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
얼떨결에 내밀어진 손을 마주 잡자 몸이 쑥 하고 위로 올라갔다. 문 하나를 두고 차계원은 대표실 안쪽에, 이서는 바깥쪽에 서 있었다. 이서의 발치를 내려다보며 그가 탐탁지 않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거기도 회사기는 하죠.”
“어, 어. 응…….”
그가 한쪽 입매를 비틀었다. 이서의 발이 대표실로 들어가지도 못하고 주춤주춤했다.
“다음부터 제가 물을 땐 뭉뚱그려 말하지 마세요. 대표실 로비. 1층. 똑바로 말해 주세요.”
차계원은 음절을 하나하나 끊어 가며 말하고 있었다. 이서가 품에 안은 계약서에 더 꼭 힘을 주었다.
“뭐 해요. 들어와요.”
“아 그, 주차가 잘 안 돼서 시간이 걸렸는데, 그 전에 편의점에 들러서 뭐 좀 사기도 했거든? 근데 편의점 줄이 길었어.”
지레 겁먹은 이서가 들어가지도 못하고 늦게 도착한 것에 대한 변명만 주절거렸다. 줄이 길었다는 말을 할 때는 두 팔을 넓게 벌려 어필하기까지 했다.
“어, 엄청 길었어. 앞에 사람이 계산을 동전으로 하는 거야. 그게 내 바로 앞사람이었는데…….”
“누가 물어봤어요?”
“아, 아니. 안 물어봤어…….”
무뚝뚝하게 떨어지는 음성에, 이서가 변명하느라 벌렸던 양팔을 천천히 내린다.
“그냥 너 궁금할까 봐.”
“안 궁금하니까 들어오기나 하시라고요.”
탁.
계원이 이서를 끌어서 안으로 들이고 문을 닫았다. 굳게 닫히는 문소리가 이서의 귀에는 감옥의 철창이 닫히는 것처럼 들렸다.
언제 온 걸까. 주차장에서 차계원의 차는 보지 못했다. 혹시 그가 김승주를 봤을까? 만약 그랬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간식거리 사 왔어요.”
머릿속이 복잡한 이서와 달리, 차계원은 그저 평온하게 테이블 위에 간식거리를 풀어놓았다. 어제 그에게 죽기 직전까지 맞았다는 김승주의 말이 거짓말처럼 느껴졌다.
“언제 왔어?”
“아까요.”
“아…….”
“와서 먹어요. 과일 좋아하잖아요.”
차계원이 태연하게 소파에 기대 과일 하나를 입에 넣는다. 그리고 턱짓으로 이서에게도 앉으라는 시늉을 한다. 아직도 문 바로 앞에 서 있던 이서가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가 된 기분으로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 걸어가는 내내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자신의 걷는 걸음걸이가 어색하게 느껴졌다.
“어디로 왔어? 주차장에서 못 봤는데…….”
“근처에 볼일 있어서 차는 거기 세워 뒀어요.”
이서의 눈이 불안하게 요동쳤다. 계원이 그 눈동자의 움직임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관찰하며 이서의 입에 딸기 하나를 넣는다.
“먹으라니까 무슨 생각 해요.”
“내, 내가 사실 할 말이 있는데.”
딸기를 거의 씹지도 못하고 꿀꺽 삼킨 이서가 불안정한 음성으로 겨우겨우 말을 꺼낸다. 큰 사고를 저지른 사람처럼 심장이 둥둥 뛰었다.
“해 봐요.”
차계원이 소파 등받이에 팔을 걸치고 이서를 응시한다. 대표실 안의 온도는 분명 따듯했는데, 괜히 주변 공기가 썰렁하게 느껴졌다.
“우리 회사, 합병하는 게 어떨까 하거든…….”
힘들게 꺼낸 이야기건만 돌아오는 말이 없었다. 조용히 딸기 하나만 더 내밀어질 뿐이었다. 이서가 몸을 어정쩡하게 숙여 계원이 들고 있는 딸기를 입에 넣는다. 딸기는 단맛보다 신맛이 강했다.
