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비도덕적 안락함-62화 (62/100)

#62

진강이 나오려는 사과를 가로챘다.

“어…….”

“사과하시려는 거면 안 하셔도 됩니다.”

“그래도.”

그라면 담담하게 받아들이리라 예상은 했었다. 욕심 없어 보이는 태도와 아무도 탓하지 않는 모습에 더 죄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영화 시나리오를 줬을 때 고민조차 않고 하겠다 한 사람이다. 이서의 추천이니 괜찮은 작품이지 않겠냐는 말도 했었다. 이서가 아랫입술을 꾹 깨문다.

“점심 안 드셨죠. 형 안 계신 동안 쓸쓸해서 혼났습니다.”

이진강이 소년처럼 수더분하게 웃으며 쇼핑백에서 초밥을 꺼낸다. 일전에도 포장해 왔던 가게의 초밥은 여전히 정갈하고 맛깔스러워 보였다. 내밀어지는 젓가락이 꼭 자신을 질타하는 창 같았다.

“형 출근하셨다길래 바로 사서 온 겁니다. 어서요.”

‘케어해 줄 능력도 여력도 없었잖아.’

‘그 정도로 내가 의심된다면, 이진강이랑 친하게 지내는 걸 그만두는 게 좋겠죠?’

진강의 말 위로 차계원의 목소리가 바로 옆에서 속삭이는 것 같았다.

“아, 나는 밥을 먹고 왔거든. 아침을 늦게 먹어서 배가 안 고프네.”

“여쭤볼 걸 그랬습니다. 연락이 안 되셔서.”

“미안. 쉬는 동안 바빠서…….”

“많이 바쁘셨나 봅니다.”

진강의 눈이 고요해진다. 미안하다는 듯이 머리를 긁적이는 백이서는 평소와 달랐다. 늘 스스럼없이 자신을 대하던 것과 다르게 어딘지 모르게 불안한 기색이 엿보였다.

옷차림도 그렇다. 매일 입던, 단정하지만 활동성이 높은 옷들과는 달랐다. 그가 걸친 니트나 셔츠, 신발 모두 유명 디자이너들의 제품이었다. 오늘 그가 걸친 것들을 값으로 환산하자면 중형차 한 대 정도는 너끈히 나올 거다.

개중 대표실 한쪽에 대충 벗어 놓은 코트는 화보 촬영 때 차계원이 입었던 컬렉션 중 하나였다. 사이즈와 색이 다르나 분명하게 알아볼 수 있었다.

“그럴 수 있죠. 그럼 커피 드시겠습니까.”

“그……. 진강아, 정말 미안한데 내가 할 일이 많아서.”

이서가 목에 매인 넥타이를 조금 헐렁하게 잡아 끌렀다. 아침에는 분명 적당했다고 생각했던 넥타이의 조임이 목을 옥죄여 오는 착각이 들었다.

아침에 넥타이를 매 주며 차계원은 장난스럽게 끈을 꽉 조였었다. 이서가 캑캑거리자 다시 끈 길이를 적당하게 조절해 주고 잘 다녀오라는 말을 덧붙였다. 그 즐거워 보이는 입매와 우아한 손길은 마치 어떤 경고 같았다.

“대표님 저 불편하십니까.”

이진강이 약하게 눈썹을 찡그린다. 워낙 이목구비 선이 깊고 굵어서, 눈썹만 살짝 구기는데도 애달픈 느낌이 났다.

“어? 아, 아냐. 네가 불편하다니. 그런 거 아니야.”

아니라고 하는 음성에는 힘이 없어, 진강의 눈썹이 더 구겨진다.

“출근은 매일 하시는 겁니까?”

“응. 아마도. 저기, 진강아.”

“네, 형.”

“듣기로는 저번 기획사랑……. 좋게 끝났었다며?”

“…….”

이서가 목 부근이 계속 답답한지 넥타이를 아예 풀어 소파에 둔다. 단추 하나가 풀린 곧은 목에 진강의 시선이 멍하니 고정된다. 카라 안쪽, 목 왼편 아래 부근에 붉은 울혈이 자리 잡혀 있었다. 진강의 눈빛이 낮게 가라앉는다.

“우연히 마주쳤거든 아직도 너 탐내시더라.”

차계원이 해 준 말이었다. 그 소속사에서 진강의 안부를 묻더라고.

