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비도덕적 안락함-53화 (53/100)

#53

[아. 예, 예. 원래 진강 씨가 찍기로 했던 거죠? 휘준 씨한테 듣기로는 그랬던 거 같은데요.]

“네. 맞아요. 갑자기 차계원 씨로 바뀌었더라고요. 그런데 당일 날 너무 갑자기라……. 이런 일은 들어보지도 못했고요. 혹시 어떻게 된 일인지 아는 거 있어요? 파악은 하는 게 맞는 거 같아서요.”

[아, 그게요……. 저도 완전 자세히는 모르는데 그쪽에서 하도 하자고 졸라서 어쩔 수 없었나 봐요.]

“그래…… 요? 그쪽에서는 차계원 씨 엄두도 못 내고 컨택도 안 한 거 아니었나요?”

의아하다. 휘준은 차계원이 먼저 하고 싶다는 뉘앙스를 풍겼다고 했다.

[에이. 모르시는 말씀이에요. 얼마나 귀찮게 굴었다구요. 거기 작년에도 신차 나왔었잖아요. 그때도 어찌나 줄기차게 연락을 해대는지. 곤란해 죽는 줄 알았어요. 거기 회사 회장님이 계원이 할아버님 친구분이시거든요.]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그 정도로 차계원을 모델로 기용하기 위해 열성적이었다면, 한 번쯤은 제가 들었어야 옳았다.

“그랬어요?”

[네, 네. 거기 광고주들 그러죠? 계원이가 관심 보였다고.]

“네……. 저도 그래서 어찌 된 일인가 해서……. 계원 씨가 모를 리 없거든요. 저한테 진강 씨 광고 소식 전해 준 게 계원 씨니까.”

[괜히 지들 곤란할까 봐 그러는 거예요. 지들 책임 조금이라도 덜 지려고 일부러 계원이한테 덤터기 씌우는 거라고요.]

“하지만 그렇게 콜을 넣었으면 휘준이나 제가 몰랐을 리가 없잖아요.”

[회사에만 연락 안 했을 뿐이죠. 제 개인 번호로도 몇 번을 연락해 왔었어요. 아무래도 제가 10년 넘게 계원이 개인 매니저였으니까 아직 저한테 먼저 연락하는 분들이 몇 있거든요. 직통이라 생각하는 건지 뭔지……. 게다가 거기 한국지사 대표님이 계원이 할아버님한테도 계속 부탁했었어요. 작년에는 촬영도 겹치고 해서 핑계나 댈 수 있었지.]

“그랬구나…….”

김건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 관행이라고 해야 하나. 아직도 예전처럼 소속사를 통하기보다 매니저를 통해 직접 컨택하고자 하는 이들이 많았다.

[네, 네. 그때도 비는 때가 언제냐. 차계원 씨 스케줄에 맞추겠다. 꼭 좀 같이 하고 싶다. 난리 난리를……. 어휴, 말도 마세요. 아주 진절머리가 나요. 그렇다고 세계적인 외제 차 브랜드인데 연락 좀 그만하라고 할 수도 없잖아요.]

“뭐 그렇게까지 한대요? 사람이 싫다면 들어주지.”

[제 말이요! 이번에는 그쪽에서 아주 강경하게 부탁했나 봐요. 하필 또 근래에 계원이 할아버님이 신세 진 일도 있었거든요. 그리고 계원이……. 할아버님은 좀 어려워해서요. 계원이도 어쩔 수 없었죠. 뭐.]

“정말 하나도 몰랐네요……. 그런 사정이 있으면 말씀 좀 해 주시지. 괜히 심란해서 고민했어요.”

[저희도 싫다고, 싫다고. 계속 미뤘는데 오늘 할아버님이 연락해서 한 소리 하셨나 보더라구요. 계원이 할아버지 누군지 아시죠?]

“알죠. 영로 무역 회장님 말씀하시는 거 아니에요?”

