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
차계원은 약속대로 사람을 시켜 이서의 짐을 다 가져다줬다. 양말 한쪽까지도. 사실 부동산이 압류돼도 당장 하루아침에 진행되는 건 아니라 구태여 이럴 필요는 없으나, 차계원은 모르쇠였다.
“여권은 발급받았으면서 왜 아무 데도 안 갔어요?”
어디에 뒀는지도 잊은 여권을 정말 잘도 찾아왔다. 차계원이 이서의 여권을 손에 넣고 빙그르르 돌린다.
“그냥……. 기회가 없었지 뭐.”
여권을 만들 때야 여행을 떠날 계획이 있었다. 한창 소속사를 차리자는 이야기로 김승주가 자신을 설득하던 때였다. 그 세 치 혀로 온갖 사탕발림을 하던 그는 함께 커플 여행을 가자는 둥 온갖 바람을 불어 넣었었다. 그 결과는 김승주의 잠수였다. 여권이 나오고 한 달 만의 일이었다.
“흐음. 완전 애기 같네요.”
“4년 전인데 애기라니. 빨리 줘.”
이서가 손을 뻗는다. 과거 사진과 생년월일이 죄 적혀 있는 여권이 남의 손에 있는 게 달갑지는 않았다. 그보다는 김승주한테 사기당한 이후로 타인의 손에 신분증이 있는 게 별로였다.
“로케 가는 날 줄게요. 공항에서.”
“왜……?”
“혹시나 대표님이 태워 버리거나 당일에 잃어버리면 안 되잖아요. 재발급도 오래 걸리는데.”
차계원은 정말 귀신같았다. 어떻게 제 머릿속에 순간 들었다 지워 버린 생각들을 고대로 읽었을까. 저렇게 치밀한 인간이 왜 배우를 하나 의문이다. 형사를 했으면 죄수들의 자백을 줄줄 받아냈을 거다.
“자. 이제 대표님 집 가요.”
“집……? 가도 돼?”
뜬금없는 소리에 이서가 되묻는다.
“그럼요. 못 갈 게 뭐예요.”
어제만 해도 신발 한 짝 안 빌려주더니 이건 또 무슨 일인지. 그럴 거면 짐이나 안 챙겨 왔으면 수월했을 텐데. 속으로 열심히 구시렁대는 이서를 이끌고 계원이 간 곳은 손님방 중 하나였다.
“어때. 비슷하죠?”
차계원이 안내한 손님방은 이서의 집과 꼭 닮아 있었다. 크기도 그랬고, 가구 배치나 커튼, 옷장에 걸린 옷들도 이서 옷이었다.
“거의 다 딱지가 붙어 있어서 못 가져왔대요. 구조만 똑같이 만든 거예요.”
“굳이……. 이걸…….”
“안 고마워해도 돼요. 집이 아담해서 한 시간이면 되더라고요.”
고맙다는 생각은 애초에 별로 들지도 않았다. 굳이 이런 쓸데없는 일을 벌였는지 이해도 안 간다. 사실 로케 촬영을 같이 가기로 한 후부터 차계원의 행동들이 곱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제 집 가고 싶으면 여기서 쉬세요. 가끔 나도 초대해 주고.”
결국, 목적은 그거였다. 빙긋 웃는 얼굴이 얄밉기 그지없다.
“……출근할게.”
힘없이 어깨를 축 늘인 이서가 방을 나서려 할 때였다. 차계원이 깜빡했다는 듯 입을 연다.
“아. 맞다. 대표님 오늘 쉴 거예요.”
“어, 어? 왜?”
“그냥요.”
“근데 나는 오후에는 출근하려 했는데……. 어차피 집에 있어 봐야 할 것도 없으면…….”
“대표님.”
“으응?”
“내가 요즘 과하게 착해요?”
방금까지 나른하던 목소리가 순식간에 착 가라앉는다. 빙긋 웃던 표정도 온데간데없다.
“아, 아니. 너 안 착해…….”
“…….”
“안 착하다는 게 아니라 과하지는 않다는 뜻…… 이었어.”
“근데 왜 말대꾸가 늘어요.”
“…….”
