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비도덕적 안락함-68화 (68/100)

#68

“됐어. 차계원 씨 오래 안 있을 거야…….”

“잘됐네! 내 계획도 그거야!”

“……?”

“차계원 씨 먼저 지팩으로 보내자.”

그의 목소리가 중요한 임무를 말하듯 더없이 진중해진다.

“보내……?”

이서가 숨을 멈춘다. 나쁜 짓을 하는 아이처럼 가슴 한구석이 콩콩 뛰었다.

“뭐든 처음이 중요하니까. 일단 차계원 씨 먼저 소속 옮기고 본격적으로 합병하자. 그다음 우리도 그 회사로 옮기는 거야. 자리 잡으면 회사 이름도 바꾸기로 했어. 지케이 어때!”

“…….”

“아니면 너 고생한 대가로 카페 하나 차려 줄게. 내가 갚을 거니까 빚도 없어질 테고, 일도 신경 안 써도 돼. 너 그거 꿈이었잖아. 조용한 동네에 카페 차리고 평온한 일상 보내는 거.”

콩콩대던 소리가 쿵쿵으로 바뀐다. 보낼 수 있다고? 차계원을?

“어떻게 보내……?”

“응?”

“차계원 씨. 어떻게 보내는데……?”

“뭐야. 벌써 정든 거야? 너 낯가림도 심하면서.”

미약하게 떨리는 목소리를 잘못 해석했는지 그가 이서의 머리칼을 잔뜩 흐트러트린다.

“그래도 말이나 해 봐. 보내자는 게 아니라, 곧 한 회사 될 거니까 잠깐 먼저 옮기자는 거지. 그리고 너도 계속 회사 일 맡을 거면 자주 볼 수 있을 거야.”

“안 하면?”

“뭐를? 일을?”

“형 말대로 빚 다 갚고 합병되면 나는 굳이 없어도 되잖아.”

저도 모르게 손바닥에 땀이 나기 시작했다. 이서가 땀난 손을 오므려 주먹 쥐듯 쥔다.

“그럼 얼굴이야 마주치기 힘들겠지만…… 종종 놀러 오면 되지. 내가 이서 너 오는 걸 막겠냐.”

똑. 똑.

“누구 왔나 보다, 이서야.”

달칵 문이 열리고 이진강이 전날과 같은 초밥 가게의 쇼핑백을 들고 들어왔다. 잠깐 멈칫하던 그는 다시 문을 닫고 나가려 했다.

“손님이 계신 줄 몰랐습니다. 죄송합니다.”

“어! 아니에요. 이진강 배우님이시죠?”

시원시원한 목소리가 나가려는 발걸음을 붙잡는다. 오랫동안 보지 못한 절친한 친구라도 만난 양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손을 내민다.

“와. 이렇게 뵙네요. 한 번쯤 꼭 뵙고 싶었는데. 반갑습니다. 김승주라고 합니다.”

“예. 이진강입니다.”

예의 바르게 손을 마주 잡는 진강의 모습은 자로 재단한 듯 반듯했다.

“화면보다 더 크시네. 운동선수라 해도 믿겠어요. 멋있으시다.”

김승주의 최대 장점은 당당함과 친화력이었다. 그는 넉살 좋게 처음 본 이진강의 팔뚝을 만지며 너스레를 떨었다.

“과찬이십니다.”

“난 이만 가 볼게. 생각해 봐, 이서야. 알았지?”

“……가.”

“그래. 이진강 씨도 안녕히 계세요. 조만간 또 봬요.”

“예, 들어가십시오.”

이만하면 됐다 싶은지, 김승주가 이서의 어깨를 툭툭 치고 대표실을 나선다. 그리고 그런 그의 뒷모습을 이진강이 경계 어린 시선으로 쫓았다.

“왔어……?”

