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비도덕적 안락함-69화 (69/100)

#69

“아하하. 맞아. 괜찮은 사람은 아니지.”

유쾌하게 터지는 웃음을 진강이 물끄러미 바라본다. 꼭 물망초가 터지는 것처럼 청량했다. 가슴 아래쪽이 울렁거린다.

제가 백이서에게 끌린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이 바닥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거죽을 쓰고 있었다. 적어도 제가 본 사람들은 전부 그랬다. 배우, 매니저, 감독, 기획사 대표, 너나 할 것 없이 몇 꺼풀인지 세지도 못할 만큼 거죽을 쓰고 있었다.

그걸 안 좋게 여기지는 않았다. 환경이나 상황은 사람을 변화시키기 마련이니까.

그러나 그는 달랐다. 백이서에게서는 어떤 연기도, 거짓됨도 느껴지지 않았다. 적당히 솔직했고, 적당히 예의 있었다. 이 바닥이 아니라 어디라도 이런 느낌을 주는 사람은 드물 거다.

“사적으로 아시는 분입니까.”

조심스럽게 물었다. 궁금해하는 마음이 드러나지 않게, 최대한 일상적인 대화를 하듯이.

“으음.”

잠깐 인사만 했을 뿐이지만, 꿍꿍이가 있는 사람 같았다. 그런 이와 대체 무슨 관계인 건지 몹시도 궁금했으나 부담스러워할까 싶어 자세히 물을 수가 없었다.

멋대로 백이서의 어깨며 머리를 만지던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편한 사이라는 걸 과시하듯 옆에 착 달라붙어 앉아 있던 것도 별로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불쾌했던 것 같다.

“사적이기도 하고 공적이기도 하고?”

가볍게 대답한 이서가 초밥 하나를 입에 넣었다. 광어살의 고소함이 입 안 가득 풍겼다.

“이것도 드십시오.”

“어? 나 괜찮아. 이걸로 충분해.”

볼 한쪽 가득 우물거리는 탓에 발음 끝이 새어 나온다. 진강이 초밥 두 점을 이서 앞에 놔주며 본인의 목덜미를 만지작거렸다. 발음이 새는 건 저쪽인데 왜 제 낯이 간지럽고 뜨거워지는지 모르겠다.

“광어는 원래 잘 안 먹습니다.”

“그래? 신기하네. 광어 맛있는데.”

꿀떡 초밥을 삼킨 이서가 내어준 광어 초밥을 넣고 다시 우물거린다.

“저번에는 잘 먹지 않았어?”

“예? 예, 입맛이 바뀌었나 봅니다.”

“그새? 빨리 질리는 성격인가 보다.”

“그런 성격은 아닌데…….”

진강이 반박처럼 작게 변명했다. 이미 초밥에 정신이 팔린 이서는 다음으로 연어 초밥을 집고 있었다.

똑똑.

“휘준이 왔나 보다.”

예상대로 문을 열고 들어오는 건 서휘준이었다. 그리고 그는 들어서자마자 불만이 있는 사람처럼 이서를 보고 섰다.

“서운합니다.”

“……갑자기? 나 뭐 잘못했어?”

이서가 초밥을 안에 담은 채 살짝 입을 벌린다.

“어제 저 보시지도 않고 퇴근하셨지 않습니까. 3주 만에 오셔 놓고는.”

“아…….”

“……마저 씹으세요.”

“응.”

휘준이 초밥을 꼭꼭 씹어 넘기는 이서 앞에 자리 잡고 저도 젓가락을 든다.

“잘 먹겠습니다. 진강 씨.”

“많이 드십시오.”

장국 먼저 들이켠 휘준이 이서가 초밥을 다 삼킨 걸 확인한 후 말을 건다.

“어제는 뭐가 그렇게 바쁘셨습니까?”

“어……. 바쁘지는 않았는데 그냥 일찍 쉬고 싶었어. 나 찾았어?”

슬쩍 말을 돌리며 시선을 피했다. 자신이 차계원네 집에서 지내고 있다는 건 휘준도 진강도 몰랐다. 알리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적어도 휘준에게는 알려야 하는 게 맞겠으나,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말해야 할지 감이 안 잡혔다.

