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비도덕적 안락함-61화 (61/100)

#61

미팅 장소는 차계원의 집과 그닥 멀지 않았다. 전체 미팅이라 주 조연 배우들과 감독, 작가 등이 참석했다. 원래 이진강이 있어야 할 자리에는 새로운 배우 한기열이 앉아 있었다. 그는 개성 있는 배우로 연기력은 출중했으나, 경력은 그리 길지 않았다. 언젠가 태도 논란이 일었던 것도 같다.

“여기 앉아요.”

최대한 먼 자리로 가려는 이서의 뒷덜미를 차계원이 잡는다. 마지못해 끝에만 걸터앉자, 허리를 툭툭 치며 의자를 쑥 집어넣어 앉게 했다.

“오. 두 분이 친하신가 봐요? 요즘 대표가 직접 방문하시는 건 보기 드문데.”

뒤늦게 들어오던 감독이 너스레를 떤다. 그 얼굴이 마치 사이좋은 오누이를 보는 양 뿌듯해 보여 괜히 어색했다.

“예? 하하.”

“친하죠. 저희 대표님인데요.”

자연스럽게 어깨에 둘리는 팔에 이서가 목을 살짝 움츠리자 어깨를 감싸 오는 힘이 더 세진다. 이윽고 사람들이 부산스레 각자의 자리를 찾아 앉았다. 다들 한 번씩은 차계원을 힐긋거렸다.

“촬영은 다음 달부터 진행하려 합니다. 출연진들 전원 스케줄 확인했고요. 배급사는 다들 계약 전에 말씀드렸고, 개봉은 5월입니다. 가정의 달에 맞춰 개봉하는 만큼 기대가 큽니다. 특히 우리 배우분들이 쟁쟁하시니까.”

자리한 사람들의 시선이 전부 차계원에게로 향했다. 그 기대 어린 시선들이 부담스러울 법도 한데, 그는 여유롭게 챙겨 온 대본을 흔들었다.

“전체적인 대본 리딩은 토요일에, 포스터 촬영은 다음 주쯤 하려 합니다. 이 부분도 전달받았을 거라고 생각해요.”

다들 끄떡이며 경청하는 틈에서 시선이 느껴졌다. 고개를 올리니 히죽거리는 한기열과 눈이 마주쳤다.

“아…….”

눈이 마주침과 동시에 떠올랐다. 그는 태도 논란이 일어나기 직전에 폭력 사건에 연루됐었다. 피해자가 고소를 취하하는 데 시간이 오래 소요된 탓에 기사도 많이 떴었다. 더불어 동창들이며 지인들까지 그의 과거를 폭로했는데, 그것들이 대부분 진실이라 문제가 됐다. 그는 그냥 양아치였다. 여러모로 이진강에 비해 부족하기만 한 배우였다.

“감사해요.”

그가 대뜸 감사 인사를 전했다. 가만 보니 그의 시선은 이서가 아닌 차계원에게 향해 있었다. 차계원이 삐뚜름하게 턱을 까딱인다.

“선배님이 저 추천하셨다면서요. 우리 매니저가 그러던데.”

“그랬나? 처음 듣네요.”

차계원은 남의 이야기를 듣는 양 심드렁했다. 다른 배우들과 제작진들이 눈치를 보는 게 느껴졌다.

“복귀작으로 이렇게 큰 자리를 얻었으니, 열심히 해 보겠습니다.”

“좋죠.”

“자자. 그럼 오늘은 앞부분만 한 번 리딩해 봅시다.”

감독이 어영부영 상황을 돌렸다. 그의 헛기침에 무마하려는 기색이 가득했다. 이진강의 캐스팅 무산은 휘준에게 전해 들은 게 다였다. 제작사 측은 그 후 아무 입장도 표명하지 않았다. 유감이라거나 죄송하다 같은 예의상 말도 하지 않았다. 처음 이진강의 캐스팅을 제의했던 직원은 테이블만 보고 있었다. 그녀가 계속 열정에 가득 찬 눈을 하고 있는지 궁금했으나, 확인할 수 없었다. 그녀는 대본 리딩이 끝나고 회의가 마무리될 때까지 이서 쪽으로는 시선을 두지 않았다.

