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비도덕적 안락함-54화 (54/100)

#54

김건이 급하게 차를 갓길에 세운다. 끼익하는 듣기 싫은 마찰음이 들렸다.

“자, 잤. 뭐? 잤다고?”

“운전 똑바로 안 해?”

급정차에 책을 떨어트린 차계원이 머리를 쓸어 올리며 성을 낸다. 운전석을 향해 던져지는 책을 건이 두 손으로 받아낸다.

“지금 내가 이해하는 게 맞아? 그 잤다가. 그 잤다는 게 맞는 거야?”

김건의 목소리는 경악으로 물들어 있었다. 차계원이 책을 던진 이유가 책 모서리로 머리 찧고 기절하라는 배려는 아닐까 생각이 든다.

“어.”

“어? 어라고? 너랑? 대표님이랑? 너 게이야? 대표님은? 대표님이 게이야? 아니 그건 그렇다 쳐. 둘이 어떻게? 합의한 거 맞아? 대표님도 좋대? 그렇대? 정말로 괜찮대?”

안 그래도 차계원에게 휘둘리는 게 한눈에 보여 안쓰러웠던 대표님인데 불구덩이로 내던져진 걸 보는 것만 같은 기분이다. 경악을 금치 못하는 김건을 보며 차계원이 피식피식 웃어댄다.

“너 지금 장난치는 거지.”

“네.”

“야! 이 미친…… 놈은 아니고 멀쩡하지만 사람 복장 터지게 하는 차계원아. 장난도 정도가 있지! 그런 사람을 가지고 장난치냐.”

“그런 사람이 뭔데.”

“뭐긴 뭐야. 유들유들하고 순하고. 하긴 아무리 그래도 대표님이 정신 나간 게 아니고서야.”

“애인이에요, 우리.”

“어휴. 됐다. 됐어. 물어본 내가 등신이지 내가 등신이야. 너 나 준다는 보너스 한 푼도 빼지 마라. 아니야, 이건 더 받아야 돼. 심정지 올 뻔했다고. 혈압이 20은 올랐을 거야.”

장난도 안 치던 놈이 무슨 장난을 저리 소름 끼치게 치나 싶다. 온갖 오버를 떨어 댄 건이 심호흡을 한 뒤 다시 핸들을 잡는다.

* * *

“그럼 오늘 그냥 집에서 쉬는 거야?”

[운동 나왔습니다. 찌뿌둥해서요. 잘됐죠. 뭐.]

“내가 너무 미안하다. 진강아.”

[무슨 말씀입니까. 들어 보니 그쪽도 그럴만한데요. 그리고 원래도 약간 주저했었습니다. 제 그릇에 비교해 큰 광고 같아서.]

설명을 들은 진강은 그럴 수 있다며 오히려 이서를 다독였다. 단정한 목소리에 실망한 기색은 없었다. 예의상일지라도 외려 잘됐다는 식의 반응은 이서의 마음을 안심하게 했다.

“네 그릇이 왜. 너 같은 배우가 어디 있어. 캐릭터 독보적이지 노력파지 외모 수준급이지.”

[하하. 쑥스럽게 또 이러십니다. 형 꼭 고슴도치 같아요.]

“고슴도치?”

[예. 고슴도치도 제 새끼는 이쁘다 하지 않습니까. 제가 이렇게 이쁨받는 걸 보니 역시 회사 선택을 잘한 것 같습니다.]

진강이 쑥스럽게 허허 웃는다. 겸연쩍게 머리를 긁적일 진강의 모습이 상상된다.

“세상 사람들이 너 같기만 하면 살 만하겠어.”

[설마요. 저도 그렇게 좋은 사람은 못 됩니다. 형 오늘 출근은 안 하십니까?]

“아. 응……. 쉬려고. 점심은 먹었어?”

[글쎄요. 형 없으니까 입맛도 없어졌나 봅니다.]

“에이 그런 게 어디 있어.”