‘어떻게 말해.’

빚 때문에 집도 다 날아갔으며, 심지어 채권자는 차계원이 됐다. 진강의 작품 활동을 계속 방해하는 것도 차계원 같은데, 아무래도 그 원인은 제가 그의 심기를 건드려서인 듯하다. 그리고 차계원은 비정상적으로 제게 집착하는데 아무래도 그 이유는 자신과의 섹스가 마음에 들었기 때문 같다.

이 많은 것 중에 휘준이 걱정하지 않을 만한 건 단 한 개도 없었다.

“그냥 장난친 겁니다. 휴식 취하셨으면 좋죠.”

“고마워. 휘준이 너도 며칠 쉴래? 너야말로 한 번도 쉰 적 없잖아.”

“전 됐습니다. 쉬어 봤자 할 것도 없고. 이제 더 바빠질 겁니다.”

“우리가?”

그렇다며 고개를 끄덕인 휘준이 파일 두 개를 건넨다. 배우 프로필이었다.

“네. 이번에 배우 두 명 영입할 계획입니다. 대표님께 말씀드리려 했는데 쉬시는 거 방해하고 싶지 않아서 지금 말씀드리는 겁니다. 얘기가 길어질 것 같아서요.”

“진짜? 잘됐다. 누군데?”

이서가 기대감을 감추지 못한다. 그전 같았으면 꿈도 못 꿀 일이었다.

“저 들어올 때는 이렇게 초롱초롱하시지 않았던 것 같은데요. 너무하십니다.”

진강이 짐짓 서운한 척 휘준의 어깨너머로 프로필을 엿본다.

“에이, 아니야. 너 들어올 때가 제일 들떴었어.”

“크흠.”

헛기침하는 진강에게 휘준이 물을 내민다. 그가 단숨에 물병의 반을 비웠다.

“둘 다 여배우입니다. 한 명은 신인이고 독립 영화 위주로 몇 번 출연했었나 봐요. 본인이 직접 우리 회사에 프로필을 들고 왔습니다.”

“와. 당차네. 요즘도 그런 사람이 있어?”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고, 이야기만 들어도 보통내기가 아니라는 게 느껴졌다. 배우는 그래야 했다. 남들보다 당차고 악바리 근성도 있어야 버티기 유리하다.

“회사 측으로 메일 보냈었다는데 아무래도 누락됐었나 봅니다. 그래서 직접 왔고요.”

“다른 한 명은 강혜주 배우네?”

아침 드라마 위주로 활동하는 배우였다. 연기력도 괜찮고, 행실이나 성격도 좋았다.

“아. 저도 작품에서 뵌 적 있습니다. 쾌활하고 뭐랄까……. 조금 특이했습니다.”

“제가 만났을 때도 독특했습니다. 김건 씨랑 밥 먹고 있다가 마주쳤거든요. 김건 씨가 차계원 씨 매니저로 오래 있어서 알아봤나 봅니다.”

“그럼 이분도 먼저 우리 회사로 들어오겠다 하신 거야?”

“네. 김건 씨 보자마자 달려오더라고요. 다음날 저랑 미팅했습니다. 이분은 예능 쪽으로 도전하고 싶대요.”

“아하하. 정말? 신기하네. 항상 조용한 역할만 맡으셨잖아. 이미지도 차분한 편 아니야?”

“그래서 그걸 깨고 싶으신가 봅니다.”

“근데 괜찮을까? 우리 회사가 아직…….”

이서가 멋쩍게 웃는다. 배우들을 영입하면 좋기야 하겠으나, 지금 당장 진강의 작품도 지켜 주지 못하는 판국에 누구를 케어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그분도 드라마 끝난 지 얼마 안 돼서 일단 쉰다고 했습니다. 천천히 생각해 보자고 이야기됐습니다.”

“그렇구나.”

이서가 프로필 두 개를 차근차근 넘긴다. 한 명은 신인이라고는 하지만 독립 영화, 단역 등의 경력이 꽤 됐고, 강은주 배우는 이미 경력이 탄탄했다.