* * *

“아직도 나 의심해요?”

차에 올라타기 전, 차계원이 차 문을 열고 물었다. 그의 대본 리딩은 훌륭했다. 그저 대본만 읽는데, 눈앞에 캐릭터가 살아 있는 기분이 들었다. 대본의 지문들을, 아니 쓰여 있는 지문 그 이상을 구현해냈다. 그에 반해 한기열은 대본조차 외우지 못해 버벅댔다. 이진강이라면 그럴 일은 없었을 거다.

“응.”

“…….”

의심이 아니라 확신이다. 영화뿐만 아니라 핸드폰 광고도 차계원의 짓이 맞다는 확신이 들었다.

“상황이 그렇잖아.”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그렇게 모호하게 말하는 게 어디 있어……. 이유도 없이 진강이한테 들어간 작품만 훼방 놓으면 어떡해……. 안 그래도 미안한데…….”

땅만 보고 시무룩하게 중얼거리는 이서의 눈꼬리가 살짝 쳐진다. 안 그래도 순해 보이는 얼굴이 더 유순해졌다.

“그러게 걔를 왜 들였어요. 대표님 아니었으면 지금쯤 난다 긴다 하는 작품들 골라 찍고 있을 텐데. 나도 안타깝네요.”

계원이 퍽 안타깝다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백이서가 따져 묻기라도 할 듯이 고개를 치켜든다. 꼭 쥔 두 주먹은 여타 남성들의 것과 다를 바 없는데, 이상하게 앙증맞아 보였다.

“네, 네가 마음대로 하라며……. 내가 대표니까 마음대로 하라고…….”

“그래도 싫다고 했어야죠. 배우는 이미 충분하다고 거절했어야지. 케어할 능력도 여력도 없었잖아.”

“무슨, 그런 게 어디 있어.”

“아무튼, 난 모르는 일이에요. 지 복이 그 정도인가 보죠.”

“거짓말. 내가 아무리 눈치 없어 보여도 그 정도 눈치는 있어. 네가 그런 거잖아.”

“모르는 일이라니까.”

“거, 거짓말…….”

계원이 백이서의 관자놀이를 살살 문지른다. 눈 밑이 발갛게 된 게 이대로 엎어 놓고 쑤셔 박고 싶었다. 뿌리 끝까지 멋대로 박아 주면 눈물을 그렁그렁 매달고 그만해 달라 애원하겠지. 그만하라는 입을 벌려 혀로 헤집으면 침을 질질 흘려대며 울려 할 테고. 그럼 자신은 게게 풀린 안쪽에 흥건히 싸 준 다음 살살 달래 주는 거다.

“음. 대표님이 그 정도로 내가 의심된다면, 이진강이랑 친하게 지내는 걸 그만두는 게 좋겠죠? 이럴 시간에 걔 번호를 차단하거나.”

“안 친해. 밥만 몇 번 먹은 게 다야. 밥 몇 번 먹었다고 친한 사이는 아니잖아. 그리고 그거랑 작품이랑 무슨 관계가 있어. 아무 관계도 없는데…….”

평소에는 이래도 흥, 저래도 흥인 주제에 변명할 때만 말이 길어진다. 어찌나 잘 조잘조잘하는지 그 맹랑한 입에서 눈이 안 떼졌다. 백이서가 조잘거릴 때마다 축축한 혀가 보였다 말았다를 반복했다. 입이 다 물리면서 그 붉고 탐스러운 게 숨어드는데 여간 요사스러운 게 아니었다.

“잠, 잠깐만.”

싱긋 웃은 계원이 조수석에 이서를 짐짝 싣듯 집어넣는다. 팔을 파닥이는 이서를 모른 척한 채 운전석에 올라 액셀을 밟았다. 여기서 집까지는 30분 남짓이었다. 숫제 조급한 마음이 일렁인다.

“내일은 회사 가요.”

