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
“운동화나 안 쓰는 신발이라도 없을까.”
“어차피 맞지도 않잖아. 왜 나가려는데요.”
차계원이 짜증 난다는 듯 이마를 짚으며 상체를 일으킨다. 이서가 한 발짝 더 뒤로 간다.
“나 옷이랑……. 신발이랑 좀 챙겨 오게. 현관문 열고 온 것도 걸리고…….”
“우선 내 거 입어요. 사람 시켜서 가져올 테니까.”
한마디라도 더 하면 가만히 있지 않을 것 같은 표정이다.
“…….”
“문제 있어요?”
“아니…….”
“다시 올라와요.”
계원이 제 옆자리를 툭툭 친다. 스탠드만 켜진 방 안에서 쪼그리고 앉은 백이서는 꼭 토끼 같아서, 폴짝하고 뛰어오를 것만 같다. 어째 백이서를 닮은 건 죄다 동물뿐이었다. 하긴. 토끼 새끼나, 개새끼나, 여우 새끼나. 저렇게 쏙 빠져나가지만 않으면 얼마든지 귀여워해 줄 용의가 있다.
“언제 가져오는데?”
“급해요?”
“내일 출근해야지.”
“그 상황에도 출근이 하고 싶어요? 내가 개근상이라도 만들어 줘요?”
“제작사랑 미팅도 있는데. 미리 준비해 둬야 하잖아.”
넌지시 던지는 미팅 이야기는 그를 떠보려는 목적도 있었다. 저를 이 집에 데려올 때 계원의 뉘앙스로는 한다는 것 같았으나, 확신이 필요했다. 차계원네 집에 와 몇 번을 물어도 생각해 보겠다는 대답만 돌아와 점점 불안함이 커졌다.
“회사 대표가 뭐 하러 그런 거까지 직접 가려 해요. 그리고 그거 다음 주잖아요.”
“갈…… 거야?”
“일단 와서 누워요. 더 자게.”
“안 가……?”
“내가 가서 들고 오면 누워 있지만은 않을 거예요.”
“……같이 가면 안 돼?”
“…….”
대답 없는 계원이 제 뜻을 안 들어줄 것 같은지 한참 쭈그리고 있던 백이서가 슬금슬금 쭈뼛대며 다가온다. 가만히 앉아 그 행동을 지켜만 보자 이불을 슬쩍 들치고 안으로 들어온다. 이불을 가슴께까지 덮은 백이서가 아직 앉아 있는 계원을 올려다본다. 그 모습이 꼭 잘했냐고 묻는, 칭찬을 바라는 어린아이를 연상케 했다.
“대표님은 가끔 보면 되게 영악해요.”
“……같이 가?”
“알았어요. 갈 테니까. 자요.”
결국, 힘이 빠진 계원이 가겠노라 약속한다.
“응.”
그제야 안심이 됐는지 얌전히 대답한 백이서가 이불 속에서 눈을 말똥거린다.
머리만 대면 자는 백이서의 기운이 옮기라도 하는지, 이상하게도 백이서를 안고 자면 잠이 잘 왔다. 워낙 예민한 성정의 계원은 잠자리에서도 다르지 않았는데, 그 탓에 누군가와 자신의 침대를 공유해본 경험은 없었다.
그러나 백이서와는 3년 전에도 예외였다. 볼일을 해결하면 상대를 내쫓거나 자신이 나가거나 둘 중 하나였는데 그날은 달랐다. 그 덕에 소위 먹튀를 당했지만.
계원은 그날 후로 백이서를 찾으려 했었다. 처음에는 괘씸한 마음이었다. 저를 상대로 먼저 살살 꼬리 쳐 놓고 잠든 사이에 내빼다니 간도 크지 않은가. 하지만 그 골목은 씨씨티비도 없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 근처에 사람을 몇 풀었으나 닮은 사람조차 찾지 못했다. 대략 한 달을 그러던 계원은 제 자신이 한심해 그만두었다. 하룻밤 잔 상대가 뭐 그리 대수라고. 그게 뭐 그리 중요하다고.