“쉬어요. 그냥. 가 봤자 서휘준, 이진강이랑 시시덕거리기밖에 더 하겠어요?”
“넌 어디 나가……?”
그러고 보니 차계원은 외출 차림이었다. 이서가 알기로 오늘 차계원은 특별한 스케줄이 없었다.
“오늘 CF 촬영 있어요.”
“어? 나 못 들었는데…….”
계원이 어리둥절한 이서의 볼에 쪽 소리 나게 뽀뽀한다.
“결정한 지 얼마 안 됐어요.”
이번에는 이마와 콧등이다. 갑작스러운 낯부끄러운 행동에 이서가 목을 움츠린다.
“왜 자꾸 그래…….”
“섹스도 하는데 뽀뽀가 부끄러워요?”
“물어보지도 않고 막 하니까. 그렇지.”
“누가 그러고 서 있으래요?”
말이 끝나기 무섭게 또 입술을 가져다 댄다. 제가 부끄러워하는 걸 보고 놀리려는 게 분명했다. 실제로 이서는 섹스보다 이게 더 불편했다. 이건 꼭 연인 사이에 하는 것 같은 느낌이니까.
“무슨 CF인데?”
“자동차 광고예요. 셰이드 회사.”
익숙한 이름이었다. 어디서 들어 본 것 같은.
“어 그거……. 진강이…… 진강 씨가 하기로 했던 거 아니야? 그때 그랬잖아.”
“그랬어요? 난 몰랐네.”
차계원이 능청스럽게 대꾸한다.
“네가 말해 줬는데?”
“내가 요즘 기억력이 안 좋아요. 대표님이 이해해요.”
“잠, 잠깐만…….”
가볍게 말을 던진 차계원이 현관을 향해 휘적휘적 걸어간다. 보폭도 워낙 넓은 데다가 빨리 걸으니 따라잡기 힘들었다.
“나 없다고 쫄랑쫄랑 나가면 안 돼요.”
“어떻게 된 건지 나한테도 설명 좀…….”
“누가 와도 문 열어 주지 말고.”
제 할 말만 한 차계원이 현관문을 닫고 사라진다.
* * *
차계원이 나가고 나서도 한참을 황망하게 있던 이서는 부랴부랴 휘준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 핸드폰도 압류된 걸 어떻게 찾았는지 차계원이 가져다준 거였다.
신호가 몇 번 가지 않고 통화가 연결됐다.
[대표님?]
“응, 휘준아. 별일 없지?”
[오후에 나오실 거잖습니까.]
“아니. 오늘 쉴 거 같아.”
[요즘 일이 바쁘기는 했죠. 쉬엄쉬엄하는 것도 좋습니다.]
“그보다 진강이 CF 어떻게 된 거야? 너 알고 있었어?”
[자동차 광고 말입니까?]
“그래. 그거!”
[하아. 저도 오늘 연락받았습니다. 모델이 차계원 씨로 교체됐어요.]
“오늘 연락받았다고? 이럴 수가 있어?”
휘준이 한숨 같은 잠깐의 텀을 두고 설명한다.
[원래 예정된 촬영 날이 오늘이었잖습니까. 저도 아직 이유는 정확히 모르겠습니다. 아침부터 연락이 와서 다짜고짜 캔슬했어요. 차계원을 발탁하겠다고요.]
“그러니까 갑자기? 왜? 그런 말 없었잖아.”
[그쪽에서는 원래부터 차계원을 기용하고 싶었답니다. 그랬겠죠. 광고주들이 원하는 1순위인데. 다만 차계원 씨는 워낙 광고료가 높게 측정돼 있는 데다가, 거절당할 거 같아서 엄두도 못 냈대요. 근데 차계원이 하고 싶다고 했답니다.]
휘준은 원래 말이 많은 녀석이 아닌데 그도 기가 막힌지 아침에 있었던 일을 줄줄이 늘어놓는다.
“차계원 씨가? CF 이제 안 찍겠다고 했었잖아. 원래도 CF 작업은 잘 안 했었고.”
[제가 알겠습니까. 정확히는 좋게 보고 있었는데 이미 모델을 구했다니 아쉽다고 했대요. 광고주들 눈이 돈 거죠.]