“내일?”

백이서의 눈에 전에 없던 생기가 돈다. 항상 똑같은 회사는 뭐 하러 기를 쓰고 가려 하는 걸까.

“맨날 휴가 언제 끝났는지 물었잖아요.”

“어, 고마워. 아, 아니 고맙지는 않은데.”

아차 싶은지 말을 바꾼다. 도리질까지 치는 덕에 머리카락이 살짝 떴다 가라앉는다. 계원이 핸들을 돌리며 혀를 찼다. 왜 저 병신 같은 꼴을 볼 때마다 좆이 팽팽해지는지.

“그럼 나 내일 아침에 나간다? 8시나 8시 반쯤에.”

허락이라도 구하는 양 대각선으로 올려다보는 얼굴에 계원이 브레이크를 밟는다. 몸이 앞으로 기운다. 아무래도 집까지는 무리였다.

* * *

거의 3주 만의 출근이었다. 오랜만의 출근은 어색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매번 어색하기는 했다. 쓸데없이 두 개씩 있는 엘리베이터나 번쩍거리는 외벽은, 발을 디딜 때마다 이 회사가 제 것이 아님을 상기시켜 주는 것 같았다.

“안녕하세요, 대표님.”

“네, 안녕하세요.”

로비에 앉은 데스크 직원이 활기차게 인사를 건네 온다. 아침 일찍 출근하려던 계획은 차계원 덕분에 망했다. 뭐 때문에 불붙었는지 몰라도 새벽녘이 되도록 이서를 놔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출근해야 한다며 우는소리를 내자, 먼저 꼬신 주제에 발 빼려 한다며 타박까지 놨다.

“오늘따라 멋지신데요?”

이서가 제 옷을 내려다본다. 체크 패턴이 있는 코트와 올리브색 캐시미어 니트, 그 안의 흰 셔츠와 단정한 넥타이. 모두 차계원이 고르고 구매한 것들이었다.

“저 없는 동안 별일 없었나요?”

“네. 없었어요.”

단아하게 목 인사를 하는 직원에게 같이 마주 웃어준 후 대표실로 올라왔다. 대표실은 어제도 휘준이 청소하고 갔는지 깨끗했다.

“고지식한 놈.”

이서가 별로 든 게 없는 서류 가방을 내려놓고 책상 앞에 앉았다. 보통 서류 가방을 갖고 다니나. 필요한 것 같지는 않은데 차계원은 굳이 손에 들려 보냈다.

“할 게 없네.”

서류 몇 장을 뒤적거리던 이서가 중얼거린다. 3주 만의 출근이 무색할 정도로 할 일이 없었다. 모든 게 평온했고, 바쁘지도 않았다. 차계원이 직원들을 고용한 후로 업무들은 완벽할 정도로 분배되었다. 업무를 맡은 이들은 실수 한번 하지 않아서 굳이 이서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똑. 똑.

“네.”

노크 소리에 이서가 반갑게 일어났다. 할 일이 없다는 건 온몸을 좀 쑤시게 했다.

“형.”

묵직한 걸음의 진강이 대표실로 들어섰다. 오랜만에 보는 얼굴은 약간 살이 빠져 있었다.

“어, 진강아.”

그는 종종 험악해 보이는 인상이기는 해도 묵묵한 분위기를 갖고 있었는데, 지금은 살이 빠져서인지 전보다 날카롭고 날 선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오랜만에 출근하셨습니다.”

“어? 어…….”

이서가 소파에 앉은 진강과 멀리 떨어진 자리에 앉았다. 항상 편했던 이였는데 이제 마냥 편하지만은 않았다. 엎어진 작품들이 늘어날수록 어설픈 죄책감이 들었다. 수두룩하게 쌓인 그의 부재중 전화나 어제 차계원이 한 말도 돌처럼 마음에 걸렸다.

“휴가였다고 들었습니다.”

“응. 나 출근한 건 어떻게 알았어?”

“매일 회사에 들렀었습니다.”

“그랬구나. 그 영화 일은…….”

“괜찮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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