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
“뭐?”
이서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도망이라니 어디로. 게다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김승주와 같이 도망이라니 말도 안 된다.
“그 새끼 정상 아니야. 살인자야. 날 죽이려 했다고. 사람도 죽일 수 있을 놈이라니까 그건!”
“형 제발 말도 안 되는 소리 좀 하지 마……. 혼자 도망가서 숨어 살다가 이제 돌아와서는, 같이 도망치자고? 그럼 회사는? 이번엔 누구한테 떠맡길 건데. 빚만 있는 회사를 대체 누구한테 떠맡길 거야? 그런 생각은 빚이라도 갚고 해야지…….”
온몸에 맥이 탁 빠진다.
그가 정상이 아니라는 건 김승주보다 자신이 더 잘 안다. 차계원과 계약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몸소 깨달았다. 그러니 저도 찍소리 못 하고 그에게 휘둘리는 것 아닌가.
“그리고 상식적으로 병원을 가거나 해야 할 거 아냐, 도망가자는 건 어디서 나오는 생각이야…….”
“날 죽일 거라니까? 차계원이 날 죽일 거라고! 네가 못 봐서 그래. 거기 없었어서 그래!”
김승주가 겁에 질린 눈동자로 흥분해 소리쳤다. 그는 단언할 수 있었다. 차계원은 자신을 죽이려 했다. 어떤 억하심정인지 모르겠으나 그냥 때리거나 손봐 준다의 느낌이 아니었다. 죽이려다가 살려 둔 거다.
“그렇다고 치자. 근데 형 자꾸 잊나 본데, 우리 남보다 못한 사이야. 이런 대화 나누고 자시고 할 사이가 아니잖아.”
“이서야!”
김승주가 애원하듯 이서의 팔을 흔든다. 힘이 다 빠진 팔은 옆에서 김승주가 흔드는 대로 흔들렸다.
“형도 이제 어린 나이 아니면서. 회사는 어쩌고 도망을 가쟤…….”
도망이라니. 할 수만 있다면 저도 하고 싶었다.
김승주가 자신을 버리고 갔을 때, 몇 년을 발버둥 쳐도 늘어나는 이자만 남았을 때, 차계원이 제 목을 쥐고 흔드는 지금. 매 순간순간 도망가고 싶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게 어디 말처럼 쉬운가.
“형이야 쉽겠지.”
이서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진짜 도망가자는 게 아니라 발 빼자는 뜻이야. 내가! 내가 다 방법이 있어. 그래서 아까부터 말했잖아! 합병해야 한다고!”
그가 자신만 믿으라는 듯 가슴을 탕탕 친다. 그러다 다친 손이 아픈지 신음을 내뱉는다.
“하아……. 형. 나 이제 뭘 시도할 여력이 없어. 너무 지쳐서 그냥, 그냥 쉬고 싶어. 하려면 나 나가고 나서 형이 회사 맡은 다음에 해.”
“아니야 이서야. 지금 해야 돼. 잘 생각해. 합병만 하면 빚 다 갚고 편하게 지낼 수 있어.”
“아니, 그러니까……”
“회사 넘기자.”
* * *
모텔에서 깨어난 김승주는 그대로 달아나려 했었다. 차계원은 신고해 콩밥을 먹이고, 자신은 다시 4년간 몸을 숨겼던 촌 동네로 돌아가려 했다.
‘도망갈 기회를 드릴게요. 대신 눈에 띄면 그다음 기회는 없어요.’
언제 속삭였는지 모를 선뜩한 음성이 머릿속을 기어 다녔다.
이를 갈며 부들거리는 다리로 1층 카운터까지 내려갔다. 다행히도 핸드폰은 깨져 있을 뿐 작동은 됐다. 경찰을 불러 신변 보호라도 요청할 생각이었다.
‘증거가 없네요.’
‘예? 무슨 소리입니까! 이렇게 맞았는데, 제가 차계원한테 이 정도로 맞았다고요! 차계원 몰라요? 국민 배우 차계원!’
‘그걸 우리가 어떻게 믿냐고요. 다짜고짜 차계원한테 맞았다! 이러면 믿는 사람이 누가 있어요.’