“그렇습니까.”

“어, 어.”

“…….”

“그, 있잖아. 만약에 앞으로도 네 작품이 계속 엎어지면…….”

“대표님.”

낮고 퍼석한 음성이 이서를 불렀다.

“어, 만약을 이야기해 보자는 거야. 사람 일이라는 게…….”

“저 대표님 좋아합니다.”

“으응. 어?!”

다짜고짜 나오는 말에 이서의 행동이 멈춘다. 얼떨떨한 되물음과 살짝 입이 벌어진 얼굴에는 당황한 기색이 가득했다. 손은 갈 곳을 잃고 방황하고 있었다. 진강이 그 유순하면서도 어정쩡한 모습 앞에서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그렇게 됐습니다.”

“어, 아. 나도 좋아. 알잖아. 내가 너 편하게 생각하는 거.”

예상은 했으나, 두루뭉술하게 넘기려는 모습에 입이 썼다. 그래서 그는 더 단호하게 입을 뗐다.

“연애 감정으로 좋아합니다.”

“무, 무슨 소리야 갑자기. 앞뒤 없이 이게.”

이서가 입 모양을 이상하게 우물댔다. 여유로운 척하고 싶은데 온몸이 부자연스럽게 움직였다. 이마에서 식은땀이 흐른다. 급하게 물을 마시려다 물병을 엎을 뻔했다. 그는 장난을 즐겨 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게다가 지금 진강의 눈빛은 지나치게 진지하고 굳셌다.

“진강아. 다음에. 다, 다음에 이야기하자. 농담으로 들을게.”

이서가 어수선하게 움직이며 테이블 치우는 시늉을 했다. 진강이 그런 그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부담되십니까?”

“아니, 부담이 아니라……. 이상하잖아, 갑자기. 우리 내일도 보고 계속 볼 텐데.”

너도 알고 있지 않냐는 뜻을 담아 말했다. 안 그래도 요즘 진강만 생각하면 미안한 마음이 가득했다. 그냥 가만히 있어도 속이 꽉 막힌 기분이었다. 진강뿐만 아니라 이서 자신을 둘러싼 모든 상황이 그렇게 만들었다. 할 수만 있다면 회사고 빚이고 다 모른 척 외면한 채 도망가 버리고 싶었다.

“…….”

“그……. 미안.”

이서가 고개를 푹 숙였다. 진강이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는 이서의 사과에 어떤 흔들림도 없었다. 오히려 더 확고한 모양새로 입가의 근육을 굳혔다.

“부담 드리려고 한 말 맞습니다. 그러니까 저 내보내려는 생각 같은 거 하지 말아 주십시오. 계속 미안해하고 신경 쓰고 떠올려 주십시오.”

“…….”

“먼저 가 보겠습니다. 내일은 식사 같이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대표실을 나서는 진강의 시선이 끝까지 이서의 목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황망한 표정의 이서와 함께, 테이블 위에 초밥들만 말라 가고 있었다.

* * *

[4시에 퇴근해서 와요.]

메시지를 확인한 이서가 핸드폰을 주머니에 쑤셔 넣는다. 출근을 12시 다 돼서 했는데, 퇴근을 4시에 하라니. 안 그래도 어수선하게 들쑤시던 속이 시끄러웠다. 그의 말대로 발길을 옮기고 있는 자신도 싫다.

“하아.”

이제 그나마 편했던 진강까지 껄끄러워졌다. 연애 감정이라니. 좋아한다니.

“그런 게 다 무슨 소용 있다고…….”

이서가 한숨처럼 말하며 차 문을 열었다. 어서 가지 않으면 또 차계원이 한 소리 할 게 분명하다.

“이, 이서야!”

그때 뒤쪽에서 누군가 제 이름을 외쳤다. 이서가 얼음이라도 된 것처럼 우뚝 움직임을 멈춘다. 문이 열린 자동차에서 딩, 딩, 소리가 났다.

“이서. 백이서!”

갑자기 심장이 빠르게 뛴다. 온몸의 피가 싸아 하고 발밑으로 빠져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이윽고 제 어깨에 손 하나가 올라왔다. 훅. 독한 스킨 냄새가 풍겨 온다. 머릿속 아주 깊숙이 꼭꼭 눌러 놨던 냄새다. 바닐라 향이 나는 향수 냄새와 담배 냄새가 그 위로 겹치듯 섞여든다. 어지러웠다.