[진짜입니다. 원래 혼자 식사하다가 몇 번 같이 식사했다고 이제는 혼자 먹는 게 싫습니다. 벌써 익숙해졌나 봅니다.]

“휘준이랑 같이 먹지 그랬어. 걔 회사에 있잖아. 불러내지.”

[그냥요. 오늘 정말 딱히 밥맛이 없었어요. 아. 광고 때문은 절대 아니니까 걱정하시면 안 됩니다.]

“알았어. 알았어. 걱정 안 할게.”

[형은요? 점심 드셨습니까?]

“아니 아직. 그러고 보니 나도 안 먹었네. 이제 먹어야겠다.”

[혹시 집이시면 제가 가도 되겠습니까? 멀지도 않으니 같이 식사하게요.]

“어? 어…… 그게.”

[집까지 가는 건 불편하실까요?]

“아니야. 아니야. 새삼 불편할 게 어디 있어. 그게 사실은 지금 차계원 씨네 와 있거든.”

[차계원…… 선배님 댁이요?]

“응. 사정이 조금 있어서. 집주인 없는 사이에 나가기는 그렇잖아. 나 출근하면. 그때 같이 먹자.”

사실 나가기 그런 게 아니라 못 나가는 거다. 차계원이 외출 직전까지도 어디 가지 말라 당부를 했으니까.

[예. 저는 언제든 상관없습니다.]

“광고는 더 찾아보려고 해. 들어오는 광고는 많아서. 너도 알지? 다만 이왕이면 조금 더 이미지도 맞고, 괜찮은 광고로 선택하고 싶어서 그래.”

[알죠. 그리고 재차 말씀드리지만,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여유 있게 고르는 게 저도 더 좋아요. 그래도 신경 써 주시는 건……. 좋으니까……. 계속 신경 써 주십시오.]

“당연하지. 우리 회사 배우들 신경 안 쓰면 누구를 신경 써. 너무 오래 통화했네. 나도 점심 먹어야겠다. 운동 열심히 해. 점심 꼭 챙겨 먹고.”

[예. 형. 점심 맛있게 드십시오.]

“응.”

전화를 끊은 이서가 소파 위로 벌렁 드러눕는다. 회사를 안 가면 뭐 하나. 에너지 소모는 똑같은데.

징.

그때 드러누우며 내던져 둔 핸드폰이 진동하면서 메시지가 왔음을 알린다. 차계원이었다.

[점심 먹어요. 굶지 말고.]

답장을 할까 잠시 고민한 이서가 핸드폰 화면을 끈다. 식사는 차려져 있었지만, 먹기가 싫었다.

“광고……. 찾아볼까.”

차계원은 회사에 마케팅 팀을 따로 만들었다. 배우들에게 들어오는 컨택은 거의 그 팀이 관리했는데, 광고 화보같이 장기적인 시일이 소요되지 않는 건들은 특히 그랬다. 때문에 그 관련해서 제가 직접 하는 일은 없었다. 듣기로 들어오는 건들이 많다는데 어째 성사되는 계약은 없었다.

“찾자.”

이서가 몸을 일으킨다. 누워있어 봐야, 되는 것만 없다. 더불어 집도 어떻게 되는지 자세히 알아봐야 했다. 정말 차계원 말대로 계속 이 집에서 머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갈 곳이 없다는 사실은 이서를 초조하게 만들었다. 이서가 차계원이 만들어 놓은 제 방으로 발길을 돌린다.

* * *

“……없잖아.”

이서는 제 집과 똑 닮은 차계원의 방을 전부 뒤졌다. 필기구나 노트 등을 찾으려는 거였다. 세 시간 가까이 머리를 꽁꽁 싸매고 검색 끝에 찾은 방법은 개인 회생 절차였다. 가능할까 모르겠으나 그 외에는 방법이 없다. 다만, 무늬뿐이기는 해도 한 회사의 대표라는 사실과 이 일이 새 나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꺼려졌다. 그래도 시도 가능한 방법들을 다 찾아봐야 하기에 어디에 적어 두기라도 하려 했는데 마땅한 곳이 없다.