그러나 백이서는 그날 후로도 종종 떠올랐다. 예컨대 하얀 몸뚱어리나 말간 얼굴 같은 거. 술에 취해 웅얼대던 말투와 살짝 올라간 둥근 눈 같은 게.
이런 인간이 연예계 소속사 대표나 하고 있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 끽해야 어디 인형 눈이나 붙일 것처럼 생겨서, 같은 바닥에 있었다니 숫제 억울한 마음까지 인다.
“으음…….”
역시나. 그거 좀 토닥여 주고 재워 줬다고 백이서는 그새 잠들어 있었다. 계원이 몸 위로 이불을 덮고 잠을 청한다.
* * *
어제 오후부터 잠만 잔 이서가 오래간만에 이른 새벽부터 눈을 떴다. 눈을 한 번 비비고 길게 하품을 한다. 오늘도 여전히 차계원의 몸 위였다.
“하암…….”
“깼어요?”
“나 더운데…….”
하품 소리에 깬 차계원이 이서의 등허리를 토닥이며 협탁 위를 더듬는다. 협탁 서랍 안에서 리모컨을 찾아낸 계원이 에어컨을 작동시킨다. 시원한 바람이 방 안을 채우기 시작한다.
“겨울에 무슨 에어컨이야.”
“덥다면서요. 뭐 이렇게 변덕이 심해요?”
이서가 어이없는 얼굴로 계원을 올려다본다. 대체 누가 누구한테.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라는 격이었다.
“……왜 항상 이러고 있는 거야?”
“편하잖아요.”
“안 무거워?”
“네. 왜요. 불편해요?”
“응…….”
“아아.”
차계원이 별 반응 없이 토닥이던 손만 더 느리게 움직인다.
“저기…….”
“이번엔 또 왜요.”
“나는 불편하다니까.”
“……?”
차계원은 그래서 어쩌라는 듯한 표정이었다. 무시하거나 시비를 걸려는 게 아니라 정말 순수하게 그래서 어떻게 하라는 건지 모르겠다는 얼굴.
‘차라리 내가 불편하고 말지.’
차계원은 정말 태어나서 한 번도 남의 불편을 신경 써 본 적 없는 사람 같다.
“아니야.”
“그래요.”
“…….”
계원이 옆으로 돌아눕는다. 자동으로 같이 옆으로 눕게 된 이서의 목에 팔베개가 들어온다. 몸을 살짝 움직여 천장을 보고 누우니 아까보다 덜 더운 것도 같았다. 선선한 에어컨 바람에 이마가 시원하다.
“술 준다 했는데도 안 갔어요?”
“……응.”
“한태미랑 연락은 어떻게 했어요. 차단했는데.”
“다른 번호로……. 문자 와서…….”
“난 걔 싫어요. 알죠?”
정면으로 누운 이서 옆에서, 모로 누워 팔로 머리를 받친 계원이 마지막으로 한태미를 봤던 날을 생각한다. 처음 백이서의 사무실에서 본 날처럼 한결같이 별로였다.
“응. 근데 너는 다 싫어하잖아…….”
“대표님은 안 싫어하잖아요.”
“어……?”
이서가 머리를 갸웃거린다. 암만 골똘히 생각해 봐도 만만하니까 이리 굴리고 저리 굴리는 거였다.
“억울하네요. 갈 곳 없는 거 주워 왔더니.”
“주워 달라고 안 했는데……. 내가 길바닥에 있는 돌멩이도 아니고.”
계원이 삐쭉대는 입술을 꼬집는다. 분명 아프지 않게 꼬집었는데 백이서의 눈이 세모꼴이 된다.
“그래서 내 말 듣느라 안 만났어요?”
“응…….”
백이서는 거짓말이 다 티가 난다. 백이서를 제대로 모르는 사람도 알아챌 수 있을 정도로. 갈 길 못 찾는 눈을 최대한 티 안 내기 위해 내리깔고 입꼬리 근육은 미세하게 당긴다. 그런 주제에 끝없이 시도하는 게 귀엽기도 하고 얄밉기도 하다.
