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
“아니요. 안 돼요. 안 돼요. 계원 씨. 천천히…… 흐윽……. 천천히 생각해 봐 주세요.”
그가 작품을 엎으면 이진강의 위치 또한 위태로워진다. 애초에 그들이 이진강을 캐스팅한 건, 그의 이미지도 있지만 차계원과 같은 소속사인 것도 있었다. 게다가 배우 하나 어쩌지 못해 작품에 타격을 입힌다면, 그 소속사의 다른 배우를 그대로 써 줄지도 의문이다. 당연히 차기작에도 영향을 줄 것이다.
“대표님 힘들면 기사도 내가 낼게요. 의사소통에 착오가 있었다. 이 정도면 되겠네.”
이서가 차계원을 붙잡은 손에 힘을 주며 고개를 흔든다. 일전에 차계원이 스케줄을 펑크 냈을 때도 소속사를 탓하는 반응이 많았다. 당연한 일이다. 연예인의 일정이나 상황에 차질이 생긴다면 그를 관리하는 소속사에게 화살이 돌아갈 수밖에 없다. 그 회사가 이름도 유명세도 없는 소속사라면 더욱.
아역부터 해 온 연예계 생활 동안 단 한 번도 사고를 치거나, 안 좋은 일로 매스컴을 탄 적 없는 차계원이기에 더 그렇다. 이번에도 소속사 문제냐는 말은 필수불가결적으로 들려올 것이다.
“보셨잖아요. 제 상황. 지금 회사 사정이 안 좋아요……. 많이……. 아주 많이 안 좋아요. 한 번만……. 한 번만 도와주세요.”
“…….”
“차계원 씨…….”
올려다보는 이서의 시선이 간절하다. 그 앞에서 피식 비웃듯 입꼬리를 올린 차계원이 입을 연다.
“대표 사정 봐 가며 작품 고르는 배우가 어디 있어요. 내가 자원봉사자도 아니고.”
그에게는 타협의 여지가 없어 보였다. 정말 단 일말의 여지도. 이서의 다리에 힘이 풀린다. 차계원이 들어오고 회사의 인지도를 높이고자 했으나 이래서는 부정적인 인지도밖에 생길 게 없다. 이 작품을 물린다고 차계원이 다른 작품이라도 하려 할까. 아닐 것이다. 거기다 만약 지금 상태에서 차계원이 회사를 나가기라도 한다면, 남는 건 배우 하나 관리 못 한 소속사 이미지뿐이다.
“다른 건 다 차계원 씨 뜻대로 맞춰 드릴게요. 이것만…… 제발 딱 이것만…… 부탁드려요.”
다리에 힘이 풀린 백이서가 코트 자락을 잡은 채 죽 내려간다. 거의 바짓가랑이를 붙잡는 모양새와 다를 게 없었다. 울음이 서린 목소리가 주절주절 말을 늘어놓는다.
“……내가 결국 이 꼴을 보네요.”
“…….”
차계원이 허리를 숙여 백이서의 얼굴을 감싼다. 높게 치켜든 턱 덕분에 목선이 도드라진다.
“못 볼까 봐 아쉬웠는데.”
“다음 작품부터는 어떤 것도 권유하지 않아요. 이번 건……. 이번 건 약속한 거니까. 이미 계약까지 다 끝낸 거니까.”
“…….”
“다들 기대하고 있어요. 아시잖아요……. 다 아시잖아요…….”
“…….”
“어떻게 이렇게. 어떻게 이렇게 쉽게…….”
차계원이 한껏 흐트러진 이서의 머리를 쓸어 올려 준다.
“그럼.”
“생각 정도는 다시 해 보실 수 있잖아요. 그러실 수……. 있잖아요.”
“그럼 대표님은 나한테 뭘 해 줄 건데요?”
“……?”
이서가 흔들리는 눈으로 그를 본다.
“내가 하기 싫은 영화까지 참아 가며 찍으면. 대표님은 뭘 해 줄 거냐고.”
“아…….”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있던 이서의 손이 바닥으로 툭 떨어진다.
