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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도덕적 안락함-67화 (67/100)

#67

탁.

이서가 소리 나게 찻잔을 내려놓는다. 그 앞에 앉은 김승주는 유리로 된 찻잔의 물결무늬만 손끝으로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이거 되게 비싼 다기 아니야?”

이서가 살짝 눈살을 찌푸린다. 차계원이 구비해 놓은 다기의 가격은 알지도 못하고 궁금하지도 않았다. 그저 앞에 앉아 생뚱맞은 말이나 늘어놓는 이의 저의가 궁금할 뿐이다.

“할 이야기 있다며.”

“너는 더 이뻐졌다. 멋있어졌다고 해야 하나? 세상 다 바뀌어도 너만 그대로인 것 같아.”

뜬구름 잡는 소리였다. 본론을 꺼내기 전에 설탕 먼저 솔솔 뿌리는 건 예나 지금이나 똑같다.

“나 이제 그런 말에 안 넘어가.”

“칭찬한 거야. 오랜만에 보니까 좋아서.”

“2억 남았어.”

“엉?”

서운한 빛으로 되묻는 눈을 이서가 최대한 똑바로 마주치려 노력했다. 어제 주차장을 빠져나가는 그를 보며 수없이 한 다짐이다. 조금이라도 휘둘리지 말자고, 단 한 톨의 허점도 보이지 말자고.

“내 전셋집 보증금까지 빼서 다 갚고 2억 남았다고. 4년 동안 내가 낸 이자도 빠짐없이 물리고 싶은데 그러지는 않을게. 원금만 갚아.”

빚에 배신감까지 뒤집어씌운 그에게 큰 건 바라지도 않았다. 속아 넘어간 제 잘못도 있고, 마냥 믿은 철없음도 있으니 원금만 받을 생각이었다. 그간의 고생이 말이 아니었지만, 인생 수업 비싸게 받았다고 치부하면 견딜 정도는 됐다.

“너도, 참. 갚을 거야. 그러려고 왔다고 했잖아. 근데 이서야 돈 이야기 잠깐 떠나서 우리 이야기 좀 하면 안 될까? 돈이야 내가 어차피 갚을 거고, 나 너 어떻게 지냈는지 너무 궁금한데.”

인정 없다는 듯한 뉘앙스에 이서의 얼굴이 점차 굳는다.

“헤어진 마당에 자꾸 안부 묻지 말자. 좋게 끝났던 것도 아니고, 그런 거 궁금해할 사이는 아니잖아.”

“난 우리 헤어졌다고 생각한 적 없어.”

“콜록, 뭐……?”

허브차가 넘어가다 말고 목 중앙에서 걸린다. 이서가 사레들릴 뻔한 목을 겨우 가다듬었다. 일부러 바짝 뜨고 있던 눈매에 힘이 풀린다.

“우리 헤어지기로 한 적 없잖아. 난 그런 말 한 기억 없는데. 들은 기억도 없고.”

“4년 동안 머리가 어떻게 되기라도 했어? 형이 나만 진창에 던져 놓고 도망간 날, 그날 우리 헤어진 거지!”

“나 너 사랑해, 이서야.”

“하하. 아하하. 미친 거야 지금?”

찻잔 손잡이를 잡은 손이 잘게 떨렸다.

그 떨림을 본 김승주의 입매에 미소가 걸린다. 어차피 승기는 자신에게 있다. 백이서와 자신의 관계는 언제나 그래 왔다. 이건 공식처럼 당연한 일이었다.

“아니, 진심이야. 난 계속 너 사랑했어.”

“그걸 말이라고 해? 어떤 미친놈이 사랑하는 사람한테 다 떠밀고 도망가. 형 그렇게 가고 나 어땠는지나 알아? 매 순간을 조마조마하며 살았어! 작년에 뭐 했는지, 재작년은 또 어떻게 보냈는지 기억이 안 나. 매년 쫓기듯 살아서 그런 것밖에 기억이 안 난다고!”

울화가 치민 외침에도 김승주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의 진심 어린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것만큼은 거짓말이 아니다. 자신은 백이서를 사랑한다. 처음에는 호기심이었다지만, 그 후는 아니다. 제 마음만큼은 진심이었다. 단지, 백이서를 사랑한 만큼 출세와 돈도 사랑했을 뿐이다.

