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비도덕적 안락함-55화 (55/100)

#55

Planning or Strategies

이서가 깨어난 건 한참 전이지만 몸을 일으키지는 않았다. 눈을 느리게 깜빡일 때마다 전등도 같이 깜빡이는 것 같다. 오늘은 날이 흐렸다. 칼바람과 함께 내리는 비는 창문을 두드렸다.

“뭐야. 일어났었어요?”

씻고 온 계원이 침실로 들어온다.

“…….”

“일어났으면 내려와요. 밥 먹게.”

“…….”

“대표님.”

“응.”

“밥 먹자고.”

“……나 씻고. 너 먼저 먹어.”

“씻고 와요. 그럼.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차계원이 다시 나가는 걸 확인한 이서가 둥글게 몸을 한 번 말았다가 일어나 바닥에 발을 디딘다. 바깥의 비를 흠뻑 맞은 것처럼 몸과 마음이 무겁다. 씻는 것 하나 먹는 것 하나가 커다란 책무라도 되는 양 귀찮았다. 결국, 단순한 샤워를 하는 데 한 시간가량을 소요하고 나서야 식당으로 내려간다.

“이제 와요?”

“……미안.”

“됐으니까. 앉아요.”

식탁에는 감자수프와 로메인 샐러드, 부드러운 빵이 먹기 좋게 놓여 있었다. 처음 차계원네 집에서 식사할 때는 육류 위주의 식단이 많았는데, 점차 바뀌었다. 이서로서는 다행이었다. 요즘에는 육류가 아니라 가벼운 걸 먹어도 속이 더부룩했다.

“하.”

한참을 깨작깨작하던 이서 앞에서 조용히 식사하던 계원이 짜증 섞인 한숨을 내쉰다. 이서가 수프를 뜨던 나무 숟가락을 그러쥔다.

“무슨 일 있어요?”

“아니…….”

“그런데 왜 이렇게 못 먹어요?”

“비가 와서……. 입맛이 없나 봐.”

“오늘만 그러는 거 아니잖아요.”

“미안.”

차계원의 인상이 확 굳어진다. 뭐라 말하려 입을 열다 꾹 닫는다.

“그래도 먹어요. 제작사 미팅 가야 하잖아요.”

“그거……. 나 안 가면 안 될까.”

“뭐?”

“애초에 내가 필요한 자리도 아니잖아.”

“같이 가자고 사정사정하던 거 기억 안 나요?”

“……나.”

“나는데 왜 헛소리해요.”

“…….”

“당일에 취소되는 거 보기 싫으면 다 먹고 나서 준비해요.”

수저를 내려놓은 차계원이 부엌 밖으로 사라진다. 자신이 차계원의 서재에서 본 건 대부업체 사장의 계좌였다. 반복되는 번호가 많아 신기하다고 생각한 계좌. 대부업체를 차계원이 알고 있다는 건 이상하지 않다. 제 집 앞에 대부업체 직원들이 찾아와 그 난리가 났던 일도 그가 정리했고. 차계원은 무서울 정도로 사사로운 것까지 알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계좌 번호까지 알고 있다는 건 말이 안 된다. 아주 많이. 게다가 그 계좌는 대부업체 사장이 바뀐 계좌라며 얼마 전에 알려 준 것이다. 막말로 넘치는 게 돈인 차계원이 그들에게 빚을 지지는 않았을 거 아닌가.

이럴 때는 제 무던한 성격이 원망스러웠다. 차계원은 왜 제 사사로운 정보까지 알고 있을까. 어떻게 딱 압류 딱지가 붙을 때 왔을까. 정말 작품 때문이면 문자 한 통 주면 됐을 텐데. 그의 성격대로 멋대로 통보하고 매니저를 통해 계약서를 돌려보내면 될 일이다. 어떤 가설을 세워도 설명 안 되는 상황에서 이 모든 걸 이해시켜 줄 가설은 딱 하나다.