* * *
차계원은 뭘 해 줄 거냐는 말을 끝으로 백이서를 안아 들어 아파트를 빠져나갔다. 어버버 하는 사이에 차 조수석에 실려 있었다. 열린 현관문이며 난장판 된 집이 신경 쓰였으나, 저도 될 대로 되라 싶었다.
차계원은 말없이 차를 몰았고 이서도 아무 말 꺼내지 못했다. 왜 갑자기 저를 데리고 가는지, 어디를 가는지, 궁금하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조금이라도 눈에 거슬렸다가 작품이 날아갈까 두려웠다. 여기서 뭐라도 하나 더 놓친다면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다요?”
차가 눈에 익은 풍경에 들어서고, 차계원이 향하던 행선지가 그의 집인 걸 인지했을 때, 차계원이 침묵을 깨고 말했다.
“……예?”
“다른 건 다 내 뜻대로 맞춰 준다며. 정말 전부 다냐고.”
다급하게 제가 주절주절 내뱉은 것이건만 쉽사리 그렇다는 긍정이 나오지 않았다. 자신의 다와 차계원의 다는 의미가 다를 것 같은 예감이 든다.
“다라고 했어요. 아까.”
“…….”
“주저앉아 빌빌 기면서 대표님이 대표님 입으로 그렇게 말했어요.”
“……네.”
“당신 그 말 지켜야 할 거야.”
서슬 퍼런 경고와 함께 차가 멈춘다. 내려서 빙 돌아 조수석 문을 연 차계원이 이서를 마치 보쌈해 가듯 들어 올린다.
“제가…….”
“맨발이잖아요.”
손쉽게 이서를 어깨에 걸친 차계원이 척척 걸어 나간다. 그를 따라갈 때, 헐레벌떡 따라가느라 신발도 신지 못했었다.
“…….”
차계원은 그대로 이서를 제 방까지 들고 가 침대 위에 내려놓았다. 이윽고 뜨거운 물로 적신 수건을 가져와 발을 닦아 준다. 이서는 쭈뼛대기는 해도 불편한 기색을 내비치지는 못했다.
“영화……. 그대로 하시는 거죠.”
머릿속에는 온통 영화뿐이었다. 지금도 협탁 위에 놓여 있는 계약서에 온 신경이 가 있었다. 혹여나 아까처럼 안 하겠다며 강경하게 나올까 봐 말 한마디 하는 데도 열댓 번을 고민하게 된다.
“……글쎄요.”
“…….”
백이서가 입술을 꾹 깨물며 눈만 도록도록 굴려댄다. 계원은 그게 마음에 들어, 백이서가 저렇게 눈을 굴려댈 때면 그 움직임을 놓치지 않고 면밀히 관찰하고는 했다.
“대표님.”
“……네.”
“왜 나한테는 존댓말 해요?”
도록도록 느리게 움직이던 눈이 갈 곳을 잃는다. 백이서는 제게만 멈칫하고 망설이고 박하다.
“다 들어준다고 했죠. 이것부터 바꿔요.”
“아까 그건……. 일과 관련된 면에서 차계원 씨 의견을 전적으로 수용하겠다는 의미였어요.”
“이것도 일이라고 생각하든지.”
섬세하게 발을 닦아 주던 손길이 툭툭 성의 없게 변한다.
“공과 사는 확실히 해야 하지……. 않을까요.”
말을 놓기 싫은 이서가 애써 에둘러 핑계를 찾는다. 이진강은 그렇다 쳐도 차계원에게는 말을 놓기가 어려웠다. 왜 존댓말을 쓰냐니. 말까지 놓으면 안 그래도 없는 선을 더 넘을 거면서.
“이진강한테는 없던 게 갑자기 생기네요?”
“…….”
“걔랑은 밥도 매일 같이 먹잖아. 걔랑 먹으면 밥맛이 막 도나 봐요? 툭하면 깨작거리던 게.”
“언, 언제 보셨어요?”
“본 건 아니고.”
“진강이는…….”
말을 하려던 이서가 차계원의 표정을 보고 입을 다문다. 발을 닦아 주던 손을 멈추고 올려다보는 그의 입매가 비틀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진강…… 씨 하고는 어쩌다 보니까 놓게 된 거예요. 공사 구분이 흐려지면 차계원 씨한테 안 좋을 거예요.”
