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
타격음과 함께 김승주가 앞으로 고꾸라졌다. 떨어뜨린 핸드폰의 액정이 깨지고 돌부리에 부딪힌 머리에서 뜨끈한 피가 흘러나왔다.
“으으……. 씨발, 뭐야…….”
그가 일어나기 위해 아스팔트 바닥에 손을 대고 몸을 지탱했다. 누군가 허리를 걷어찬 것 같았다. 척추 쪽에서 찌르르한 고통이 올라왔다.
“으억!”
일어나려는 그의 등을 구둣발이 짓밟았다. 다시 바닥에 부딪히는 바람에 턱이 다 까졌다.
“어떤 양아치 새끼가, 씨발!”
사색이 된 그가 골목이 떠나가라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정갈한 구둣발 소리가 그의 얼굴 근처로 다가왔다. 곧, 그 구둣발이 김승주의 손을 지르밟았다. 손가락뼈가 짓뭉개지는 게 고스란히 느껴졌다.
“으아아아악!”
퍽.
머리를 울리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김승주의 의식이 점차 멀어졌다.
* * *
“늦게 왔네.”
거실에서 티브이를 보고 있던 이서가 현관으로 다가갔다. 차계원은 이서가 현관 앞에 올 때까지 들어오지 않고 있었다.
“나 기다렸어요?”
그가 생긋 부드럽게 웃으며 이서를 안아 든 후에야 신발을 벗었다.
“그건 아닌데, 나보고는 5시까지 들어오라 해 놓고 너는 늦게 오니까.”
혹시나 어제처럼 한 소리 들을까 싶어 부랴부랴 왔던 이서가 불퉁하게 툴툴댔다. 차계원이 시계 앞에 서 있는 게 상상돼 마당에서부터는 뛰어오기까지 했더란다.
“많이 기다렸구나. 이제 나 없으면 잠도 안 와요? 이렇게 뽈뽈 반기러 올 만큼?”
달짝지근한 목소리로 물으며 이서의 정수리에 턱을 비빈다. 이윽고 이서의 귓바퀴를 진득하게 핥아 올린다.
“안 기다렸다니까. 아직 9시니까 안 잤지.”
“흐음. 심술부리네. 알았어요. 다음부터 나가면 일찍 와야겠네.”
“하아…….”
이서가 작게 한숨을 폭 내쉰다. 저 좋을 대로 알아듣는 성격이야 익히 알고 있지만, 가끔은 체한 것처럼 답답했다.
“만약 늦으면 연락 줄게요. 이제 됐죠?”
멋대로 해석하고 달래더니 코끝을 앙 문다. 그는 이갈이하는 짐승처럼 하루도 빠짐없이 여기저기 깨물었다. 그나마 얼굴은 약하게 물어 천만다행이었다.
“오늘은 뭐 했어요. 회사에서.”
굵은 검지가 자신이 깨문 코끝을 톡톡 건드린다.
“밥 먹었어.”
“별일 없었고요?”
순간적으로 낮에 김승주가 찾아왔던 일이 스쳐 지나갔으나 입을 꾹 다물었다. 개인적인 일까지 말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응, 없었어…….”
“이진강이랑 붙어먹지도 않았고?”
“안 붙, 안…… 아니야!”
차계원이 이서의 턱을 잡아 고정시키고 나른한 얼굴을 들이민다. 그리고 나른하던 얼굴이 순식간에 눈앞에서 싸늘해진다.
“그냥 물어본 건데 발끈하네요. 수상하게.”
“아닌데 물어봐서…….”
섬뜩함에 목을 물리며 중얼거렸다. 그러나 턱이 잡힌 탓에 움직여지지 않았다. 첨예한 눈빛이 이서의 얼굴을 면면이 뜯어봤다.
“그래요. 착하고 심성 고운 내가 믿을게요.”
“…….”