이서는 아직도 중요한 일들은 직접 손으로 적어 둬야 하는 습관이 있었다. 핸드폰 메모는 괜히 불편하고 눈만 아팠다. 그런데 양말 한쪽까지 다 가져다 둔 곳에 펜이 없었다.

“차계원 씨한테 없나.”

차계원의 방은 침대와 협탁, 스탠드가 전부다. 그는 일전에 제 집에 서재가 없다고 했었는데, 아무래도 거짓말 같았다. 의외로 차계원은 짬이 날 때면 독서하는 걸 즐겼다. 그런 사람이 이렇게 큰 집에 사는데 책장이나 책상 하나 안 뒀을까.

“집 안을 뒤지기는 미안하고.”

그래서 어제도 신발 하나 못 찾았다. 차계원의 집은 필요 이상으로 넓고 휑했다.

“옆방만……. 가 볼까?”

옆방 정도야 괜찮지 않을까. 지금 있는 이 방의 바로 오른쪽에도 방문이 하나 있었다. 팔이 다쳐 며칠 이곳에 지낼 때, 차계원이 그곳을 들락거리는 걸 몇 번 본 기억이 있다. 이서가 도둑마냥 까치 발을 들고 걸어가 살살 방문을 열었다.

“이럴 줄 알았어. 서재 맞잖아.”

방문을 연 이서는 다행이라는 생각과 황당함이 함께 들었다. 역시 차계원은 믿을 만한 인물이 못 된다.

“다른 서재가 필요가 없겠구만.”

서재는 딱 차계원의 침실만큼 넓었다. 커다란 두 개의 책장에 책이 빈틈없이 꽂혀 있고, 고급스러워 보이는 책상 위에는 필기구와 노트북, 모니터, 스텐드 등이 있었다. 책 종류도 다양해 잡지나 외화까지 꽂혀 있었다.

“뭐가 이리 어두워…….”

특이한 점은 유난히 거실이나 차계원의 침실보다 어둡다는 거였다. 다른 곳은 가구나 벽지에 밝은 회색 톤이나 흰색이 많이 사용되었는데 이곳은 커튼부터 시작해서 소품까지 어두운 톤으로 꾸며져 있었다.

“이거면 되겠다.”

그 어두컴컴한 박쥐 굴 같은 곳에서 이서가 적당한 펜과 종이를 골라낸다. 이 정도면 쓰고 다시 가져다 놔도 무방할 거다. 기분이 좋아진 이서가 들어올 때처럼 깨금발로 나가려 할 때였다.

“어…….”

이상하게 이름 모를 무언가가 마음에 걸렸다. 뒤통수를 누군가 잡아당기는 느낌이다. 마치 손가락의 거스러미처럼 거슬리는. 이서가 나가려던 몸을 돌려 차계원의 책상 앞에 선다.

“어……?”

모니터 위에 작은 포스트잇 하나가 붙어 있었다.

“…….”

그 위에는 휘날린 듯한 글씨체로 메모 하나가 쓰여 있다.

“최두한.”

어디서 들어 본 이름이다. 아는 사람 이름은 아닌데 익숙한. 몇 번 혼잣말로 이름을 되새기듯 발음해 본 이서가 핸드폰을 꺼낸다. 발음이 탁한 느낌이 드는 이름을 분명 본 기억이 있다.

“…….”

어디더라. 연락처를 뒤져 봐도 없었다. 불현듯 이서가 자주 거래하는 은행의 어플에 접속한다. 로그인하는 동안 이유 없이 심장이 쿵쿵거렸다. 최근 기록을 불러오자 이름 세 글자가 유난히 눈에 띈다.

“이것도 최두한…….”

명치 끝에서 불길한 예감이 올라온다. 쿵쿵거리던 심장이 더 크게 뛰기 시작했다. 이서가 상세 버튼을 눌러 계좌 번호를 확인한다. 며칠 전 이자를 보냈던 대부업체 사람의 계좌를.

“223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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