“어떻게 생각해……?”
그의 시선이 이서가 입으로 딸기를 가져간 손에서, 이서의 얼굴로 차츰 올라왔다. 그 시선을 따라 올라오다 허공에서 시선이 얽혔다. 허둥지둥 시선의 매듭을 먼저 거둔 쪽은 이서였다.
“다른 건요?”
“어?”
“할 말 더 있으시잖아요. 지금.”
“그, 그게.”
이서를 응시하는 눈빛이 짙었다. 언제나 똑바로 마주쳐오는 눈은 살갗이 벗겨지는 기분을 들게 한다. 한 올 한 올 천천히.
탁. 탁.
차계원의 긴 손가락이 테이블 위를 느린 박자로 두드린다. 그 두드림에 맞춰 이서의 심장이 더 크게 날뛰었다. 밖으로 토해내라면 토해낼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러니까 그게.”
“내 인내심 시험하려는 거면 안 하시는 게 나을 거예요.”
낮게 속삭이는 경고 같은 음성은 오늘 아침보다 메말라 있었다.
“그니까 다른 게 아니라…….”
이서가 망설이기만 하며 쉽사리 입을 열지 못한다. 하얗게 마른 손가락은 애꿎은 사무실 소파만 쥐어뜯고 있었다.
이 소파 또한 차계원이 사 놓은 것이다. 이제는 회사 전체에 차계원의 입김이 안 닿은 데가 없다.
그래. 더 늦기 전에 이 지긋지긋한 빚과 차계원에게서 벗어나야 한다. 딱 한 번, 한 번만 용기 내면 끝날 일이다.
천연덕스럽던 어제 차계원의 얼굴과 제대로 알아보기도 어려울 만큼 두들겨 맞은 김승주의 얼굴이 겹쳐져 떠올랐다. 이서가 주먹을 굳게 말아 쥐었다. 손톱 밑으로 살이 파고 들어갔다.
“소속사를……. 먼저 옮기는 건 어떨까 해서.”
“왜. 내가 나가 줬으면 좋겠어요?”
피식 웃은 계원이 앉아 있는 백이서에게 다가가 허리를 숙여 시선을 맞춘다. 덜덜 떨면서 눈을 피하는 꼴이 가소롭다.
“그게 아니라……. 우. 우리 회사는 너무 작으니까. 잘 챙겨 주지도 못하고, 아무래도 너한테 맞는 곳이…….”
입꼬리를 비튼 그가 백이서의 턱을 잡아챈다. 하얗게 질린 얼굴은 창백하다 못해 시체 같았다.
“아니긴 뭐가 아니야.”
“진짜 아니야.”
계원이 눈을 가늘게 뜬다. 시선을 피하는 백이서의 입이 달싹거리다 다물리기를 반복한다.
“…….”
“우리 회사가 해 주는 것도 너무 없, 없고……. 또.”
“좆 빨고 싶어서 이래요?”
삽시간에 붉어진 백이서의 얼굴이 당황으로 일그러진다. 계원이 그 일그러진 입매를 아프게 짓누른다.
“나는 너 생각해서……. 더 체계적인 데로 알아보면…….”
“알아보면?”
이서의 동공이 정처 없이 흔들린다. 계원은 비웃는 것 같기도 했고, 짜증 난 것 같아 보이기도 했다.
“사실 내가 미리 알아본 데가 있거든 지팩이라고, 우리랑 합병할 회사인데 그, 그냥 이름만 바뀌는 거야. 거기는 더 크고 체계적이라 네가 먼저 옮기면 너한테도 더 좋고…….”
그가 가당치도 않다는 듯 잡은 턱을 잡아당긴다.
“머리 굴리지 말고 입 벌려요.”
“잠깐만, 내 말 좀 끝까지…….”