두 번만 더 심성 고왔다가는 심장 마비로 죽게 생겼다. 이서가 속으로만 흠씬 구시렁거린다. 속으로 구시렁대는 게 들릴 리도 없을 텐데 또 코를 물렸다.
“난 뭐 했는지 안 물어봐요? 제가 늦게 들어왔으면 궁금해해야죠.”
“별로 안 궁금한데…….”
“내가 사고라도 치고 왔으면 어쩌려고 태평해요?”
“……어디 갔다 왔는데?”
“말 안 해 줄래요. 대표님 괘씸해서.”
그가 또 싱긋 웃는다. 진짜 알다가도 모르겠다. 그런데 또 전적이 있다 보니 마냥 무시하고 넘기기도 그랬다. 불안한 마음이 스멀스멀 들기 시작했다.
“진짜 사고 치거나 한 거 아니지?”
“궁금하면 내일 기사들 확인하면 되죠.”
무성의한 대답에 백이서의 표정이 울상이 된다.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눈꺼풀에 계원이 입을 맞춘다. 울리는 것도, 놀려먹는 것도 재밌었다.
이참에 진짜 사고 하나 크게 쳐 볼까. 안절부절못하면서 뚝뚝 울면 더 즐거울 것 같은데.
“사, 사고 쳤어? 내일 또 기사 나와?”
계원이 이서를 품 안에 밀착시켜 더 세게 끌어안았다. 힘을 뺀 몸이 봉제 인형처럼 축 처져서 늘어지듯 안긴다.
“안 쳤어요. 산책했어요.”
방으로 올라가려던 걸음을 돌려 소파에 자리 잡았다. 백이서를 무릎 위에 앉혀 놓으니 방까지 올라가기가 귀찮았다.
“저기, 있잖아. 너 영화도 들어가고 하니까 당분간 다른 일 맡기는 버겁겠지?”
휘준에게 들은 바로는 그에게 들어온 광고나 화보 등이 차고 넘친다고 했다. 그가 자동차 광고를 찍은 후로 용기 낸 광고주들이 많아진 것 같다는 게 휘준의 의견이었다.
그에게 작품이 차고 넘치는 일이야 일상이지만 근래 들어온 작품들은 유난히 괜찮은 것들이 많다고 했다.
“괜찮은 제안이 많다더라고. 광고나 화보는 그렇게 오래 안 걸리니까……. 꼭 하자는 건 아니고 물어나 볼까 싶어서.”
평소라면 말도 못 꺼내 봤겠지만, 오늘따라 차계원은 사근사근했다. 현관에서부터 유독 기분이 좋아 보였다.
“뭐 뭐 들어왔는데요?”
“들어온 거야 많지. 항상 많잖아.”
“괜찮은 거 몇 개만 말해 봐요.”
“어……. 명품 브랜드 하나랑, 이건 아예 뮤즈가 돼 달라는 거 같아. 그리고 내년 여름 화보 하나랑, 위스키 광고. 이 세 개가 제일 낫지 않을까 싶은데.”
이서가 손가락을 하나, 둘 구부리며 휘준이 줬던 제안서들을 떠올렸다. 말이 길어질수록 차계원의 표정이 지루해지는 바람에 조바심이 일었다.
“너 힘들면 하나도 안 해도 돼. 영화도 있으니까. 물어만 본 거야. 물어만.”
“그거 세 개 계약해요.”
“저, 정말? 세 개다?”
“응.”
귀찮다는 듯 대꾸한 그가 이서의 머리칼에 손을 감는다. 소파에 기대 느릿하게 머리칼을 꼬는 손길이 여유로웠다. 가만 보면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는 게 그의 습관 중 하나같았다.
“바쁘지 않겠어?”
“영화 들어가기 전까지 시간 있잖아요. 여름 화보는 영화 끝나고 찍으면 되고. 일정 조절도 내가 알려 줘야 하는 건 아니죠?”
“어어, 아니야! 그건 알아서 할게. 안 힘들게 맞춰 볼게.”
“그래요.”
