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비도덕적 안락함-60화 (60/100)

#60

이진강이 찝찝함의 원인을 확신하게 된 건 다음 날 오후였다.

“이런 일이 생기기도 하는군요.”

담담하게 중얼거리는 진강 앞에서 휘준이 난감한 얼굴로 눈썹을 문지른다. 그 옆에 앉은 김건도 표정이 좋지 못했다.

“이걸 어떻게 해야 하죠? 아니, 참나.”

김건은 케이뉴에 정직원으로 들어온 후, 차계원의 개인 매니저 역할 외에도 치프 매니저의 역할을 맡게 됐다. 한마디로 팀장직이었는데, 소속 배우들의 작품을 정하거나 전체적인 스케줄 조정을 담당하는 업무가 주였다. 그러니, 소식을 가장 먼저 들은 사람 역시 그였다.

“전화 끊자마자 기사가 뜨더라니까요.”

“저는 기사로 알았습니다.”

“그럼 휘준 씨도 봤죠? 기사 타이틀. 스케줄이 맞지 않아 출연 불발이라니요? 미친 거 아니에요? 지들이 파투 낸 거면서!”

콧김까지 뿜으며 열변을 토하던 김건이 사무실 테이블을 탕탕 내리친다. 다시 생각해도 분했다.

“아침에 제작사 전화 받고 얼마나 기가 막혔는지! 혀가 꼬여서 욕 못 해 준 게 한이에요! 한!”

“하하. 잘하셨습니다. 좋게 끝내는 게 낫죠. 얼굴 붉히는 것 보다.”

“아이고야, 진강 씨. 지금 무슨 소리예요. 얼굴은 그 인간들 때문에 붉히게 되는 거죠!”

영화 제작사 측에서 연락이 온 건 아침이었다. 그들은 다짜고짜 캐스팅이 무산됐다고 알려 왔다. 이진강이 맡게 된 강무 역을 다른 배우가 맡게 됐다는 것이다. 이유는 투자자들의 반대였다.

“이미지가 안 맞는다는 게 말이 되냐고요. 언제는 이미지가 딱 들어맞는다고 캐스팅해 놓고서?”

“그나마 저는 김건 씨 통해 들어서 다행입니다. 휘준 씨처럼 기사 통해 알게 됐다면 서운할 뻔했습니다.”

“서운이요? 그게 다예요? 화가 나야죠, 화가!”

“보통 이런 일이 가끔 있습니까? 경험해 본 적이 없어서.”

휘준이 계약서를 뒤적거린다. 태미와 성아만 있을 때는 작품 활동이 워낙 없어 겪어 보지 못한 일이었다.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도 감이 안 잡혔다. 계약서를 아무리 꼼꼼히 살펴봐도 별다른 방도가 없었다. 촬영이 들어간 것도 아니고, 제작 회의 한 번 한 게 전부다. 계약금도 전부 돌려받았다.

“물론 대본 리딩 단계나 촬영 들어가기 전에 배우가 바뀌는 경우는 종종 있어요. 그래도 이렇게 일방적으로 결정하는 건 도의가 아니죠. 멋대로 기사 띄우는 일도 드물고. 상의를 해야죠. 상의를!”

“차계원 선배님은 그대로 출연하시는 거죠.”

“네? 네. 계원이야 뭐. 하하.”

순간 건이 머쓱하게 고개를 돌린다. 이진강 앞에서 차계원만 예정대로 진행될 거라고 전하기가 난처했다. 엘리베이터에서의 기 싸움은 누가 봐도 살벌했다. 그날은 정말 큰 싸움으로 번질까 봐 마음이 철렁했었더란다. 차계원의 성격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더욱 그랬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제작사에게 화가 나면서도 은연중에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둘이 마주치는 일이 늘어날수록 그때와 같은 일이 생길 가능성도 커질 것이다. 만약 둘 중 한 명이 제외돼야 한다면 그건 차계원이 아니라 이진강이어야 한다. 이기적이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차계원 옆에서 보낸 시간이 십수 년이었다.

“차계원 씨가 주연이니 강력하게 뭐라 하기도 그렇습니다. 제작사 측과 우리는 계속 마주칠 테니까요.