문이 닫힐 때까지 말이 없던 이서가 어정쩡하게 이진강을 반긴다. 말도 안 되는 기대와 혼란이 무질서하게 머릿속을 돌아다녔다. 이럴 줄 알았다. 제가 골백번 마음먹어 봤자다. 김승주는 어떤 수를 가져와서라도 자신을 헤집어 놓는다. 그럴듯한 이야기와 가능성들만 쏙쏙 골라 제 눈앞에 펼쳐 놓는다.

“네. 어제 식사 같이하자고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잊으셨습니까.”

테이블 위에 조심스레 놓이는 초밥에 멍한 정신을 붙잡았다.

어제 진강이 던지고 간 폭탄이 토씨 하나까지 잊히지 않고 떠올랐다. 그는 언뜻 아무렇지 않아 보였지만, 눈치를 보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초밥을 놓는 자리까지 안절부절못하며 몇 번을 바꾸는 게 그답지 않게 부산스러웠다. 고요하던 눈도 계속 이서의 기색을 살피고 있었다.

“그랬기는 하지…….”

이서가 제 앞으로 내밀어지는 장국을 보며 말끝을 흐린다. 산 넘어 산이다. 여우 피하려다 호랑이 굴에 빠진 사람의 심정이 이럴까.

“진강아, 밥 먹기 전에 이야기해야 할 게 있거든.”

정리할 것도 없는 테이블 위를 이것저것 정리하고 있던 손이 공중에서 멈춘다. 까무잡잡한 이진강의 피부가 붉어져 있었다. 짧은 머리 아래로 드러난 다부진 목이 부끄럼타는 소년 같다. 웃을 때만 소년 같은 줄 알았더니 이럴 때도 그렇다.

그리고 이런 상대일수록 태도를 확실히 밝혀야 한다는 걸 이서는 알고 있었다. 어려워도 해야 했다. 세상 모든 일이 그렇듯이.

“어제 한 말 있잖아……. 그, 미안한데 내가 여력이 없어. 네 말이 진심이라 해도 그걸 고민해 볼 여유조차 없어.”

공중에 떠 있던 손이 툭 무게감 있게 떨어진다. 그의 얼굴을 볼 자신이 없어 바닥만 보고 말을 이었다.

“부드럽게 거절하거나 그럴 여유도 없을 정도로, 지금 내가 그래……. 그러니까 앞으로 식사는 따로…….”

“죄송합니다.”

“어, 어?”

이진강은 생각보다 쉽게 이서의 말을 수긍하는 것 같았다. 다짜고짜 사과부터 하는 것에 놀라 고개를 들자 그는 자책 어린 낯을 하고 있었다. 그 바람에 불편하고 미안하던 이서의 마음이 배가 됐다.

“아냐! 그렇게까지 죄송해하지는 않아도 되는데……?”

“아닙니다. 제가 성급했습니다.”

자리에 앉지도 못하고 서서 고개만 살짝 숙인 채 사과하는 모습은 외려 이서에게 죄책감을 불러일으켰다.

그래도 한편으로는 다행이었다. 친한 사람이 별로 없는 이서에게 진강은 몇 안 되게 편한 사람이었는데, 그런 사람과 불편해지기는 싫었다. 거리는 둬야겠지만 아예 불편한 관계가 되는 것과는 다른 의미였다.

“그래 나도 장난으로 넘어갈 테니까. 없던 일로…….”

“그렇다고 입장을 바꿀 생각은 없습니다.”

고개를 들어 안도하던 이서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단호했다. 바로 직전까지 자책하던 모습은 거짓인 양 결연해 보이기까지 했다.

“하지만 네가 방, 방금 미안하다며.”

“예. 제 요령 없음이 형을 불편하게 만드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거기에 대해 사과드린 겁니다. 제 마음에 대해서는 죄송하지 않습니다. 조금도요.”

방금까지 소년 같다고 생각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이서의 표정이 난감해진다.

“형이 저를 인지하고 신경 쓰시는 건 좋지만, 불편하고 미안해서 제게 거리를 두는 건 싫습니다. 그렇게 밀려나지도 않을 거고요.”

그의 의지는 단단했다. 몸에 힘을 주고 말하는 모습에서 위압감까지 느껴졌다.