머리카락을 몇 번 잡았다 놓기를 반복하던 그가 손가락 하나에 빙 둘러 꼰다.
“염색한 적 있어요?”
“아니, 없어.”
“한 번도?”
“응. 왜?”
“색이 옅어서.”
계원이 머리카락을 가져가 냄새를 맡는다. 제집에서 지내고 있으니 분명 같은 샴푸와 바디워시를 쓸 텐데 향이 다르다. 머리색도 자연모 치고는 많이 밝았다. 하기야, 아랫도리 털도 옅기는 했다.
“있지. 그, 말할 거 또 있는데.”
“해 봐요.”
일 이야기일 게 뻔해 그만두라 할까 했으나, 저 조잘대던 입을 멈추기는 싫었다. 어차피 물어볼 말도, 할 말도 다 하면서 주저하는 척하는 것도 봐줄 만하고.
“희준이가 그러는데 우리 회사에 배우 두 명 더 들어온다더라고.”
“그래요?”
이렇게 조잘거리는 걸 볼 때면 백이서를 들여다 앉혀 놓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매번 봐도 보기 좋다. 진작 이랬어야 했다. 간 보고 사정 봐주고 할 것도 없었다.
“으응……. 한 명은 신인이고 한 명은 너도 알 거야 강혜주 배우라고.”
“모르는데.”
관심 없다는 듯 무뚝뚝한 대꾸에 이서의 마음이 조마조마해진다. 분명 대표는 자신이건만, 차계원의 허락이 떨어져야 할 것만 같았다.
“아침 드라마에 잘 나오는 배우 있잖아.”
“아아.”
차계원이 자신의 표정이나 말투에 하나하나 반응하며 설명하는 얼굴을 내려다본다.
“고작 그 말 하는데 뭘 그렇게 눈치 봐요.”
“그. 들어와도 되는 거지?”
“……그걸 나한테 묻는 거예요?”
작게 주억거려지는 턱에 계원이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기울인다.
“왜?”
“어, 네가 저번에 그랬잖아. 이진강 씨 계약할 때 싫다고 했어야 했다며. 이번에도 그래야 했나 싶어서…….”
이서가 손을 만지작거린다. 괜히 들어와서 작품 하나 못 맡게 될 바에는 애초부터 영입하지 않는 게 낫다.
“그래서 허락받으려고?”
“응? 으응.”
“아아.”
계원이 이서의 머리칼을 한 바퀴 더 빙 꼰다. 반곱슬 머리카락은 만져 줄수록 복슬복슬해졌다.
“저기, 대답 좀 해주면 안 될까…….”
불만 서린 음성이 웅얼웅얼 계원의 대답을 채근했다.
“마음대로 해요. 상관없으니까.”
“그, 그렇구나.”
그가 다른 손으로 이서의 목덜미부터 턱선을 잡아 젖힌다. 이서가 목이 위로 꺾인 채 차계원과 눈을 마주쳤다.
“왜, 왜 그래?”
“계속 그러면 돼요.”
차계원이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이서가 무슨 뜻인지 몰라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뭐를……?”
“나한테 하나하나 물어보고, 허락 맡고. 그러면 된다고요.”
“아…… 으응.”
이서가 눈을 피한다. 들릴 듯 말 듯, 작은 제 대답이 초라했다.
* * *
회사에 일찍 출근하면서도 이서는 불안했다. 차계원이 광고와 화보도 찍는다 했고, 배우 영입에도 별말 없었는데 이상하게 그랬다. 김승주가 다녀간 후로 계속 불안감이 소용돌이쳤다.
“빨리…….”
이서가 주차장 엘리베이터 버튼을 연거푸 누른다. 그의 마음이 변하기 전에 어서 가서 계약서를 넘기면 이 초조함이 조금 가실 수 있을까.
“백이서, 이서야……!”
막 엘리베이터에 오르려 할 때였다.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뒤돌아봤던 이서가 기겁하며 벽에 달라붙었다.
“혀, 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