“친척분이 아프셨어.”

“뭐……?”

“나한테는 아버지 같은 분이셨는데 병이 악화되셔서. 거기에 사업까지 그렇게 되니까 제정신이 아니더라.”

그러니 마음을 돌리기 위한 조금의 거짓말은 괜찮다. 용서나 이해는 나중에 구하면 될 일이다. 우선 남은 원금을 갚으라는 저 말부터 들어가게 해야 했다.

“급하게 내려갔어. 그래서 아무한테도 말 못 한 거고.”

“90년대 신파도 아니고 아픈 친척? 형한테 그런 친척 계신다는 거, 한 번도 들은 적 없어.”

“너한테 좋은 모습만 보여 주고 싶었으니까.”

김승주가 애달픈 양 아련한 눈으로 시선을 떨군다. 천성이 마음 약한 놈이었다. 어떤 실수를 해도 끝에는 자신을 안아 주던 애다.

“이런 거로 나 마음 약하게 할 생각이면…….”

날 세우며 몰아붙이던 모습이 벌써 한풀 꺾여 있었다. 예상대로다. 백이서를 다루는 방법은 제가 제일 잘 아니까.

“그럴 의도 없어. 우리 이서 사회생활 하더니 많이 예민해졌네.”

“…….”

“돈이 많이 필요했어. 아주 많이. 합병증도 있으셔서 수술이 필요했거든. 그런데 네가 알게 되면 착한 네 성격에 돕겠다고 할까 봐. 너한테 더 피해 갈까 봐.”

그가 이것만큼은 말하고 싶지 않았다는 듯 이야기를 끝마치고 따듯한 차를 호로록 들이켠다. 레몬그라스의 향이 산뜻했다. 로비만 휘황찬란한지 알았더니 대표실도 고급스럽다. 진작 찾아오지 못한 게 후회스러웠다.

“그…….”

“음?”

“그 친척분은 어떻게 되셨는데?”

“아……. 돌아가셨어.”

“어?”

“나이도 많으셨고 지병도 오래 앓으셔서. 내가 갔을 때는 이미 늦었더라고.”

“미안…….”

백이서가 손을 만지작거리며 고개를 숙인다. 날 선 모습은 이제 온데간데없다.

“아냐, 이서 네가 미안할 일이 뭐 있어. 내가 미안하지.”

“…….”

“일찍 와서 수습해야 했는데, 도저히 일어나 지지가 않더라. 친척분은 돌아가셨지, 빚은 산더미지. 거기에 우울증까지 오니까 그냥 죽고 싶었어. 너한테 사과라도 해 보려면 그럴듯한 모습으로 와야 할 텐데 난 너무 엉망진창이었거든.”

“…….”

“아무튼, 제일 하고 싶었던 말은 사과였고. 내가 어제 한 말 중에 다 보상해 주고 싶다는 말 기억해?”

“어……. 근데 나 필요 없어. 얘기 들어 보니 형도 힘들었을 테고, 그런 것까지 바라지 않아.”

이서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는다. 보상이니 뭐니 필요치 않았다. 채권자가 된 차계원에게 빚이나 갚아 주고, 이 삶에서 조금이나마 벗어나고 싶었다.

“무슨 소리야 이서야. 내가 해 주고 싶어서 그래. 하게 해 줘.”

퍽 애절한 목소리의 그가 만지작거리는 이서의 손을 붙잡는다.

“됐어. 그냥 원금만…….”

“듣기라도 해 주라. 이렇게 긴 시간 동안 널 못 찾아온 일에 대해 설명이라도 하게 해 줘.”

“괜찮은데…….”

“듣는 건 괜찮은 거지?”

“뭐…….”

“고마워. 우리 이서 속 깊은 건 여전하네.”

옆으로 자리를 옮겨 앉은 그가 손을 아예 가져가 쓰다듬는다. 그 손을 빼지도 못하고 어정쩡하게 있던 이서가 엉덩이를 뒤로 물린다. 바짝 붙은 거리가 부담스러웠다.

“뭔데 그래서.”

“있지, 우리 이 회사를 합병하는 게 어떨까?”