“하, 하지만 껄끄럽잖아. 계속 얼굴 보기 조금 그렇지 않을까?”

“……제 얼굴도 보기 싫으십니까.”

진강이 숫제 서글픈 기색을 띠며 고개를 떨궜다. 더욱 난처해진 이서가 어쩔 줄 몰라 하며 그를 소파에 앉혔다.

“아니, 그런, 이야기가 왜 그렇게 돼. 얼굴은 계속 보고 싶지. 내 말은 서로 불편하지 않겠냐는 뜻이야.”

“저는 안 불편합니다. 한 번도 형 불편하게 생각한 적 없습니다. 제가 한 말 때문에 형이 불편하시다면 노력을……. 해 보겠습니다.”

“노력을 어떻게……?”

“최대한 티 안 내겠습니다.”

“그냥 없던 일로 하면…….”

“그건 싫습니다. 어떻게 있던 일이 없는 일이 됩니까. 그냥 제가 좋아하는 티를 안 내도록 노력해보겠습니다. 원래도 제가 말하기 전까지 모르셨잖습니까.”

“그, 그냥 서로 모른 척하고 밥도 따로 먹고 그러다 보면…….”

사실 이서도 어떻게 해야 이미 아는 일을 모른 척할 수 있는지는 모른다. 그냥 잠시 거리를 두자고 하면 알아서 물러나리라 생각했다. 친하게 안 지내는 게 좋지 않겠냐는 차계원의 말도 계속 마음에 걸렸다. 진강과 지금처럼 지낸다면 그에게 돌아갈 작품은 계속 엎어질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미안, 진강아. 나는 그냥 나가서 먹을게.”

“휘준 씨 온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세 개 사 온 겁니다.”

“그래도…….”

“밥만 먹고 가겠습니다. 차 마시겠다고도 안 하겠습니다.”

나가기 위해 몸을 반쯤 일으켰다가 마지막 말에 풀썩 다시 앉았다. 어쩔 수 없이 마음이 약해졌다. 저렇게까지 하는데 버틸 만큼 제 성미가 굳지도 않다.

“알았어.”

“감사합니다.”

딱딱하던 그의 얼굴이 풀어진다. 혹시 마음이 바뀌기라도 할 새라 재빨리 젓가락도 손에 쥐여 준다.

“휘준이는 언제 온대?”

“지금이요. 아까 주차장이라고 했습니다.”

“아, 맞다. 진강아. 조금 전 본 사람 휘준이한테는 비밀로 해 줄 수 있을까?”

주차장이라는 말에 퍼뜩 김승주의 존재가 떠올랐다. 휘준은 김승주를 싫어했다. 그것도 아주 많이.

대학 시절부터 대놓고 싫어하더니, 그가 이서의 뒤통수를 때리고 도망간 후에는 아예 혐오하는 수준이었다. 오죽하면 휘준의 주사도 김승주의 멱을 따겠다 노래를 부르는 것이었다. 잘 취하지도 않는 놈이 한 번 취하면 김승주의 명줄을 그렇게 찾아댔다.

“그 뱀 같던 사람 말씀이십니까?”

“뱀? 뱀 닮았어?”

이서가 초밥 하나를 든 채 고개를 갸웃거린다. 김승주는 객관적으로도 잘생긴 축에 속했다. 낯을 가리는 저와 달리, 훤칠한 키에 리더십까지 좋아 사람이 줄줄 따랐다. 그의 곁에 서면 자신이 부족하기만 한 사람처럼 느껴질 때도 있었다. 그래서 더 그의 말이라면 다 따르려 했던 걸지도 모른다.

“예. 겉에 거죽이 하나 더 있는 것 같았습니다.”

“에이 거죽이라니.”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괜찮은 사람으로는 안 보였습니다.”

이 바닥에 있다 보니 사람들의 가면이 자연스레 읽혔다. 아까 그자는 거죽을 겹겹이 쓰고 있는 사람 같았다. 마치 뱀의 허물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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