“그래서? 그냥 알았다고 했어?”
[적반하장으로 어차피 같은 소속사니 너네가 손해 볼 거 없지 않느냐는데 뭐 어떡합니까. 계약 파기금도 주겠답니다. 여기서 더 실랑이 길어져 봐야 저희만 손해지 않습니까.]
“그렇지……. 진강이는?”
다른 건 둘째 치고 그게 제일 걱정이었다. 안 그래도 성실한 사람이니 CF를 위해 갖은 준비를 했을 거다. 이진강이 회사에 들어오고 처음 들어가는 작업이라 더 신경이 쓰였는데.
[담담합니다. 성격 아시잖습니까. 오히려 부담됐는데 다행이라고 웃길래 미안하다고 했습니다. 그래도 영 마음에 걸립니다. 미안하고요.]
“내가 다시 한 번 전화해 볼게. 진강이 얼굴을 어떻게 보냐.”
핸드폰 너머로 잠깐의 침묵이 흐른다.
[저는 이게 단순히 CF 문제라고 생각 안 합니다. 우리가 차계원 씨 CF 안 잡기로 한 건 이미지 때문이었잖습니까. 친숙하고 대중적인 이미지보다는 그 반대로 가자고. 그 잘난 차계원 씨가 먼저 그러자고 했었죠. 백번 양보해서 의사가 바뀌었다고 쳐도요. 저희한테는 말 한마디 안 했습니다. 저는 이게 저희를 무시하는 거거나 아니면…… 후…….]
“김건 씨도 연락 없었어?”
[네. 오늘 원래 오프라 지방에 약속이 있다고 했어요. 갑자기 잡힌 스케줄이라 조정 못 했을 겁니다. 제가 연락해 보겠습니다.]
“너는 다른 일 해. 내가 해 볼게.”
[예. 쉬십시오. 너무 신경 쓰지는 마시고요. 차계원 씨가 하게 되면 회사 측에서는…… 나쁜 건 없잖습니까. 상도덕이 없어서 그랬죠.]
“그래. 알았다.”
[네. 들어가 보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이서가 소파에 풀썩 앉는다.
차계원이 들어오고 하루도 조용한 날이 없다. cf를 찍으러 간다며 나가던 개운한 표정이 생각난다.
“일단 진강이한테……. 아. 건이 씨 먼저 해 봐야 하나.”
상심했을 진강이 걱정돼 키패드를 누르던 이서의 손이 멈칫한다. 진강에게 전화한다 한들 위로 말고 해 줄 게 없었다. 대표로서 상황 설명이나 납득이 가는 무언가를 말해 줘야 하는데 아는 게 없으니 그럴 수 없다. 마침 건이 쉬는 날이라 차계원도 곁에 없을 거고, 이진강과 차계원에 대해서도 묻고 싶었다.
돌이켜보면 차계원은 처음부터 이진강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가 회사에 들어오기도 전부터. 소속사에 들어오고 싶어 하는 진강이 아무런 연락을 받지 못했던 것도 의도적이었다는 확신이 든다. 이번 일도 고의가 아니라고는 할 수 없을 거다. 둘 사이에 제가 모르는 무언가가 있는 게 아니고서야 이해가 안 간다. 결국, 이서는 진강 대신 건에게 먼저 전화를 걸었다.
[네. 대표님.]
건의 목소리는 이서의 심란한 마음과 다르게 발랄했다.
“네. 건 씨. 바빠요? 오늘 오프라던데…….”
[아니요. 안 바빠요. 대표님 전화는 언제나 환영입니다. 하하하.]
“쉬는 날에 미안해요. 운전 중이에요? 내비 소리 들리는 거 같은데 통화해도 돼요?”
[아유. 미안하기는요. 오늘 친구들 만나러 지방에 잠깐 내려가고 있어요. 맛있는 거 잔뜩 먹고 오겠습니다!]
너털웃음을 짓는 건은 상당히 신난 것 같았다. 그는 가끔 투덜거리기는 해도 성격 자체가 뒤끝이 없으며 좋은 쪽으로 단순했다.
“그. 다른 게 아니라요. 그 광고 있잖아요. 오늘 차계원 씨가 찍기로 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