서휘준의 말에 안 그래도 딱딱한 진강의 얼굴이 더 어두워진다. 캐스팅에서 밀려난 것 때문은 아니었다. 다만, 마음 한구석에 있던 찝찝함의 크기가 점점 부피를 늘려 갔다.

“대표님도 아십니까?”

“오늘 아침에 통화하면서 말씀드렸습니다. 놀라시더라고요.”

“그렇습니까.”

벌써 두 건의 광고와 한 건의 영화가 날아갔다. 결론적으로 자신이 이 소속사에 들어와서 맡은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뜻이었다.

광고나 영화 정도야 엎어져도 괜찮다. 어차피 연예계 활동에 어떤 목표랄지, 커다란 긍지 같은 건 없었다.

“원래 이번 주에 전체 미팅이 있었죠.”

바로 어제, 제작사 측에서 직접 휘준에게 연락이 왔었다. 통화를 한 상대는 매우 호의적이었고, 주의할 점을 세세하게 설명해 줬었다. 캐스팅과 관련된 어떤 이야기도, 투자자들의 반응에 대해서도 듣지 못했다.

“매니저님.”

“네?”

“차계원 선배님 집 주소 좀 얻을 수 있습니까?”

진강의 찝찝함이 한 방향을 향해 흐르고 있었다.

* * *

팔랑팔랑 넘겨지는 대본의 속도가 빠르다. 차계원이 소파에 기대 대본을 읽고 있었다. 한쪽 다리를 세우고 다른 쪽 다리는 길게 뻗은 자세가 권태로웠다. 멀지 않은 발치에서 이서가 그 주위를 맴돈다.

“…….”

그 인기척을 느낀 계원이 이서에게는 들리지 않을 정도로 싱겁게 웃는다. 한참이나 뒤에서 서성이는 움직임이 얼마나 어설프고 어설픈지.

“이리 와요.”

“어, 어? 으응.”

백이서가 꾸물꾸물 소파 쪽으로 다가온다. 실내용 슬리퍼를 질질 끄는 소리가 났다. 손에는 얼마 전 계원이 새로 장만해 준 핸드폰이 꼭 쥐여 있었다. 그 모습이 꼭 일용할 양식을 쥐고 있는 햄스터 같아 계원의 미소가 짙어진다.

“읏!”

계원이 미적대는 몸을 끌어다 제 무릎 위에 앉힌다. 대본이 바닥으로 툭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대표님 쥐새끼예요?”

“쥐는 약간 심하잖아…….”

그가 백이서를 품에 밀착시킨 후, 매끄러운 목덜미에 코를 부빈다. 기어들어 가는 미약한 목소리가 즐거웠다. 어제 먼저 까무러치기에 깨어나면 조금 괴롭힐 요량이었는데, 아무래도 글렀다. 목덜미에 아직도 선명한 자신의 잇자국을 엄지로 훑었다. 곧고 흰 목에 듬성듬성 물든 울혈이 마음에 들었다.

“그럼 왜 그렇게 낑낑대요. 좆이라도 물려 줄까요?”

다정한 목소리에서 나오는 말이 상스럽다. 헐렁한 바지 안으로 커다란 손이 쑥 들어왔다. 계원이 보드라운 이서의 엉덩이를 양손으로 터트리기라도 할 듯이 쥔다. 밀가루 반죽을 주무르듯 만지다가 이윽고 잡아 벌리자, 놀란 이서가 품 안에서 빠져나가려 했다. 퉁퉁 부은 아래가 면바지의 천에 쓸려 따가웠다.

“으, 왜 이래.”

“이러자고 맴돈 거잖아요.”

“아니야!”

“아님 말고.”

계원의 목소리는 유난히 더 나른하고 여유로웠다. 그의 손이 허리선을 따라 올라간다. 백이서를 무릎에 앉혀 놓으니 눈높이가 맞아 잔 떨림이 더 잘 보였다.

“아니라 했잖아. 계속 더듬지 마……. 물어볼 거 있어서 그런 거였는데.”

