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
“……괜찮아요.”
“말.”
“괜…… 찮아.”
“안 지내본 것도 아닌데 뭐 어때요.”
“…….”
“잘 데도 없잖아요. 진짜 길바닥에서 잘 거예요?”
“신경 안 써 줘도 돼. 언제는 저 망하면 구경할 거라고……. 해 놓고…….”
삐쭉대는 이서를 보며 차계원이 큭큭대며 웃는다. 흘려듣는 양 굴더니 마음에 담아 둔 게 우스웠다.
“그래서 어떻게 하게요.”
“당분간 사무실에서 자면 되니까…….”
“그건 내 거 아니에요?”
“기분이 조금……. 다르니까.”
“허. 대체 뭐가 어떻게 다른데요.”
“조금 덜 미안한 느낌…… 이고. 덜 불편한 기분…… 이고.”
“참나.”
“…….”
백이서가 힐긋 눈치를 보려는 모양새로 고개를 올렸다가 다시 내린다. 고개를 내릴 때 가슴팍에 콩하고 닿는 무게가 기껍다.
백이서는 말 놓으라니까 말끝을 있는 힘껏 흘렸다. 뒤에 존대가 붙는 환청이 들 정도다. 계원이 팔을 뻗어 이서의 맨발 한쪽을 손아귀에 쥔다.
“진짜 신데렐라 됐네.”
계원이 이서를 안은 채로 몸을 돌린다. 침대에 등을 맞대게 된 이서가 상체를 살짝 일으켜 제 발을 내려다본다.
“그 왕자 새끼 병신이지 않아요?”
“왜……?”
“나였으면 신발부터 뺏었을 거예요.”
누운 이서의 양다리를 벌려 제 허벅지 위에 올리고 앉은 차계원이 발등을 깨문다.
“으…….”
이어서 엄지발가락도 아프게 문다. 이서가 살풋 미간을 찡그린다.
“걔는 신데렐라를 놓쳐도 할 말이 없어요.”
병신처럼 한가하게 춤이나 추고 앉았으니 그 여자가 제 집으로 내뺀 거 아닌가.
“하지 마…….”
“여기서 지내요.”
차계원이 이서의 위로 올라온다. 이서가 침대에 무게를 지탱하고 있는 계원의 팔뚝을 잡는다. 계원이 그 손을 떼어낸다. 쉽게 떼지는 손을 제 얼굴로 가져가 느릿하게 문지른다. 제 의지와 상관없이 차계원의 얼굴을 어루만지게 된 이서가 팔을 빼내려 한다.
“하지 말라니까…….”
팔을 툭 놔준 차계원이 이서의 한쪽 얼굴을 감싼다. 엄지로는 입술을 짓누르듯 비비고, 나머지 손가락으로는 귓불을 만진다. 귓바퀴를 살살 건드리는 통에 붉게 달아오른 귀가 간지럽다. 간지럼을 타며 손을 피하려는 이서의 턱 아래에 계원이 입을 맞춘다.
“발에도 하지 말라 하고.”
턱 아래에 맞추던 입맞춤이 점점 목, 쇄골, 어깨 순으로 내려온다. 얼굴을 매만지던 손으로는 상체를 훑어 내리고 있었다.
“하지…….”
“얼굴에도 하지 말라 하면.”
“흐읏…….”
상체로 쑥 들어온 계원의 손이 이서의 상의를 벗겨낸다.
“어쩌라는 거예요.”
“그냥 다 안 하면…….”
“싫어요.”
계원이 발간 유두를 입에 넣고 빨아당긴다. 혀로 동글려 주자 백이서의 허리가 움찔거린다. 기특하게도 백이서의 유두는 살짝만 건드려도 꼿꼿해졌다.
“흐으……. 좀…… 비켜 봐요…….”
그때 이서의 배에서 꼬르륵거리는 뱃고동 소리가 울린다.
“…….”
“아…….”