차계원은 제게 집착한다. 비정상적으로.

모른 척하고 부정했던 실체가 한 가닥 잡히기 시작한다. 자꾸 자신을 본인의 집에 머물게 하려 했던 것도. 제 회사에 들어오려 했던 것도 그래서라면 앞뒤가 맞았다. 이유야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3년 전 일이 자존심 상했거나, 처음 추측처럼 마음대로 휘두를 대표와 바지사장이 필요했거나, 섹스가 마음에 들었거나.

‘셋 다일 수도.’

그래 어떤 이유에서건 차계원은 제게 집착하고. 그 결과 중 하나로 대부업체의 계좌 번호를 알고 있던 거다.

‘왜? 그걸로 뭘 하려고?’

이서가 제일 속 끓이는 부분은 그 부분이었다. 차계원에게 물어보고 싶지는 않았다. 싫다기보다 무서웠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그날 자신은 차계원이 와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의 절망을 별일 아닌 것처럼 토닥여 줘서, 작품을 엎겠다는 말을 최소한 제가 다 울고 난 뒤에 말해 줘서. 그래도 갈 곳 없는 저를 억지로나마 데려와 줘서. 그래서 다행이라고.

그런데 왜. 차계원은 왜 알고 있을까. 계좌 밑에는 비밀번호도 함께 적혀 있었다. 뭘 하려던 걸까. 혹시.

“하아…….”

깨작대던 이서가 음식들을 가져가 음식물 처리기에 쏟아붓는다.

* * *

“저는 계원이 여태 했던 작품 중에 이게 제일 기대돼요. 계원아 너는?”

김건은 어느 때 보다 활기찼다. 저번 영화는 말도 많고 탈도 많았다. 한태미와 차계원의 불화설이 사석 자리에서나 뒷말로 떠돌았고, 시사회를 펑크 낸 탓에 마음 졸이다 못해 타들어 갔다. 그리고 차계원의 전속 매니저, 즉 프리랜서로 10년 넘게 일하다가 회사 소속이 된 후의 첫 영화니 제가 다 설렜다.

“…….”

“대표님은요? 계속 추천하신 영화였잖아요. 기대되시죠! 그죠!”

“네……. 기대되네요.”

“있잖아요. 저는 요새 심심하면 댓글들 읽어요. 영화 기대된다고. 박스오피스 1위일 거라고. 다들 그냥.”

김건은 쉴 새 없이 떠들었다. 설렘과 기대 때문도 있었으나, 차 안의 분위기 때문에도 그랬다. 건이 차계원을 픽업하러 갔을 때 대표님은 그 세 발짝 뒤에서 따라 나왔다. 차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둘 다 뒷좌석 양옆에 앉아 대표님은 창밖만 봤다. 차계원도 심기가 불편하다는 분위기를 폴폴 풍겨 왔다.

“흠흠. 아. 진강 씨는 도착해 있대요. 휘준 씨도 오려나?”

“아뇨. 휘준이는 안 와요. 제가 가니까 굳이 있지 않아도 될 것 같아서요.”

“그쵸. 그쵸. 벌써 다 왔네요. 내리자! 우리 내려요. 대표님.”

오늘 미팅은 케이뉴 회사에서 진행하기로 했다. 김건이 부러 더 오버하며 안전벨트를 푼다. 정말 숨 막혀 죽기 딱 좋은 공기였다.

“먼저 올라가요. 나 통화 좀.”

차계원이 핸드폰을 보며 손을 휘휘 젓는다. 건이 백이서를 이끌고 건물로 들어가려 한다. 차계원만 멀어져도 숨통이 좀 트일 것이다.

“어! 그래. 그래! 볼일 보고 와. 저희 올라가요. 대표님!”

“네.”

“대표님, 혹시 계원이랑 싸우셨어요?”

차계원과 좀 멀어질 즈음 김건이 속닥속닥 묻는다.

