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비도덕적 안락함-73화 (73/100)

#73

“지금…….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이야……?”

뜸 들이던 백이서의 눈이 혼란스럽게 흔들린다. 김승주의 얼굴에 회심의 미소가 떠올랐다. 원래도 뭐 하나 결정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는 놈이었다. 무슨 이야기를 이용해서라도 생각할 틈 없이 몰아붙여야 했다.

“아무 뜻 없어.”

김승주가 차분한 얼굴을 가장할수록 이서의 얼굴은 사색이 돼 갔다. 차 안에 고요하고 불편한 침묵이 흘렀다.

“어떻게 알았어?”

가늘게 새어 나가는 목소리는 가다듬는다고 가다듬어지지 않았다. 김승주는 떠보는 기색이 아니었다.

“모르는 게 이상한 거 아닐까.”

그가 검지로 이서의 목덜미의 위쪽, 그것도 머리카락이 끝나는 지점을 콕 찍어 가리켰다. 이서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곳이었다. 급하게 백미러를 제 쪽으로 돌려 머리를 들이밀어도 보이지 않았다. 거울로도 확인하기 힘든 위치였다.

“이 정도면 일부러인데.”

“……차계원 아니야.”

이서가 뒤늦게 손바닥으로 그가 가리켰던 위치를 가린다. 물어보지 않아도 어떤 자국일지는 뻔했다.

“아니라고 하기에는 늦지 않았어?”

김승주가 입을 비틀며 비웃었다. 어제 얻어맞은 볼 안쪽이 다시 터져 아팠다. 하도 얼얼해 감각도 안 느껴질 지경이다.

생각해 보면 쉬웠다. 차계원이 케이뉴에 들어간 게 고작 몇 달이다. 그런데 백이서는 옷이며 넥타이 하나까지도 디자이너 브랜드 내지는 명품으로 휘감고 있다. 명품 브랜드에 관심이 없는 건 물론이요, 액세서리도 잘하지 않던 놈인데 시계도 어디 장인이 만든 것처럼 정교한 걸 차고 있었다.

지금 그들이 앉아 있는 차도 외제차였다. 얼마 전 차계원이 광고에서 타고 있던 그 모델.

“네 성격에 그런 간 큰 짓 할 리는 없고, 차계원이 들쑤셨겠지.”

백이서는 여리여리한 스타일은 아니지만 묘하게 사람의 시선을 끄는 구석이 있었다. 분명 키도 평균을 웃돌고, 체구도 탄탄하게 균형 잡힌 몸인데 가끔 야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거기에 또 얼굴은 유순하면서 단정한 느낌이라, 욕망과 함께 이상한 죄책감도 같이 불러일으켰다.

차계원의 마음이 어땠을지 자신은 십분 이해할 수 있다. 눕히고 싶은 류의 호기심이 일었겠지. 제가 과거에 그랬던 것처럼.

“그리고 너 원래 누가 옆에서 들쑤시면 병신처럼…….”

그가 말을 하다 말고 멈춘다. 자신이 생각해도 지금 할 말은 아니었다. 백이서는 아까보다 더 얼굴색이 질려 있었고, 입가도 파르르 떨렸다.

“…….”

“하아. 네 탓을 하려는 게 아니라……. 보는 내 마음이 안 좋아서 그래. 이러다 너 어떻게 될지 눈에 훤해서.”

“……형 마음이 안 좋을 필요가 뭐 있어.”

“말했잖아, 나는 너 사랑한다고. 아닌 적 없었다고.”

차창 쪽으로 홱 고개를 돌린 이서 뒤에서 그가 애절하게 말한다.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가슴 아픈 사랑 고백쯤은 된다고 착각할 정도였다.

소용없는 말들이었다. 억울함도 시간도 보상해 줄 수 없는.

“제발 그런 말 좀 하지 마. 형 한 번 좋아한 대가로 내가 저당 잡힌 것들을 보라고. 지금 이 상황도……!”

그러나 울음을 삼키는 목소리가 김승주에게는 호재였다.

“걱정하는 것도 문제가 돼? 사람 마음을 어떻게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 걱정도 마음대로 못해? 내가 너한테 죄지었다고 해서 그 정도도 못 하는 거야?”

“누가 누구 걱정을…….”

“네 말대로 모든 상황의 원인은 나한테 있잖아. 그런데 내가 어떻게 네 걱정을 안 해. 사람 마음이 칼로 무 자르듯 되는 것도 아닌데.”

“…….”

“까놓고 말해서 나 혼자 도망가려면 갈 수 있었어. 그런데 너한테 또 등 돌리는 모습 보이기도 싫고, 네가 계속 걱정되니까 이 꼴로라도 온 거야.”

백이서가 침을 꼴깍 삼킨다. 경직돼 떨지도 못하는 턱을 김승주가 잡아 천천히 자신 쪽으로 돌렸다.

“나를 봐. 응? 나 좀 봐 이서야.”

좌석 아래로 꽂힌 시선이 들릴 줄을 몰랐다.

“나한테는 말해도 돼. 나는 그냥 우리 둘이 회사고 빚이고 다 벗어났으면 좋겠어.”

그가 계속해서 속삭였다.

“차계원, 우리 회사로 어떻게 데려온 거야? 처음 계약할 때 가타부타 오간 이야기가 있을 거 아냐.”

김승주가 이서의 어깨를 부드럽게 잡으며 넌지시 묻는다. 그는 회사를 지칭할 때마다 계속 ‘우리’라는 단어를 붙이고 있었다. 서울에 발을 디딘 순간부터 자연스럽게 입에 붙은 단어였다.

“직접 왔어.”

“직접?”