“뭐? 회사를?”

이서가 잡힌 손을 빼낸다. 아직 자리 잡지도 못했는데 합병이라니. 게다가 이 바닥에서 일을 벌이는 건 이제 진절머리가 났다. 빚을 다 갚으면 모든 걸 정리하고 싶었다. 하고 싶어 시작한 일도 아니었고, 부채감과 빚에 억지로 아등바등하는 것도 한계였다.

“응. 오래전부터 생각한 일이야. 너한테 말만 안 했던 거고, 회사 차릴 때부터 계획했었거든.”

“그, 그건 일이 너무 커지잖아. 난 이 회사도 벅찬데…….”

“알아. 우리 이서 고생 너무 많이 했지.”

“알면 그런 이야기 꺼내지도 마. 난 이 이상 더 못 하겠어. 새로 일을 벌이고 싶지도 않고.”

빼낸 손을 김승주가 다시 가져가 두 손으로 꼭 쥔다. 예전에는 이 온기를 따듯하다고 느낄 때가 있었는데, 지금은 그저 끈덕지게만 느껴졌다.

“그러니까 이제 쉬자. 힘든 일은 내가 다 도맡아 할게. 예전에 우리 여행 가기로 약속도 했었잖아. 이제 여행도 다니고. 내가 보내 줄게.”

“하지만 4년 동안 손 놓고 있다가 갑자기 합병하자니…….”

“지팩 엔터테인먼트 알지?”

“알기는 알지.”

중견 기획사였다. 회사 자체는 20년 남짓 된 회사였는데 빛을 본 지는 얼마 안 됐다. 그래도 이 바닥 치고는 오래된 회사라 체계도 잘 잡혀 있었고 실력 있는 가수들이나 대중적인 노래도 어느 정도 있었다.

“내 선임이 거기 대표야. 아버지 회사 물려받았다는데 원래는 나도 몰랐었어. 그 선임이 맨날 놀자판이었거든? 그게 다 믿는 구석이 있어서 그랬나 봐.”

“그래도 합병은 좀……. 거기는 가수만 하는 데 아냐? 우리는 배우 기획사잖아. 겹치는 게 없는데.”

“그러니까 합병하는 거지! 서로 윈윈이니까. 그 형이 그 회사 맡은 게 딱 우리 사업 시작할 때랑 비슷한 시기래. 지팩에서 아이돌 나오기 시작한 게 그때부터 아냐. 다 그 선임 머리에서 나온 거거든.”

확실히 지팩 엔터가 주목을 받게 된 건 몇 년 전부터였다. 걸그룹 하나가 데뷔했는데, 노래도 대중적이었고 실력도 괜찮았다. 그 후로 두 팀의 그룹을 더 내보냈고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그중 한 팀은 아예 해외를 주력으로 하고 있어서 벌어들이는 외화도 상당했다.

“내가 오랫동안 추진해 온 일이야. 확신 들 때 너한테 말해 주고 싶어서.”

“그런 회사가 우리랑 합병하려 한대? 뜬 건 얼마 안 됐어도 자리 잡힌 회사잖아. 우리는 따지자면 신생이나 다를 게 없고.”

“이번에 상장 준비한대. 상장하려면 더 성장할 필요도 있고, 또 그 선임이 워낙 포부가 큰 사람이거든. 이거 우리한테 좋은 기회야. 네 말마따나 신생인 회사랑 합병하려는 데가 얼마나 되겠어? 내가 우리 회사의 가능성을 몇 년이나 어필했다니까. 너한테 오지는 못했지만, 항상 회사랑 네 걱정만 했어.”

“걱정은 무슨…….”

“그리고 우리는 차계원이 있잖아.”

“……차계원?”

“어. 차계원 배우!”

“여기서 차계원 씨가 왜 나와?”

이서가 의심 가득한 눈으로 수상한 기색을 읽어내려 했다. 그러나 그의 진정성 있어 보이는 모습에서 거짓은 읽히지 않았다.

“왜냐니 당연하잖아. 우리 회사의 성장이 차계원 배우한테 달렸는데. 이미 성장했다고 봐도 되나?”

대표실을 하나하나 뜯어보는 그의 눈에 탐욕이 얽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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