“하.”

이서가 차 문이 동아줄이라도 되는 것처럼 세게 잡는다. 그러지 않으면 다리가 휘청거릴 것만 같았다. 뚝. 짧은 손톱이 부러져 나간다. 바로 등 뒤에서 익숙한 숨소리가 났다. 불안하게 뛰는 심장이 박동 소리가 울렸다.

“이서야…….”

중저음의 목소리가 달콤하게 제 이름을 반복해 부른다.

부르지 마. 그렇게 부르지 마.

“백이서.”

이서가 돌아가지 않는 제 몸을 억지로 틀었다. 목에서 끼긱거리는 소리가 날 것만 같다.

“김…… 승주.”

쥐어 짜내듯 제 입에서 속에 묵혔던 이름 석 자가 나온다. 자신의 음성이 제 것 같지 않고 낯선 게 꼭 공포영화의 효과음 같았다.

“오랜만이야.”

김승주였다. 김승주가 눈앞에 서서 어색한 표정으로 웃고 있었다. 마치 어제도 본 사이처럼.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도망간 적 따위 없는 것처럼 오랜만이라고 한다.

“하…… 하하.”

명치끝, 아니 명치 저 아래서부터 무언가 울컥하고 올라왔다. 누가 가슴께부터 명치까지 손톱으로 박박 긁어대는 것만 같았다.

“왜 울어……. 마음 안 좋게.”

그제야 제가 울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차라리 다행이었다. 시야가 뿌예서 김승주의 얼굴을 명확하게 담지 않아도 됐다. 차 문을 잡은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얼굴 많이 좋아졌네.”

탁.

얼굴을 쓰다듬으려는 손을 이서가 거세게 쳐냈다. 잠시 허공에 떠 있던 손이 머쓱하게 내려간다. 이서가 얼굴을 감싸 올리며 제 눈물을 벅벅 닦아냈다. 열이 오른 이마가 뜨겁다.

“나한테 화 많이 났지.”

그가 애처로운 표정으로 이서를 살핀다. 그 눈빛이 꼭 오래전 헤어진 애틋한 연인을 보는 듯해 욕지기가 올라왔다.

“돈은.”

“응?”

“돈. 형이 낸 빚. 갚아야 할 거 아냐.”

김승주가 아차 싶은 얼굴로 고개를 돌린다.

“우선 너랑 대화 좀 하고 싶어.”

“대화는 4년 전에 했어야지. 날 두고 도망가기 전에.”

“미안해. 그래도 우리 풀어야 할 이야기들이 많잖아.”

“무슨 이야기. 뭘 풀 수 있는데……?”

짐짓 냉정한 목소리를 가장했으나. 이서의 음성은 떨리고 있었다. 그걸 김승주도 이서도 모르지 않았다.

“너한테 사과부터 하고 싶어.”

“사과?”

“그래. 사과. 내가 무모해서 널 잃게 된 거 같아. 미안하다는 말밖에 할 말이 없다는 게, 나 자신에게 화가 난다.”

“필요 없으니까 빚이나…….”

기가 막혔다. 사과라니. 이제 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사과를 하겠다니.

“갚을게!”

“…….”

“돈도 다 갚고, 네가 고생한 거에 대한 보상도 할 생각이야. 그러려고 왔어. 그다음 이서 너랑 다시 시작하고 싶어서.”

“시작? 시작이라고? 난 절벽 끝에 서 있어. 형이 그렇게 만들었다고!”

“알아!”

“하…….”

이서가 허탈하게 숨을 내뱉는다. 저 뻔뻔한 얼굴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자칫 선량해 보이는 외모도, 달콤한 목소리도.

“알아서. 내 잘못인 거 나도 너무 잘 알아서, 다시 돌리고 싶다. 나한테 화난 거 알아. 충분히 이해해. 화내도 돼. 계속 내. 다 받아 줄게.”

“헛소리 필요 없어.”

이서가 그의 어깨를 힘 있게 쳐냈다. 그래도 그 정도로 밀려날 사람은 아닌데 기꺼이 뒤로 밀려났다.

“나 이제 달라졌어. 도망 안 쳐.”

“퍽이나.”

“……믿을 수 있게 만들게. 내일 또 올 거야. 내일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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