당황한 백이서가 손으로 제 배를 감싼다. 피식거리는 허탈한 웃음에 창피한지 벗겨 놓은 몸이 죄 빨개진다. 저 정도면 아랫도리도 붉어지지 않았을까.
“싫으면 말을 하지 그랬어요.”
“했잖아요! 계속.”
어울리지 않게 성까지 낸 백이서가 베개를 끌어다 제 얼굴 위에 올린다. 계원이 그 베개를 뺏으려 해도 양팔로 끌어안고 놓지 않는다. 계원이 허리를 숙여 오른쪽 옆구리를 깨문다. 선명하게 난 잇자국이 보기 좋다.
“아야!”
“기다려요.”
차계원이 침대에서 내려와 방을 나간다. 다시 돌아온 그의 손에는 반팔 티 하나가 들려 있었다. 아직도 베개를 끌어안고 눈만 빼꼼 내밀고 있는 이서에게서 기어코 베개를 뺏은 차계원이 본인의 옷을 입혀 준다. 척 봐도 헐렁했다.
“밥할 거니까 부르면 바로 내려와요.”
“저 계원 씨…….”
“붕어 대가리예요?”
방을 나가려던 계원이 한심하다는 얼굴로 돌아다본다.
“계, 계원아.”
“네. 먹고 싶은 거 있으면 지금 말해요.”
“혹시 직접 하…… 게?”
“언제는 아니었어요?”
“내가……. 해도 될까?”
* * *
식기의 덜그럭거리는 소리가 주방을 메운다. 이서가 선택한 메뉴는 수제비였다. 라면 물도 못 맞추는 이서가 유일하게 만들 수 있는 메뉴. 그마저도 미숙해 장장 한 시간 반이 걸렸다. 만드는 내내 옆에서 어슬렁거리는 차계원 때문에 더 오래 걸린 것도 있었다.
“괜찮아……?”
한 숟가락 뜨는 걸 본 이서가 묻는다. 무슨 음식을 만들어도 아무 맛도 안 나게 만드는 차계원이라 제가 나서긴 했으나, 제 요리 실력도 좋지는 못하기에 심히 불안했다.
“맛있네요.”
걱정과 달리 차계원은 잘 먹었다. 그가 세 숟갈 정도 먹는 걸 확인한 이서가 숟가락을 든다. 차계원네 식기는 뭐로 만들었는지 숟가락도 무거웠다.
“……짜네.”
국물 먼저 한 숟갈 들이켠 이서가 숟가락을 내려놓으며 중얼거린다. 나름 한다고 했는데 수제비는 많이 짰다. 차라리 아무 맛 안 나는 차계원의 요리가 나을 수도 있다.
“네. 좀 짜요.”
맛있다던 차계원이 기다렸다는 듯이 말한다. 해사하게 웃으며 짜다고 말하는 계원은 단호했다. 그래 놓고 넓적한 수제비 한 조각을 떠 입에 넣는다.
“미안.”
이서가 차계원 앞의 수제비 그릇을 들어 싱크대 위에 올려놓는다.
“왜 가져가요.”
“짜다며…….”
“먹을 만했어요.”
“아니야 다시 해 줄게.”
“잘 먹는 걸 왜 그래요? 밥 먹을 때는 개도 안 건드린다는데.”
계원이 이서가 치운 그릇을 다시 가져다 먹는다. 이서도 하는 수 없이 다시 자리에 앉아 먹기 시작한다.
“맛이 없었어요?”
“그냥 짜니까. 너도 짜다며…….”
“아니. 내가 해 줬던 거.”
사실 계원도 아예 인지하지 못 하는 건 아니었다. 살면서 요리라는 건 해 본 적이 없었고 음식을 딱히 맛으로 먹지도 않았다. 그런 제가 만드는 음식이 맛이 좋으면 그게 더 이상하다. 그래도 미각이 없지는 않은지라 제 요리가 별로라는 것쯤은 알았다. 다만, 티 하나 안 내려고 주는 대로 먹는 백이서를 보는 재미가 쏠쏠했을 뿐이다.
