은 목도리라도 하시고요.”
제 목에 있던 베이지색 머플러를 푼 차계원이 이서의 목에 살뜰하게 매어 준다. 상황과 어울리지 않게 머플러는 따듯하고 부드러웠다.
“…….”
“현관문은 닫아 줘요?”
“진심…… 이세요?”
“계속 말했잖아요. 우리 대표님은 의심 많아서 큰일이라니까. 나 믿는다더니 거짓말이었나 봐?”
몸을 일으킨 계원이 자애롭게 웃는다. 백이서가 힘없는 봉제 인형처럼 앉혀 준 자세 그대로 앉아 허공만 본다.
“…….”
“가 볼게요. 문은……. 닫아 주는 게 싫으면 알아서 닫으세요.”
정말 모든 볼일이 다 끝났다는 듯 차계원이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태도로 뒤를 돌아 나간다. 이서의 눈에 애써 그친 울음이 서린다.
“계원……. 계원 씨.”
잠시 멍하니 있던 이서가 뒤늦게 계원을 따라 현관을 박차고 뛰어나간다. 차계원은 벌써 저만치 멀어져 있었다.
“차계원…… 씨.”
헉헉대며 차계원을 따라간 이서가 그의 코트 자락을 잡는다. 무심한 표정이 이서를 되돌아본다.
“배웅 나와 주는 거예요? 그럴 필요까지는 없는데.”
이서는 차계원이 진심이라는 걸 알았다.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그는 정말로 아무런 미안함이나 거리낌 없이 이 영화를 엎으려는 거다. 아주 조금의 죄책감도 없이.
“다시, 다시 생각해 보시면 안 될까요?”
그의 대답은 같을 거다. 그런 인간이다. 하지만 이서는 그걸 알면서도 매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이미 제작사 측은 촬영 일정을 정하고 있었고, 온 포털 사이트에 기사가 내걸렸다. 투자자들은 차계원이 배역을 맡는다는 소식에 배로 금액을 끌어왔다.
“음……. 역시 안 내키네요.”
고민하는 척도 안 한 차계원이 산뜻하게 말한다.
“계원…….”
차계원이 코트 자락을 잡고 있는 이서의 손을 떼어낸다.
“들어가세요.”
“문제가 있거나 마음 안 드는 게 있으시면……. 그러시면 바꿀게요.”
다시 울음이 올라온 이서의 목소리는 탁했고, 매달림과 비슷했다.
“…….”
“이 작품만 해 주세요. 다른 건 강요 안 할게요. 두 번 다시 이럴 일 없을 거예요. 약속해요. 장담해요.”
이서가 다시 코트 자락을 잡으며 다급하게 호소한다. 숨 쉴 틈 없이 빠르게 말하는 모습이 초라하고 가엾다.
“하기 싫다니까.”
다정함을 잃지 않던 차계원의 어투에 귀찮음이 머문다. 피부로 느껴지는 그 짜증과 귀찮음을 이서는 모른 척하는 수밖에 없었다.
차계원과 이진강의 출연 계약금은 이번 주 내로 들어오기로 돼 있었다. 당연하게도 차계원의 출연료는 이진강과 비교가 안 됐다. 배우 몫을 빼고서라도 상당했다.
“혹시……. 저한테 화난 거라도 있으세요? 저번처럼…… 화나서……. 그래서.”
“전혀요.”
“기사까지 났잖아요…….”
이서가 같은 말을 반복한다. 여기서 엎어지면 출연료는 고사하고 위약금을 배상해내야 한다. 그렇게 되면 당장 갈 곳 없는 이서는 월세방도 구할 수 없는 처지가 된다. 다른 문제들도 줄줄이 따라온다. 배상을 차계원이 한다 해도 일방적인 작품 무산을 어떻게 설명한단 말인가. 그로 인해 추락할 회사의 신뢰도와 이미지는 어떻게 복구할까.
“기사 다시 내요. 그게 소속사가 할 일이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