“예? 아뇨. 계원 씨와 싸울 일이 있겠어요. 제가 상대나 되나요.”

“어휴, 그런데 분위기가 싸하고 막.”

엘리베이터 앞에 선 김건이 제 목 뒤를 마구 문지른다. 이서가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른다. 오늘 미팅하기로 한 장소는 9층이었다. 엘리베이터는 맨 꼭대기에 가 있었다.

“그래도 두 분 많이 친해지셨나 봐요. 같이 지내기도 하시고.”

“글쎄…… 요. 가까워진다고 좋은 것도 아니고.”

“친해지면 좋죠. 허물없고. 둘이 상성이 잘 맞나 봐요. 얼마 전에는 계원이가 장난도 치더라니까요. 안 그러던 앤데.”

“장난이요?”

“네. 대표님이랑 사귄다고. 웃기죠.”

마구 웃는 김건 옆에서 이서의 표정이 미묘하게 굳어진다. 그걸 들키지 않기 위해 올라가는 입꼬리가 부자연스럽다.

“아하, 하. 재미있네요. 장난.”

“어휴. 말도 마세요. 이렇게 들으니까 재미있는 거지 저 그날 완전 팔짝 뛰었다니까요. 깜빡 넘어갈 뻔해서.”

“하하. 그럴 리가 없잖아요. 너무 말도 안 되는 일……. 이네요.”

“안 그래도 계원이가 장난이라고 하더라고요. 저 기겁하는 거 다 구경해 놓고 장난이래요. 저런 심보가 어디 있어요?”

“네. 장난이요……. 장난.”

이서가 엘리베이터 층수를 확인한다. 뭐 때문인지 아직도 꼭대기 층에서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대표님은 애인 없으세요? 통 그런 소리를 못 들었네요. 휘준 씨도 솔로던데.”

“없어요. 건 씨는 있어요?”

“저도 없죠. 일도 바쁘고. 헤어진 지도 그렇게 오래 안 됐어요. 대표님은 마지막 연애가 언제인데요?”

“음……. 꽤 됐어요. 4년 전, 인데……. 모르겠네요. 그게 연애가 맞았는지.”

아마 4년 전이 아니라 처음 사귄 그때도 연애는 아니었을 거다. 연애는 자신 혼자만 했다.

“예에? 그럼 4년 동안 솔로셨던 거예요? 왜요? 대표님 인기 많을 것 같은데.”

연애라면 신물이 난다. 고작 한 번뿐인 연애로 이런 판단을 하기는 섣부르지만, 이서에게 연애는 충분했다. 언제고 등 돌릴 수 있는 게 연애라면, 가차 없이 상대를 밑바닥으로 버릴 수 있는 게 연애라면 필요 없다.

“아니에요. 별로 없었어요.”

“거짓말. 말도 안 돼. 우리 회계 보는 친구 있죠? 그 친구도 대표님 잘생겼다고 노래를 부르던데?”

“아하하……. 감사하네요. 이따가 간식이라도 돌려야겠어요.”

“진짜예요. 아! 소개팅 받아 보실래요? 소개팅?”

“저는 됐어요. 정말 그런 데는 젬병이라. 인기는 계원 씨가 많죠. 전 국민이 팬이잖아요.”

“인기만 있으면 뭐 해요. 성질머리가 말도 못 하는데. 그때 장난칠 때도 뭐라고 처음 말했는지 아세요?”

“……뭐라고 했는데요?”

“잤대요, 글쎄.”

“잤다…… 고요?”

“아. 이거 말하면 좀. 그런가. 원래 음담패설 같은 거 안 합니다. 안 하는 녀석인데. 그냥 심심했나 봐요. 저 놀라게 하려고. 죄송해요. 제가 말실수 한 건가요?”

순간 벌게지는 백이서의 얼굴을 확인한 김건이 황급히 수습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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