“어……. 아니…….”
“솔직하게 말해도 돼요. 대표님 거짓말하면 티 많이 나요.”
“…….”
백이서가 우물우물 음식물을 씹던 입을 멈춘다. 대답을 고르는 눈치였다. 제가 음식을 해 보겠다며 반죽을 뜯는 것도 열심히 했다. 비록 그 손에서 나오는 반죽들은 제각각이었지만.
“맛없었어요?”
“으응…….”
“해 본 적이 없어서 그래요. 처음부터 잘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나 뭐라고 안 했는데…….”
“내일부터 가사 도우미분한테 맡길게요.”
“응.”
어느새 계원의 앞에 놓여 있던 수제비 그릇은 한 그릇이 다 비어 있었다.
“다음부터 말로 해요. 억지로 꾸역꾸역 먹지 말고.”
“억지로는……. 아니었어.”
“지금도 억지로 먹잖아요.”
“…….”
깨작거리며 먹던 그릇을 계원이 가져가고 대신 물잔을 앞에 놓는다. 이서가 물 한 컵을 거의 다 들이켠다. 바닥에 깔린 얼음도 오독오독 씹는다. 물배만 찬 기분이었다.
“지금 다른 거 주문해 줄게요. 그거 먹어요.”
“……응.”
음식을 주문한 계원이 양치를 하겠다며 가는 동안 이서는 음식을 기다리며 오도카니 앉아 있었다. 배는 고프지만, 입맛은 없었다. 전셋집, 경매, 영화, 기사 등의 것들이 번갈아 가며 머릿속을 떠다녔다. 제일 막막한 건 전셋값과 가진 물품들이 다 넘어가도 빚의 절반을 갚을 둥 말 둥이라는 사실이었다.
“거실에서 티비라도 보고 있지 그대로 멍하니 있었어요?”
“앗…….”
계원이 식탁 의자에 공손히 손까지 모으고 앉아 있는 백이서를 들어 올려 안는다. 놀라는 모습에 일부러 팔 하나를 떼고 한 손으로 들자, 백이서가 급하게 다리로 허리를 감아 온다. 계원이 한 손으로 엉덩이를 받치고 남은 한 손으로는 등을 받친 다음 물기가 남아 있는 제 얼굴을 어깨에 비빈다.
“축축해…….”
“흐음.”
차계원이 들리지 않는 양 얼굴을 떼지 않는다. 목 부근이 넓은 티셔츠 탓에 맨살에 물기가 닿았다.
“그래서 작품은…….”
“하. 나한테 할 이야기가 그것밖에 없어요?”
말을 끊고 고개를 들어 이서를 보는 표정에는 짜증이 가득하다.
“미안. 아무래도 중요하니까. 며칠 있으면……. 대본 리딩이잖아.”
중얼거리는 백이서의 얼굴에는 조급한 기색이 가득하다.
“고민 좀 해 볼게요.”
“말도 놨잖아……. 작품 관련해서 마음에 안 들거나, 내가 일하는 방식이 싫은 거면 다 맞출게…….”
“글쎄요. 하도 제 말을 안 듣는 분이라 믿을 수가 있어야죠.”
능청스럽게 대꾸한 계원이 백이서의 볼에 제 코를 살살 비비적거린다. 솜털이 선 시원한 피부가 마음에 든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계원 자신도 작품을 할지 안 할지 결정하지 못했다. 어떻게 해야 이게 더 매달려 올까. 집도 절도 없는 거로는 부족했다.
“……말 잘 들었는데.”
이서가 억울하다는 듯 내뱉는다.
“무슨 말을 잘 들었는데요.”
혼잣말 같은 말에 되물음이 돌아올 줄 몰랐던 이서가 사고 회로를 굴린다. 억울함에 일단 내뱉기는 했는데 딱히 생각나는 게 없다.
“밤에……. 안 돌아다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