“우리 회사에 들어오고 싶다고.”

“우리 회사에 먼저? 왜?”

그가 도저히 이해 가지 않는다는 얼굴로 되물었다.

“나도 몰라…….”

시선을 피하는 이서의 목소리가 자신감 없이 기어들어 갔다.

“아무리 내가 없었다 해도 그런 것마저 모르면 어떡하냐, 이서야. 이 바닥에 살쾡이 같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줄 알면서.”

“물어는 봤었어.”

“그랬는데.”

“정확하게 말을 안 해 줘서……. 그냥 우리 회사가 편하고. 원하는 대로 할 수 있어서 그런 거 아닐까, 추측은 하고 있어.”

“아니, 이서야. 어휴.”

그가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골칫덩어리를 대하듯 내쉬는 한숨에는 한심하다는 뜻이 내포돼 있는 것 같았다.

“차계원이 보기에도 네가 호구 같았나 보네.”

“…….”

이서가 차마 부정도 못 하고 손가락으로 무릎의 바지 자락만 구긴다.

띠링. 띠링.

벨소리와 함께 다리 옆에 대충 내려놓은 핸드폰 액정이 빛났다. 이서와 김승주의 시선이 동시에 핸드폰으로 옮겨갔다.

“차계원 집안도 장난 아니라더라. 네가 더 잘 알겠지만.”

그가 핸드폰을 휴지 집듯 두 손가락으로 집어 이서의 무릎 위에 떨어뜨렸다.

“목적 없이 우리 회사로 들어왔을까? 굳이 그 좋은 곳 다 놔두고?”

“……말 돌리지 말아 줘.”

“그 잘난 인간이 네가 좋아서 그러는 건 아닐 거 아냐. 이대로면 너 후회해. 단물 쏙 빼먹고 버려질걸? 그 전에 나처럼 두들겨 맞거나 뭘 뒤집어쓸 수도 있고.”

“그걸 형이 어떻게 확언해.”

“물론 그 정확한 속내는 나야 모르지.”

아까 가리켰던 목덜미를 짚는 그의 목소리에는 이야기가 길어질수록 자신감이 붙어 갔다. 반대로 이서의 목소리는 점점 작아졌다. 수그러든 고개도 들릴 줄을 몰랐다.

“네 몸을 즐기려는 건지 다른 이유인지 알 게 뭐냐고. 확실한 건 어디에라도 이용될 거라는 거야. 막말로 우리 이용해 탈세라도 해 봐. 범죄 저지르고 우리한테 뒤집어씌우기라도 하면? 힘도 없는 우리가 빠져나갈 구멍이 있을까?”

김승주가 얼굴을 들이밀며, 뱀처럼 속삭인다. 혀가 두 갈래로 갈라져 날름거리는 것 같았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뭘 어떻게 해. 차계원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설득하라는 거지.”

이유도 모르고 반병신이 될 정도로 맞은 뒤 살해 협박까지 들었다. 돈이라도 챙겨 달아나야 타산이 맞았다.

“하지만…….”

“이서 너는 다 좋은데 가끔 답답할 때가 있어.”

더 말을 붙이려는 백이서의 입을 김승주가 익숙한 핀잔으로 막는다. 모든 걸 포기한 사람처럼 더 수그러지는 고개에 우월감과 승리감이 들었다.

“차계원 씨만 먼저 보내면 다 되는 거 맞지. 나머지는 형 선임이라는 사람이 알아서 해 주는 거…….”

“그렇다고 몇 번 말해.”

“…….”

“자, 계약서. 선임 만났을 때 받아 놨던 거야. 여기에 사인만 하게 만들어. 그럼 내일이라도 우린 자유로워질 수 있어.”

그가 기어코 이서의 품에 서류 봉투를 안기고 차 문을 열었다.

* * *

차에서 내리자마자 김승주는 쏜살같이 사라졌다. 혼란스러운 마음으로 남겨진 이서만 안절부절못했다. 핸드폰에 찍힌 두 통의 부재중 전화가 그 어떤 질책보다도 두려웠다.

“…….”

차에서 내린 이서는 오늘 넘기려 했던 광고, 화보 계약서와 김승주한테 받은 소속사 이전 계약서를 양쪽으로 나눠 들었다. 둘 다 이서 손안에 있기에는 무거웠다.

“어떻게 해야…….”

계속 원하던 일이었다. 빚과 알량한 책임감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지는 일. 차계원의 휘둘림에서도 벗어나는 것.

그러나 걸음을 옮길수록 마음이 무겁고 초조했다. 뭐라고 말하며 차계원을 설득해야 할까. 이건 언제 내밀면 좋을까. 집에 가자마자 바로? 밥 먹은 후? 아니면 자기 전? 차라리 문자로?

띠링. 띠링.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다시 울리는 핸드폰이 고민을 멈추게 했다. 이번에도 안 받으면 차계원 성격에 아예 찾아올지도 모른다. 통화 버튼을 누르기 전에 심호흡을 길게 했다. 그래도 초조함은 나아지지 않았다.

“어, 여보세요?”

[어디예요?]

기다렸다는 듯이 들려오는 목소리는 낮게 가라앉아 있었으나 다행히도 화난 것 같지는 않았다.

“나, 나 회사.”

이서가 약간의 안도와 함께 대표실 문고리를 돌렸다.

“그래요?”

“악!”

그리고 문을 열자마자 뒤로 엉덩이를 박으며 넘어졌다. 문 바로 앞에 차계원이 핸드폰을 귀에 댄 채 서 있었다. 그 무표정한 얼굴과 살짝 기울어져 있는 고개가 이서의 눈에는 야차처럼 보였다.

“일어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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