“혹시 이거 차계원 씨도 알아?”

“이걸 차계원 씨가 알아야 합니까? 저희 일인데요.”

“아, 아니. 그냥 물어본 거야.”

의아하게 묻는 휘준을 보며 아차 싶었다. 저도 모르게 차계원을 염두에 두고 있던 저 자신이 당황스러웠다. 어쩔 수 없었다. 안 그래도 회사고 뭐고 다 그의 것인데, 빚까지 그에게 갚아야 하니 절로 신경이 쓰였다. 이서가 버릇처럼 입술을 깨문다.

“저기, 휘준아.”

“네.”

“너도 지팩 엔터테인먼트 알지?”

“모르는 사람이 있습니까. 거기 요즘 기세 좋잖습니까. 연습생들도 많이 몰리고 있던데요.”

“그런 데가 배우만 관리하는 소속사랑 합병하면 어떻게 될까?”

“합병 알아보십니까?”

“아니, 만약에 말이야. 요즘에는 배우 아이돌 같이하는 곳도 생기는 추세잖아. 그냥 궁금해서 묻는 거야.”

“좋기야 하겠죠. 힘이 몇 배로 커지는 거고 이쪽 바닥에서 입지도 더 탄탄해질 테니까.”

“그런가?”

“아이돌 하다가 배우 하는 친구들도 많고 하니까요. OST 등도 같은 소속 아이돌에게 맡길 수도 있겠고요. 그런데 그게 왜 궁금하십니까? 그런 쪽으로 관심 없으셨잖습니까.”

“아, 아니. 기사를 좀 봐서. 합병하는 곳도 종종 보이길래.”

휘준의 말대로 합병에는 조금도 관심이 없었다. 일을 크게 벌이는 것도 싫었고, 김승주의 머리에서 나온 의견을 고려하기도 싫었다. 하지만 지금이 아니라면 제게 이 상황을 타개할 다른 기회가 또 있을까.

* * *

“예, 형. 아이 그럼요. 합병해요. 저 형만 믿고 진행하는 겁니다. 아시죠?”

김승주가 건들거리는 걸음새로 대로변을 빠져나갔다. 그가 머무는 모텔로 가려면 우측으로 난 골목길을 하나 빠져나가야 했다. 제 하루의 끝이 낡은 모텔이라는 게 자존심 상하지만 백이서를 완전히 구워삶을 때까지는 어쩔 수 없었다.

“형도 참, 내가 대표인데 상의는. 그런 게 필요하겠어요? 회사 사람들? 다 좋다고 하죠. 걱정 마세요.”

그는 누구보다도 영악하고 머리가 잘 굴러가는 사람이었다.

지금 케이뉴로 들어가 봐야 제 자리는 없을 거다. 어찌어찌 백이서의 옆구리를 찔러 자리를 마련한다 해도 이제 갓 성장하는 기획사의 어중띤 자리가 전부일 거다. 거기에 백이서와 서휘준의 눈치를 봐야 하는 건 당연지사였다.

그렇다고 다 된 밥을 놓치자니 아까웠다. 잠시 떠났었다 해도 제가 만든 기획사다. 응당 제 것이 돼야 하는 게 옳았다. 그 와중에 들어온 합병이라는 제안은 환상적이었다.

백이서는 적당한 카페 하나 차려서 쫓아내면 되고, 서휘준이야 백이서 뒤만 졸졸 쫓아다니는 놈이니 알아서 따라갈 게 뻔하다. 그럼 자신은 새로운 기획사의 이사가 되어 탄탄대로의 삶을 사는 거다. 완벽했다. 완벽해도 이렇게 완벽할 수가 없었다.

“용돈이요? 아이 됐다니까. 아이, 참. 알았어요. 들어가세요. 형님.”

김승주가 전화를 끊고 핸드폰으로 잔고를 확인한다. 선임이 이렇게 쩔쩔매는 이유를 안다. 차계원 때문이겠지.

“줄 거면 많이 줄 것이지.”

백만 원 남짓한 돈을 보며 가래침을 뱉으려던 때였다.

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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