모를 리가 없다. 영로 무역은 대한민국 무역업의 선두 주자이자 무역업을 진두지휘하는 기업이었다. 벌써 몇 대째 잇고 있는 기업이라, 차계원의 데뷔 초에는 재벌가네 어쩌네 뜨는 기사들을 저도 본 기억이 있었다.

[맞아요. 워낙 호랑이 같은 분이라……. 괜히 어른들 일에도 영향 끼칠까 봐 울며 겨자 먹기로 한다고 한 거죠. 안 그래도 계원이가 진강 씨한테 미안해하는 것 같더라구요.]

“그래…… 요?”

미안이라니 차계원과는 정말 어울리지 않는 단어였다.

[그럼요. 어휴. 아마 대표님한테는 촬영하고 와서 설명 드리려 했나 봐요.]

“그런 거라 다행이네요. 혼자 계속 걱정했었어요.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싶어서요. 설명해 주셔서 고마워요. 건 씨.”

“뭘요. 걱정 말고 쉬셔요. 하하.”

[맞다. 건 씨. 혹시 이진강 씨랑 차계원 씨랑 원래 아는 사이셨어요?]

“아닐걸요? 왜요?”

“그냥……. 사이가 음……. 뭐랄까. 계원 씨가 진강 씨를 딱히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것 같아서요. 저번에 화보 촬영 때 보니까 진강 씨는 계원 씨를 존경하는 것 같던데.”

[글쎄요. 제가 알기로 둘이 딱히 마주쳤거나 안 좋은 감정은 없었어요. 겹치는 촬영도 그때가 처음이었고. 계원이야 뭐 아시잖아요. 그 녀석이 싫어하는 사람이 한둘인가요. 그리고 뭐……. 계원이가 낯도 조금……. 가리고요.]

“계원 씨가 낯을 가려요?”

이서의 목소리에 불신이 가득해진다.

[네, 뭐. 조금. 아주 조금이라 해야 할까요? 하하하. 뭐, 친해지겠죠.]

건의 대답은 어쩐지 조금 떨떠름한 투였다.

“같은 회사 식구끼리니까 잘 지내면 좋을 것 같아요. 아! 그런데 계원 씨 오늘 스케줄은 누가 따라가요?”

[그거 안 그래도 다른 로드 매니저한테 말해 뒀어요. 이번에 들어온 친구 중 하나요. 부탁 좀 했죠.]

“다행이다. 새로 온 친구인데 괜찮을까요? 계원 씨 조금 까다롭잖아요.”

[하하. 항상 그렇지도 않아요. 중요한 건 다 전달해 뒀으니 괜찮을 겁니다!]

“아무튼, 고마워요. 건 씨. 놀러 가는 길에 이렇게 길게 핸드폰 붙잡게 해서 미안해요.”

[아이. 그런 말 하지 마시라니까요. 대신 나중에 회식이나 하러 가요!]

“네네. 좋아요. 맛있는 거로 살게요. 그럼 재미있게 놀고 와요!”

“네. 들어가세요!”

전화를 끊은 이서의 표정이 한결 밝아진다. 그래 사람마다 각자 사정이 있는데 어쩌겠는가. 혹여 차계원에게 또 꿍꿍이속이 있는 건 아닐까 얼마나 찝찝했는지 모른다. 이제 남은 건 진강이었다. 이서가 다시 키패드를 누른다.

* * *

“으아아.”

스피커폰을 끈 건이 아에이오우를 발음하며 입을 푼다. 아직도 입 근육이 경직돼 있는 것 같다.

“히야. 계원아, 나 너무 힘들다. 나 이 정도면 연기 대상감 아니니?”

“유난은.”

뒷자리에서 다리를 꼬고 앉은 차계원이 책을 팔랑팔랑 넘기며 심드렁하게 대꾸한다.

“대체 왜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거냐? 나 심장이 벌렁거려서…….”

“수고했어요. 보너스 줄게요.”

“그리고 너 그 셰이드 회장 얼굴이나 알아?”