꼼지락대던 발가락이 곱아든다. 지금만 봐도 그렇다. 말만 자신이 대표지 이렇게 갑을이 분명한데.
“나는 원래 공사 구분 없어요. 일할 때 사적인 감정 되는대로 넣는 편이에요. 보통 안 좋은 쪽으로.”
이서의 발을 다 닦아 준 차계원이 머플러와 코트를 벗겨준다. 방 한쪽에 걸리는 제 겉옷과 곱게 접히는 머플러가 자연스럽다.
“…….”
“그리고, 나랑 몇 번을 자 놓고 그런 말이 나와요?”
“계원 씨!”
“아니면 걔랑도 잤어요?”
머플러를 접던 동작을 뚝 멈춘 계원이 침대에 걸터앉아 있는 이서에게 다가온다.
“왜 또……. 말을 그렇게…….”
“나보다 잘해요? 나랑 할 때는 좋아서 자지러졌었잖아. 걔한테도 그랬어요?”
엄지손가락이 느릿한 음성보다 더 느릿하게 이서의 목울대를 진득히 훑어 내린다.
“그런 일 없어요. 절대 없어요! 왜 그런 말만 하시는 거예요. 이진강 씨가 휘준이랑 좀 비슷하다 보니까 후배 같고 동생 같고. 나이도 저보다 어리고…….”
“나이는 내가 더 적어요.”
“그, 그래도. 어쨌건. 그리고 자, 자…… 자지러지기는 제가 또 언제……. 언제 그렇게 그랬다고.”
차계원은 본인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잔뜩 해 놓고는 관심 없다는 양 듣지도 않는다. 침대 정 가운데에 자리 잡고 누워서는 앉아 있는 이서를 구태여 끌어당긴다.
“그런 표현 좀 쓰지 말아 주세요. 혹시나 이진강 씨 앞에서도 이런 거 묻거나 하지 말아 주시고…… 진짜 아니란 말이에요. 누가 봐도 아닌데…….”
백이서가 울먹거리며 호소한다. 백이서는 꼭 제가 억울할 때만 말이 길어진다. 아니면 부탁할 게 있거나, 필요한 게 있거나 그럴 때.
“알아요.”
계원이 놀리듯 말하자 백이서가 서럽게 노려본다. 차계원이 그런 백이서를 들어 제 위에 포개 안는다. 얌전하다.
“그랬으면 이렇게 곱게 못 있지.”
계원이 한 손으로 백이서의 목을 살짝 조이듯 감싼다. 한 손에 들어오는 목의 뼈대가 가늘다.
“걔도, 대표님도.”
“……알면서 왜 그렇게 말하세요.”
“쩔쩔매는 꼴 보려고요. 재밌잖아요.”
“못됐어요.”
“진짜 못된 게 누군데.”
“…….”
기죽은 강아지의 귀가 처지듯 고개가 처진다. 머리칼도 함께 축 처진 것 같은 착각이 인다. 백이서가 누운 가슴께가 간지럽다.
“진짜 개새끼면 목줄이나 맬 수 있지.”
“…….”
“말 놔요. 나보다 다섯 살이나 많잖아요.”
“그럼 영화는…….”
“……그건 조금 더 생각해 볼게요.”
“…….”
백이서가 말없이 고개를 반대쪽으로 돌린다. 왼쪽이나 오른쪽이나 위에서 보면 정수리만 보이는 건 똑같은데.
“안 놓을 거면 지금 안 한다 전하고.”
“놔요!”
평소에는 반응이 느린 주제에 이럴 때는 고개를 번쩍 치켜든다.
“놓을게요…….”
“…….”
“놓을게?”
“잘했어요.”
계원이 이서의 머리를 쓰다듬어 준다. 백이서는 툭하면 삐쭉대는 주제에 쓰다듬어 주는 건 또 좋은지 길게 하품한다.
“갈 데는 있어요?”
“잘 모르겠어요.”
“그 집 넘어간다면서요.”
“확실히 몰라요. 어떻게 된 건지……. 알아보려고요.”
“눈 없어요? 딱 봐도 경매 진행되겠던데.”
“저도 알아요.”
“여기서 지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