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
Trapped in one’s arms
“으으…….”
머리가 깨질 듯이 어지러웠다. 늪에 감긴 것처럼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눈꺼풀에 추라도 달린 것처럼 들어 올리기가 힘들었다. 무의식이 계속해서 잠에 빠져 있길 원했다. 이서가 일어나는 걸 포기하고 의식과 점점 멀어질 즈음 입가에 물이 흘러 들어왔다.
“으음. 으.”
무의식적으로 흘러 들어오는 물을 받아 마셨다. 그제야 목이 마르다는 생각이 인지됐다. 몇 모금 더 받아마시자 목이 아픈 게 느껴졌다. 목구멍 안쪽의 따끔거림과 함께 목이 죄여 오는 착각이 들었다.
“콜록, 콜록……. 허억, 콜록.”
이서가 번쩍 눈을 뜨며 마른기침을 해댔다. 목 안쪽부터 폐부까지 매연이 들어찬 것처럼 숨 쉬는 게 벅찼다. 머리가 점점 더 어지러워졌다.
“허억, 헉.”
숨을 몰아쉬던 이서가 마지막 기억을 되짚었다. 소름 끼치던 차계원의 얼굴, 그다음 조여 오던 목, 시야가 흐려지며 정신이 가물가물해지던 게 기억의 마지막이었다.
채 삼키지 못한 마지막 모금의 물이 뚝 뚝 침대로 떨어진다.
‘침대?’
이서가 제 목을 더듬으며 움직이지 않는 목을 억지로 들어 올렸다.
“으억!”
차계원이 마지막에 봤던 그 표정 그대로 침대 헤드에 기대앉아 있었다. 순간 뒤통수를 얻어맞은 사람처럼 뒷골이 울렸다. 힘이 들어가지 않는 손으로 더듬더듬 침대 시트를 더듬어 가며 엉덩이 걸음으로 거리를 넓혔다. 살고자 하는 욕구가 본능적으로 그에게서 멀어지길 원했다.
턱.
엉금엉금 뒤로 물러나는 움직임을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관찰하던 그가, 침대에서 떨어질 뻔한 이서의 멱살을 잡아 올린다.
“기억력이 참……. 나빠요.”
덕분에 바닥으로 떨어지는 건 면했으나 차계원과의 거리는 좁혀졌다. 흠칫 목울대가 떨린다. 멱살을 쥐고 있는 손이 금방이라도 위로 올라와 목을 조여 올 것 같았다. 그가 툭. 잡고 있던 멱살을 놓았다.
“정신 들었으면 아까 회사에서 하던 이야기 이어서 해 보세요.”
“이야……. 콜록, 콜록, 이야기?”
한 문장을 채 끝맺기도 전에 기침이 나왔다. 쇳소리 나는 목소리가 제 것 같지 않다. 계속해서 기침을 반복하고 목소리를 가다듬는 걸 차계원은 물끄러미 내려다보기만 했다. 그의 시선은 차분하고 냉정했다.
“마셔요.”
한참을 보기만 하던 계원이 협탁에 놓여 있던 미지근한 물 한 컵을 내밀었다. 잠시 멈칫하던 백이서는 곧 물컵의 반을 비웠다.
계원이 백이서의 차를 부숴 먹은 건 일주일 전쯤이었다. 오래된 구형 승용차는 작은 충격에도 산산조각이 났다. 이미 내부고 엔진 장비고 성한 곳이 없던 물건이었다.
차는 폐차시켰다. 수리가 불가능하다는 진단을 받을 때는 백이서와 동행했다. 폐차밖에 방법이 없다는 수리 기사의 의견을, 백이서는 마치 사형 선고라도 듣는 낯으로 들었다.
새 차에는 신형 블랙박스를 달았다. 자신의 핸드폰으로 실시간 연동이 되는 모델이었다. 블랙박스 하나 없던 구형 승용차에 달았다면 눈에 띄었겠으나, 새 차에 달아 놓은 후 차 키를 넘기니 그저 원래부터 달려 있던 부품 같았다. 매사에 둔한 인간은 신경조차 못 쓸 만큼.