신고로 온 경찰 둘은 그의 몰골에 놀란 것도 잠시, 그의 입에서 차계원이라는 이름이 나오자 그때부터는 미친놈 보듯 했다.
‘CCTV는요. CCTV 있을 거 아니에요! 그거 보면 알 거 아닙니까!’
‘아유. 그러니까. 아까도 말씀드렸잖아요. 모텔 입구 CCTV는 확인해 보니까 고장 나 있고. 그쪽이 맞았다는 골목에는 원래부터 CCTV가 없다니까요.’
‘그런 게 어디 있어! 동네 구멍가게에도 CCTV가 있는 나라에서!’
발광하듯 난리 치는 김승주 옆에서 경찰관 하나가 지겹다는 듯 귀를 후비적거렸다.
‘그러게요. 동네 구멍가게에도 있는 CCTV가 그쪽이 온 골목에는 없었거든요? 그렇게 억울하면 CCTV 있는 데로 다니셨어야지.’
‘이거 보고도 그런 말들이 나와요? 이러고도 민중의 지팡이입니까? 예? 이 상처들이 안 보이는 거냐고요!’
그가 너무 부어 제대로 떠지지도 않는 눈을 가리키며 날뛰었다.
‘이봐요, 아저씨. 혹시 어제 술 드셨어요?’
나이가 좀 더 있어 보이는 경찰관 하나가 김승주의 몸 가까이에 다가와 코를 킁킁댔다.
‘술은 무슨 술!’
백이서와 만난 후 저녁이나 먹고 돌아온 게 다였다. 술이라고는 한 모금도 입에 대지 않았었다.
‘하고 마, 술 냄시. 청년 술 자신 거 맞구만 그래! 내 방 치울라꼬 올라가니께 술병이 병이 말도 못 하드마. 이 보소! 이!’
그때 계단에서 내려오던 모텔 주인이 술병들을 들이밀며 인상을 찌푸렸다. 경찰관 두 명도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술병을 건네받았다.
‘그, 그게 내 방에서 나왔다고요?’
그러고 보니 정말로 제 몸에서 술 냄새가 진동하고 있었다. 몰랐다는 게 어이없을 정도였다.
‘그라믄! 내가 만들어냈겠으요? 젊은 사람이 참.’
모텔 주인이 혀를 끌끌 차며 카운터 안으로 들어갔다. 진상 걸렸다며 나가려는 경찰관들을 기를 쓰고 붙잡았다.
‘어쨌든 차계원이 그런 거 맞으니까 신고해 줘요! 날 죽인다고까지 했어요! 죽인다 했다고요!’
‘신고가 아예 성립이 안 된다니까요. 하다못해 증인이라도 있어야 신고를 하죠. 그리고 신고돼도 이건 무고죄예요. 역으로 당신이 잡혀 들어간다고. 차계원이 할 일이 없어서 당신을 패?’
‘술 좀 곱게 먹고 다닙시다. 예? 우리도 바쁜 사람들이에요.’
‘진짜라고…….’
김승주가 쓰러지듯이 털썩 주저앉았다.
‘이만 가자, 가. 연예인들도 피곤하겠어. 별의 별사람 다 꼬이니 말이야.’
* * *
그렇게 신고도 하지 못한 채 이곳으로 달려오게 된 것이다.
“회사 넘겨받을 사람 있어. 기억나지? 내가 어제 말한 선임.”
“어…….”
“오는 길에 연락했었어.”
합병 이야기를 꺼낼 때부터, 선임이 진짜 원하는 건 차계원이라는 걸 눈치챘었다. 차계원 먼저 본인의 소속사에 자리 잡게 해 달라고 한 속셈도 뻔하다. 그를 통해 배우 기획사의 포문을 열기 위해서일 거다.
뭐가 됐든 상관없었다. 자신은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으면 되는 거였다. 새로워질 기획사의 이사 자리를 맡아 꿀이나 빨면 끝이었다.
“합병한다고 우리한테 있는 빚이 없어지는 건 아니잖아.”
“아니, 없어져.”
