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비도덕적 안락함-56화 (56/100)

#56

“괜찮아요. 성인인데 그런 장난 칠 수 있죠.”

괜찮다며 웃는 이서에게 안심한 김건이, 그때의 자신이 어땠는지 표정까지 더 익살맞게 바꾸며 재현한다.

“그쵸? 그러니까 제가 얼마나 놀랐겠어요? 입이 쩍 벌어져서 침까지 흘릴 뻔했어요.”

“놀랄 게 어디 있어요. 어린 애도 그 말은 안 믿겠는데요.”

“왜 안 놀라요. 사람 일 모르는 건데. 진짜 잤을 수도 있고 그래서 사귀는 건가? 순간 그 생각 했다니까요. 차계원이 언제는 상식선에서 행동하게요?”

“그래도 말도 안 되죠. 아주 만약에 잤다고 해도 사귀거나 그럴 리가 없잖아요. 그런 거로 사귈 필요도 없고.”

괜스레 찔린 이서가 일부러 태연함을 가장한다.

“그게 뭐예요. 대표님 나쁜 남자였어요? 소개팅 취소예요.”

“우리가 스무 살은 아니니까요. 그리고 전 연애 안 한다니까요.”

“에이. 거짓말. 거짓말. 이래 놓고 애인 사귀려 그러죠? 사실 숨겨 놓은 부인 있는 거 아니에요?”

“하하. 애인은커녕 연락하는 사람도 없네요. 엘리베이터 왔네요. 올라가요.”

* * *

미팅은 순조롭게 끝났다. 모두 분위기가 좋았고, 차계원 또한 호의적이었다. 출연 배우들이 모두 모이는 자리가 아니었기에, 심도 높은 이야기들도 이어졌다.

본격적인 촬영은 세 달 후였다. 그때까지 전체 미팅과 대본 리딩 등 할 게 많았다. 이진강과 차계원 모두 당분간은 해당 작품에만 집중할 수 있으니 잘된 일이었다.

“가요.”

“응.”

“계원이랑 대표님 바로 집으로 가시죠?”

“어.”

“대답 좀 길게 해라. 근데 넌 아까 어디로 올라온 거야? 우리보다 빨리 왔던데.”

“계단. 비슷하게 도착했어요.”

제작사 측과 감독, 작가가 나가는 걸 배웅하고 백이서와 차계원도 갈 채비를 했다. 회의실을 나가자 이진강이 그 뒤로 따라온다.

“형! 바로 가십니까?”

“어? 응. 오늘 고생했어.”

“고생이랄 게 있겠습니까. 형이 수고하셨죠. 선배님도 수고하셨습니다.”

“…….”

차계원은 정면의 엘리베이터만 본 채 대꾸가 없다. 그의 자세는 아주 꼿꼿했고 옷 태 또한 훌륭했는데 이상하게도 삐딱한 느낌이었다.

“계원이 오늘 피곤해서 저래요. 진강 씨는 볼 때마다 훤칠하네. 부럽다, 부러워. 둘 사이에 있으니까 나는 오징어야.”

“매니저님도 멋있으십니다.”

“세상에 대표님. 진강 씨가 저한테 거짓말하는데요?”

“아하하…….”

이서가 셋 사이에서 어색하게 웃는다. 그래도 김건이 있어서 다행이었다. 그는 항상 분위기를 밝게 만들어 준다.

“가죠.”

어색하게 웃고만 있는 이서를 차계원이 잡아당긴다. 그리고 그때 이진강의 손이 빠른 속도로 이서의 팔을 잡는다.

“바로! 가십니까?”

“네. 이진강 씨만 아니면 바로 갈 텐데요.”

그의 음성에서는 딱딱하고 냉기가 흘렀다. 누가 들어도 싸우자는 목소리라 백이서와 김건이 얼어붙으며 서로 시선을 교환한다. 이진강은 눈치가 없는 건지 없는 척을 하는 건지 이서에게 시선을 고정하며 말을 건다.

“오늘 저희 밥 먹기로 했었는데요……. 어제 형이 내일 출근하면 먹자고 하셨잖습니까.”