계원이 아래턱을 잡아 입을 벌린다. 그와 동시에 다른 손으로는 바지춤을 단숨에 풀어 내렸다. 이서의 말은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 혀를 눌러 말을 막았다.
“잠, 우으읍.”
제 얼굴에 들이밀어지는 아랫도리를 본 이서가 기겁하며 차계원의 손을 떼려 했다. 그러나 언제나 그랬듯 턱도 없었다.
“더 벌려.”
계원이 억지로 입 안을 벌렸다. 이서의 입에 들어온 손가락 두 개가 혀를 뭉근하게 짓눌렸다.
“아으, 으. 왜 이…….”
차계원의 성기가 코앞에서 흉흉하게 꺼떡거리고 있었다. 반사적으로 도리질 치려 했으나 단단하게 잡힌 턱은 꿈쩍도 안 했다. 되려 그의 성기가 이서의 흰 얼굴 전체에 느릿하게 비벼진다. 끈적한 쿠퍼액이 눈 위쪽부터 볼 아래쪽까지 흘렀다. 입을 더 벌리라는 듯 커다란 성기가 안면을 때린다.
“사람 말을, 처듣질 않죠.”
그가 씹어 내뱉듯이 으르렁거리며 이미 벌려진 입에 엄지를 넣어 턱을 더 내리게 한다.
“우으, 읍……. 웁.”
이윽고 그의 성기가 무식할 정도로 무지막지하게 밀고 들어왔다. 입 안을 꽉 채운 성기에 사레들린 이서가 콜록댔으나, 기침이 살덩이에 막혀서 터져 나가지 않았다.
“빨고 싶다면서요. 그럼 빨아야죠.”
“흐읍, 으우.”
성난 목소리와 함께 그의 허리가 움직였다. 성기가 천천히 나가다가 쑥 처 밀고 들어온다. 목젖이 찔려 자동으로 눈물이 고였다. 일렁이는 시야 속에서 차계원이 소름 끼치는 얼굴로 웃고 있었다.
“닥치고 있었으면 거짓말 몇 개 정도는 눈감아 줄 수 있었어요.”
계원은 얼마 전, 백이서에게 새 차를 안겼다. 일전에 줬던 밴은 출퇴근 시 사용하기에 무리가 있었고, 백이서가 끌고 다니는 낡은 승용차는 새 블랙박스를 달기에 너무 눈에 띄기 때문이었다.
새 차에 자연스럽게 달린 블랙박스는 계원의 핸드폰과 실시간으로 연동됐다. 덕분에 백이서의 출퇴근 시간이 꽤 즐거웠다. 바로 몇십 분 전까지는.
“으웁. 읍. 흐으으…….”
목구멍 안쪽까지 찔러 넣자 백이서가 흐느끼며 눈물을 뚝뚝 흘린다. 계원이 턱을 잡던 손으로 머리통을 대신 잡아 고정했다. 백이서가 반항하며 계원의 팔뚝을 할퀸다. 그 하찮은 움직임이 같잖았다. 같잖고 같잖아서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내가 그랬죠.”
“흐으윽. 우으…….”
숨이 막혀 새빨갛게 변한 얼굴이 눈물로 젖어 호소하듯 눈을 내리깐다. 계원이 한 손으로 이서의 목울대를 쥔다. 이 곧고 하얀 목이 언제나 마음에 들었다. 단단해 보이면서도 힘을 줘 우겨 쥐면 꺾을 수 있을 것 같은 목이었다.
“당신 도망가는 건 그때 한 번이라고.”
“흐우웁. 흐으, 우윽…….”
계원이 다른 손도 가져온다. 백이서의 목이 양 손안에 완전히 들어왔다. 엄지에 살짝 힘을 주자 백이서가 꺽꺽거렸다. 울대뼈가 벌벌 떨리며 헐떡댄다. 계원의 입매가 올라가는 것과 동시에 눈에 광기가 서렸다.
“두 번째는 죽일 거라고.”
이서의 시야가 새까맣게 점멸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