“내가 그 얼굴을 왜 알고 있어야 하는데?”

“할아버님은. 인사는 가고?”

“무소식이 희소식이라는 말이 괜히 있겠어요?”

“와……. 그래. 다 그렇다 쳐. 멀쩡한 남의 광고는 뭐 하러 뺏어? 너한테 들어오는 광고도 다 거절하면서……. 대체 무슨 심보야 그게. 정말 이진강한테 원한이라도 있는 거야?”

“쓸데없는 거 궁금해할 시간에 앞 봐요. 신호 바뀌었네.”

“사람이 성실해 보였으니까 그렇지…….”

김건이 백미러로 차계원의 눈치를 보며 말한다. 오다가다 본 이진강은 볼 때마다 인사성이 바르고 매너가 좋았다. 얼마나 예의가 바른지 자신을 볼 때마다 허리 굽혀 인사했다. 덩달아 건의 허리까지 굽혀질 정도였다.

“받을 보너스 반으로 깎이기 싫으면 비위 좀 잘 맞추죠?”

“아무리 좋아도 너보다 좋겠냐. 원래 사람은 다 그렇게. 딱. 멀리서 보면 다. 좋아 보이고 그래요.”

받기로 한 보너스를 한 푼도 놓치기 싫은 건이 최선을 다해 립 서비스를 한다. 하기는 차계원이 사람 싫어하는 데는 이유가 따로 필요 없다. 언제는 괜찮은 사람 아닌 사람 가려 가며 싫어했나. 모두에게 칭송받는 성인도 차계원 앞에 가면 욕을 먹을 수 있다.

“야, 계원아.”

“…….”

“계원아?”

고의로 무시하는 걸 알면서도, 침을 한 번 꿀떡 삼킨 김건이 용기를 내 다시 한 번 부른다. 보너스 반이 깎인다 해도 이건 궁금해서 그냥 못 넘어가겠다.

둘의 관계가 이상하다고 느낀 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당장 현재도 그렇다. 차계원은 조금 있으면 대표님에게 전화가 올 거라며 대본 짜듯 말을 만들어 줬다. 보너스에 넘어가 하겠노라 했으나 영 이상했다.

“왜.”

“그래서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뭔데? 말 좀 해 주면 안 되냐.”

차계원이 어떤 인간인가. 같은 업계 사람들에게도 본인의 이미지가 어떻든 상관도 안 하는 인물이다. 오죽하면 데뷔 이례 차계원은 팬 미팅 그 비슷한 것도 한 적이 없다. 저 더러운 성질머리가 다 까발려질까 봐 가는 회사마다 막아서. 물론 차계원이 그런 걸 할 성격도 아니었다.

그런데 차계원이 오늘 시킨 건 마치 본인의 못된 일을 숨기려 하는 것과 비슷해 보였다.

“어쩔 수 없어요. 난 착하고 여린 사람이거든.”

“여려? 누가?”

빨간불이었기에 망정이지 아니면 사고 낼 뻔했다. 순간 표정 관리에 실패한 김건이 다시 입을 연다. 그래 진짜 궁금한 건 이거였다.

“대표님이랑 무슨 사이…… 야?”

“어떤 의미로 묻는 거예요?”

백미러로 마주친 차계원의 눈이 날카롭다. 마치 김건의 의중을 다 파악해낼 것만 같다.

“의미가 뭐가 있겠냐. 그냥 너 하는 게 이상하잖아. 둘이 같이 지낸다는 것도 그렇고. 저번에도 대표님 너네 집에서 며칠 지내지 않았어?”

자신은 그때 차계원이 남과도 지낼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뭐 연인도 아니고.”

제가 말해 놓고도 웃긴지 김건이 키득거린다. 차계원한테 연인이라니. 팥으로 메주 쑤는 소리다. 십 몇 년을 봐오면서도 이날 이때껏 차계원이 연애하는 건 본 적이 없다. 가능하지도 않을 거다.

“잤어요.”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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