평소의 딱딱하던 모습 같지 않게 시무룩한 분위기를 내는 진강이 서운하다는 기색을 조금 내비친다.

“코흘리개 꼬마도 밥은 혼자 먹어.”

고개를 치켜든 차계원이 사선으로 이진강을 내려다보며 말한다. 내리까는 시선에는 업신여기는 태도가 박혀 있었다.

“같이……. 먹으면 더 맛있습니다. 선배님도 함께 자리하셔도 좋습니다.”

진강은 굴하지 않은 채 말을 이었고. 그건 차계원의 심기를 건드리기에, 충분했다. 계원의 시선이 백이서의 팔꿈치 조금 아래쪽을 잡고 있는 이진강의 손에 꽂힌다. 굵고 큰손은 딱 봐도 힘 있게 백이서의 팔을 쥐고 있었다.

“밥 먹다 체하기는 싫어서. 놔요. 그거.”

“형, 선배님 집에서 지내는 건 어떻게 되신 겁니까? 무슨 일 있으신 건…….”

“별일은 없어 그냥…….”

“씨발. 소식 참 빠르네.”

어이없다는 듯 비소를 머금은 차계원이 말을 끊는다. 끝까지 놓지 않고 있는 저 손모가지를 분질러버리고 싶었다.

“계원 씨!”

“저는 그냥 걱정돼서 여쭈어 본 겁니다.”

지속적인 하대와 멸시하는 듯한 태도에 이진강의 얼굴 근육이 딱딱하게 굳는다. 진강은 원래도 선이 굵고 다부진 생김새라 표정을 굳히니 그 눈빛과 분위기가 험악했다. 당황한 건이 엘리베이터 버튼을 반복해서 누르고, 이서가 하지 말라는 식으로 계원의 손목을 잡는다.

“낄 데 못 낄 데 구별하고 달려들어, 앞뒤 분간 못 하는 개 새끼인 거 티 내지 말고.”

이진강의 손이 차계원에 의해 거칠게 내쳐진다. 낮게 내려앉은 분위기가 사나웠다.

“진강 씨! 나랑 먹어요. 나랑! 나도 밥 안 먹었어.”

마침 엘리베이터가 멈추고, 이서의 팔을 놓친 진강을 김건이 부여잡는다. 이진강은 모르겠으나, 김건의 눈에는 차계원이 지금 온 인내심을 끌어모아 참는 중이라는 게 보였다.

“차계원 씨, 왜…….”

“타죠.”

강한 힘으로 백이서의 어깨를 끌어당겨 태우려 하는 차계원의 목에는 핏대가 돋아 있었다. 그런 차계원의 어깨를 이진강이 잡는다. 그의 한 손은 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히지 못하게 막고 있었다.

“진강아. 밥 다음에 먹자. 어? 미안해.”

안 되겠다고 판단한 이서가 진강을 달랜다. 그러나 진강은 시선만 이서 쪽에 두고 차계원을 향해 입을 열었다.

“선배님. 이거 예의 아닌 것 같습니다.”

“예의?”

“예. 예의 말입니다. 저는 형에게 여쭈었는……. 윽.”

“악!”

순식간이었다. 말리려는 이서를 엘리베이터 안쪽으로 밀어낸 차계원이 반만 몸을 돌려 이진강의 손을 떼어내 꺾었다. 자신이 누군가에게 힘으로 밀릴 거라 생각지 못한 진강의 이마에 핏줄이 돋아난다. 무자비하게 꺾이는 중지와 약지가 신음이 나올 정도로 아렸다.

“난 형이라는 단어가 참 좆같아.”

손목까지 꺾인 이진강을 문밖으로 밀쳐낸 차계원의 비웃음이 엘리베이터 문 사이로 사라진다.

* * *

집으로 돌아가는 길의 운전은 차계원이 했다. 가는 내내 둘은 말이 없었고 이서는 입술만 짓씹었다. 주머니에 넣어 둔 핸드폰이 징. 징. 울린다. 끊겼다가 다시 이어지는 진동에 이서가 차계원의 눈치를 한 번 본 후 핸드폰을 꺼낸다. 역시나 발신자는 이진강이었다.