“영화는 할 거예요. 다시 바꿀 일 없어요.”
“응……. 고마워.”
“대신 우리 조건 하나 더 있어요.”
차계원이 환하게 웃는다. 불안함을 지레 집어먹은 이서의 동공이 요동친다. 차계원이 저렇게 웃을 때는 제게 좋은 일이 하나도 없었다.
“뭔…… 데?”
“대표님도 같이 가는 거예요.”
“어?!”
이서가 누워있던 몸을 벌떡 일으키며 비명 같은 소리를 지른다.
“같이 가요. 현지 촬영 전부.”
“…….”
날벼락도 이런 날벼락이 없다. 차계원을 보내기 위해 선택한 작품이었는데 제 꾀에 제가 넘어가게 생겼다. 차계원이 현지 촬영으로 바쁠 동안 이서는 그 없이도 회사를 키울 방법을 물색하려 했다. 지금도 영입하려는 배우들을 차계원이 죄다 퇴짜 놓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진강만 봐도 오죽하면 우연히 만난 저를 붙잡고 그랬을까.
“영화 추천할 때 그랬다면서요. 스페인 풍경도 좋고 날씨도 좋으니 간 김에 여행하면 좋지 않겠냐고.”
계원이 나른하게 기지개를 피며 말을 잇는다. 마치 여행지 한가운데라도 서 있는 듯 꿈결 같은 목소리다.
“아니……. 그건…….”
이서가 혀로 입술을 축인다. 스페인의 날씨가 화창하든 풍경이 그림 같든 제 알 바인가. 작품을 어필하기 위해 아무렇게나 내뱉은 수많은 말 중 하나였다. 뭐라고 말했는지도 다 기억나지 않았다.
“아. 거짓말한 거예요? 나 보내려고?”
“아니요!”
이서가 소리치듯 부정한다. 이래서야 맞다고 광고하는 꼴이었다.
“그럼 왜 그렇게 망설이는데요? 한 입으로 두말하는 거예요? 대표님 그런 사람이었어요?”
“아니…….”
“이러다 그냥 두면 내 뒤통수도 때리고 도망가겠네? 그때 되면 아무것도 모르는 여리고 순진한 나는 그냥 사기당하면 돼요?”
차계원이 천하의 불한당을 보듯 이서를 본다. 그럴싸한 핑계를 대고 싶은데 막상 입에서 나오는 말은 아니라는 말뿐이다. 애초에 차계원을 상대로 어물쩍 넘어가는 것도 말이 안 됐다.
“아니. 왜 이야기가 그렇게 돼…….”
“그게 아니면 뭔데요? 설명해 봐요.”
차계원이 생각할 새도 없이 몰아붙인다. 콩알만 한 눈덩이가 집채만 해져서 이서를 덮으려 하고 있었다.
“촬영을 따라가는 대표가 어디 있어. 그리고 나는 일해야 하고. 그 여행 경비도……. 현지 촬영 기간도 길던데. 너무 현실적이지 못하잖아.”
“아……. 걱정돼서 그런 거였어요?”
“당연하지.”
“걱정 마요. 경비는 내가 다 부담할 거니까. 일이야 직원 더 뽑죠. 뭐. 내가 우리 대표님한테 그 정도도 못 해 주겠어요? 다 싫어한다는 제가 이렇게 좋아하는 대표님인데.”
차계원은 침대에 누운 채 한쪽 다리를 반대쪽 다리에 올려 까딱거리고 있었다. 머리 뒤로 깍지 낀 폼이 여유롭다.
“아……. 아니, 아니.”
“가면 빠에야 사 줄게요.”
“…….”
“거기 잘 아는 카페도 있어요. 대표님 말대로 풍경도 멋있고.”
“…….”
“정해요.”
“뭘…….”
“사기꾼 할래요. 그냥 대표 할래요.”
계원이 긴 눈매를 곱게 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