하지만 계획이 틀어졌다. 차선책을 선택해야만 했다.
“회사 자체를 지팩에 넘기자. 그러면 빚도 같이 넘어가게 돼.”
보통 두 회사를 합병하기까지는 시일이 걸린다. 그전에 차계원을 이용하면 언론 플레이를 쏠쏠히 할 수 있다. 합병 전까지 세간의 주목을 받으며 상장을 위한 디딤돌을 닦을 수 있는 건 물론, 상장 후에 투자자들의 투자도 자연히 따라올 거다.
“그쪽에서 빚을 떠맡겠대……?”
“어. 선임이 갚는대. 우린 이제 아예 0으로 돌아가는 거야. 아예 4년 전으로 돌아가서 다시 시작한다고 생각하자.”
선임은 빚이 있다 해도 얼씨구나 좋다 하며 받아들였다. 차계원만 있으면 2억 정도야 푼돈이니 당연한 일이었다. 거기에 이진강까지 있으니 앞으로의 회사 성장을 생각하면 케이뉴는 지팩에 굴러 들어가는 호박이었다.
“대신 우린 나가야 돼.”
그리고 김승주는 꽤 큰 금액의 돈을 받기로 했다. 약속했던 이사 자리를 물리는 대가였다. 그러려면 백이서도 같이 데리고 나가야만 한다. 앞으로 있을 합병에 어떤 터치도 하지 않겠다는 약속으로 받아낸 대가다.
“자, 잘 모르겠어. 나는…….”
“정신 차려! 내 몰골 안 보여? 너 그런 미친 새끼랑 같이 일할 거야? 어차피 너 이 일 하기 싫어했었잖아. 아까 쉬고 싶다며, 나가고 싶다며! 뜸 들일 것도 없어 지금이야.”
백이서가 미적거리다 회사에 남기라도 하면 안 됐다. 이미 받기로 한 돈의 절반이 계좌로 들어왔다. 한마디로 회사를 팔아 남기는 걸 조건으로 받은 돈이다. 뒤탈 없이 온전히 회사를 전부 넘겨야 남은 절반도 들어올 거다.
“당장은 무리 아닐까? 차계원 씨 이제 영화 맡았는데…….”
그래서 지금이어야 했다. 지금처럼 온종일 차계원으로 도배가 되어 있을 때 그가 지팩으로 옮겨 줘야 효과를 더 톡톡히 볼 수 있다. 그리고 일이 빨리 진행될수록 절반의 돈이 들어오는 날도 빨라진다.
“이거 기회야! 차계원이 이 회사에 있는 지금만 잡을 수 있는 기회. 빚 다 갚고 이 바닥 뜰 수 있는 마지막 찬스라고!”
“하지만…….”
“회사 자체가 넘어가는 거니까 스케줄도 걱정할 거 없어. 이름만! 그래 이름만 바뀐다고 생각하면 돼. 그냥 우리만 쓱 빠지는 거야.”
이 모든 그림을 완성하기 위해선 현재 대표인 백이서의 동의가 절실히 필요했다. 일단 같이 떠난 후 대충 카페나 차리자며 헛바람을 넣을 계획이었다. 그러다 회사가 완전히 넘어가고 모든 게 정리되면 돈만 받고 혼자 멀리 떠나면 그만이다.
차계원에게 맞은 것도 어찌 보면 잘된 일이다. 애초부터 돈이 필요해서 올라온 거였다. 모로 가도 서울로만 가면 된다고, 이 상황을 백이서를 밀어붙이는 데 이용하면 된다. 그리고 제 몫의 돈을 챙긴 후 여행이나 실컷 하다 새로운 일을 시작해 볼 심산이었다.
“합병이 하루아침에 되는 건 아닐 거 아냐. 어차피 시간이 걸릴 텐데…….”
“그러니까 네가 차계원 먼저 설득해서 그 회사로 보내. 그다음은 합병이고 정리고 선임이 알아서 하기로 했어. 우리는 평화롭게 살면 되는 거야.”
“고민할 시간을 조금이라도 주면 안 될까.”
“이서야.”
“이런 식으로 결정하기가…….”
“너 차계원이랑 잤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