“진강…….”

파삭.

그때, 말 한마디가 채 끝나기도 전에 빼앗긴 핸드폰이 밖으로 던진다. 부서지는 소리가 가볍다.

“진짜 왜 이래!!”

“내려요.”

“남의 걸 마음대로 던져? 안에 뭐가 있을 줄 알고!”

“사 줄 테니까. 내려. 도착했잖아요. 우리 집.”

백이서가 숨을 씩씩 몰아쉰다. 화를 내고 싶은데, 차계원의 얼굴이 꼭 누굴 죽이기라도 할 것 같은 얼굴이라 몸만 훽 돌려 차 안을 빠르게 빠져나간다. 집 안에 들어서자마자 도망치듯 신발을 벗고 올라가려는 이서를 계원이 붙잡는다.

“같이 올라가요.”

“왜 그렇게 화를 낸 거야? 이해가 안 가.”

“대표님은 왜 화났는데요.”

“당연한 거 아니야? 회사에서 별것도 아닌 일로 그렇게 욕을 하고……. 좀……. 좀 참을 수 있었잖아.”

차계원은 아직도 화가 나 보였다. 그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머리를 쓸어 올린다. 꽉 깨무는 치아에서 빠드득 하는 소리가 난다. 힘을 준 그의 턱뼈가 평소보다 도드라져 나오는 게 보였다.

“난. 매일 참고 있어요.”

짓이기듯 나오는 음성이 매섭다. 그 얼굴이 정말 화를 참는다는 듯해 이서의 표정이 황량하게 변한다.

“참아? 참는다고? 네가? 뭘 참는데? 뭘 참았어? 다 마음대로 하잖아.”

“하. 지금…….”

“…….”

“지금 내가 이진강한테 조금 그랬다고 나한테 화내는 거예요?”

“그거 때문이 아니잖아! ……됐어.”

백이서가 더 말할 가치도 없다는 듯 몸을 돌린다. 계단을 올라가기 위해 첫 번째 계단을 막 밟을 때, 등 뒤에서 차계원의 태연자약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게 아니면. 내가 계좌 알고 있어서?”

“무슨 소리야.”

“알잖아요.”

“……씻을게.”

차에서부터 깨문 아랫입술이 결국 터지고 만다. 명치 부근이 두근두근 요동친다. 이다음으로 차계원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불안했다. 며칠을 고민하면서도 차마 묻지 못했다. 이서가 달달 떨리는 손으로 욕실 문고리를 돌린다.

탁.

“놔! 악!”

열리려는 문을 억세게 닫은 차계원이 백이서의 멱살을 움켜쥐고 어딘가로 향한다. 빠르게 끌려가는 몸에 발이 꼬여 허둥댔다. 도착한 곳은 그의 서재였다.

쾅.

사납게 열린 문이 벽에 부딪힌다.

“놔……! 놔 봐. 놓으라고!”

제 멱살을 잡은 차계원의 손을 할퀴고 발로 다리를 차대도 그는 꿈쩍하지 않았다. 마치 단단한 돌벽을 보는 것 같다.

그가 이서를 무시하고 한 행동은 서재의 모니터를 켜는 것이었다. 흑백의 화면이 모니터를 가득 메운다.

“하아……. 하아…….”

제 멱살을 붙잡고 있는 손을 할퀴던 이서가 힘을 빼고 모니터에 시선을 고정시킨다. 소리 지른 목이 따가웠다.

“…….”

“씨씨티비……. 있었어?”

“서재랑 마당, 현관만요.”

“하. 하하.”

멱살을 놔준 계원의 어조는 어떠한 동요도 없이 평온했다. 그가 대부업체 사장의 계좌 번호가 적힌 포스트잇 떼서 이서의 눈앞에 달랑달랑 흔든다. 힘이 빠져 주저앉으려는 허리를 잡은 계원이 던지듯 의자에 앉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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