백이서는 눈도 머리통도 죄 둥글었다. 눈꼬리가 올라간 둥근 눈매가 호소하듯 잘게 떨린다. 그렁그렁한 눈동자가 일품이다.

“그랬어요? 뭐 물어보고 싶은데요?”

다 들어주겠다는 양 묻는 음성에 오동통한 입술이 머뭇거리다가 열린다.

“우리 하기로 한 영화 있잖아. 진강이 캐스팅 무산됐다고 전화 받아서…….”

“걔 연락 안 받기로 했잖아요. 또 말 안 들었어요?”

“휘, 휘준이가 알려 줬어.”

단박에 매섭게 변하는 눈초리에 이서가 다급하게 덧붙인다.

핸드폰은 바뀌었지만, 번호는 그대로였다. 차계원은 새 핸드폰을 쥐여 줄 때 서휘준과 김건 외의 연락은 받지 말라고 당부했었다. 오는 메시지들을 하나하나 확인해 가며 이진강의 번호를 저장한 것도 그였다. 그래서 어제 차계원이 진강의 전화를 받으려 할 때는 진심으로 심장이 덜컹했다. 그가 정말로 통화 버튼을 눌러 모든 소리를 들려줄 것만 같았다.

“아무튼, 그런데요?”

“네가 그랬어?”

“…….”

망설이며 묻는 말에 계원이 눈을 곱게 휘며 사르르 웃는다.

“대표님 나부터 의심하는 그 버릇 고쳐야 해요.”

계원이 손가락 끝으로 입술을 톡톡 때린다. 아프게 때린 것도 아닌데, 백이서의 입술이 안쪽으로 말린다.

“의심은 아니고. 걱정돼서.”

“걱정? 누구를. 걔?”

“그, 그렇잖아. 저번에 자동차 광고도 네가 찍게 됐고, 영화도 무산되고, 또 핸드폰……. 광고도.”

핸드폰 광고를 이야기하며 흘긋 계원의 반응을 살피는 모습에는 의심이 가득 담겨 있었다.

“설마 그것도 나 의심해요? 핸드폰 광고는 신인이 맡았다면서요.”

“…….”

이서가 입을 꾹 다문다. 심증은 있으나 물증이 없으니 따질 수도 없었다. 차라리 핸드폰 광고까지 차계원이 맡게 됐다면 더 물어볼 수나 있을 텐데.

“이런 일 흔해요. 촬영 중에도 배우 바뀌는 판국에 “

“나도 알기는 아는데…….”

“수요일에 전체 미팅 있는 건 알죠.”

“어. 나도 가?”

“당연하죠. 저 그거 대표님 때문에 찍는 거잖아요. 따라다니는 성의는 보여야 할 거 아니에요.”

“굳이 나까지 갈 필요는 없을 거 같은데…….”

“가기 싫어요?”

“응.”

고개를 주억거리는 이서를 계원이 더 밭게 끌어안는다. 아이를 안아 어르고 달래는 기분이었다. 목덜미에 제 턱을 비빌수록 뜨끈하고 보들보들한 살결이 잘 느껴졌다.

“음. 같이 가면 5백만 원 제해 줄게요.”

이서가 볼 안쪽의 여린 살을 깊게 깨문다. 채권자가 된 게 밝혀진 후로, 차계원은 더 뻔뻔하게 굴었다. 그는 이제 그걸 숨길 생각조차 하지 않고 시시때때로 자신이 채권자임을 이용했는데, 그 방식이 대부업체 인간들보다도 지독했다. 지금처럼 빚을 빌미로 일상생활의 결정권을 쥐고 흔든다거나, 납부 날을 바꾸는 등 아주 제멋대로였다.

“어차피 건이 씨 있잖아.”

“이자 좀 올려 볼까 봐요. 대표님은 경각심이라는 게 없는 거 같아요.”

차계원의 커다란 손이 머리칼 사이로 들어온다. 부드러운 손길이었는데도 두피가 당겨지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아, 알았어. 갈게.”

고분고분한 대답에 차계원의 입매가 호선을 그리며 올라간다. 손에 감겨 오는 머리칼이 손등을 간지럽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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