“합병할 생각이니까 회사 옮기라면서요. 대표님 말대로 내가 먼저 소속사를 옮기면, 그다음은요.”
“아…….”
이서가 마시던 물을 내려놓는다. 한 모금 더 들이켜고 싶었지만 그만두었다. 차계원이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다음. 그가 소속사를 옮기고 합병이 이뤄지면, 그다음에 자신은 이 일에서 손을 떼려고 했다. 그 후의 계획은 없었으나 일단 벗어나고 싶었다. 김승주의 말대로 한적한 곳에 가서 지내는 것도 좋을 테다.
“없어.”
이서가 최대한 자연스럽게 시선을 피했다. 정신을 잃기 전 마지막으로 들은 말이 뭐였더라. 도망가는 건 한 번뿐이랬나.
김승주의 말에는 작은 것 하나라도 동의하고 싶지 않지만, 차계원은 미친 새끼가 맞다. 숨통이 조여질 때의 공포가 아직도 생생하다. 발끝부터 머리까지 하얘지던 감각은,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은 감각이었다.
당장이라도 차계원이 보이지 않는 곳으로 뛰쳐나가고 싶었다. 그러나 여기는 그의 집이었다. 섣부르게 한 발짝 뗐다가 숨통이 끊길 것만 같았다.
“없어요?”
“어…….”
차계원이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다. 그는 속옷 차림이었다. 조밀한 근육으로 이루어진 몸이 탄탄하다. 이서가 얼른 제 몸을 내려다봤다. 다행히도 잠옷이 입혀져 있었다.
뚜르르. 뚜르르르.
갑자기 들려오는 신호음에 고개를 들었다. 차계원이 침대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서서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고 있었다. 그가 들고 있는 건 이서의 핸드폰이었다.
“그거 내 거…….”
[여보세요.]
핸드폰을 향해 뻗던 팔이 뚝 멈췄다. 핸드폰에서 김승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스피커 모드로 설정해 놨는지 음성이 유난히 크게 울렸다.
“……형?”
[어, 이서야. 너구나.]
저도 모르게 멍하니 그를 불렀다. 김승주를 다시 재회하고 나서 그와 통화를 하거나 기타 연락을 한 적은 없었다. 그도 자신도 자연스럽게 서로의 연락처를 묻지 않았다. 그러니 제 핸드폰에는 그의 연락처가 없었다.
[차계원 설득했어? 계약서에 사인하게 했어?]
핸드폰을 통해 들리는 김승주의 목소리는 매우 들떠 있었다. 이서의 몸이 차츰 굳어져 갔다.
[어떻게 한대? 괜찮대? 전화 걸어 놓고 왜 말이 없어! 나 선임한테 잘 풀렸다고 한다? 빨리빨리 진행돼야 너도 어서 다 그만두고 쉬지. 잠깐, 근데 나 핸드폰 망가져서 지금 바꿨는데 이 번호 어떻게…….]
툭.
통화를 종료한 차계원이 핸드폰을 침대 위로 던졌다. 포물선을 그리며 바로 앞에 떨어진 핸드폰을 이서는 줍지도 못하고 그저 가만히 보기만 했다. 조용한 공기 속의 날 선 시선이 버거웠다.
“저는 세상에서 대표님이 제일 멍청한 줄 알았거든요.”
비소를 담은 그의 입꼬리가 비틀어지며 올라간다.
“그런데 또 있더라고요.”
차계원이 저벅저벅 느리게 다가왔다. 그리고 이서의 옆얼굴을 쓰다듬었다. 부드러운 손길이 눈썹 뼈를 매만지다가 뒤통수로 옮겨 갔다가 턱선을 쓸었다.
“개새끼처럼 바로 대표님한테 달려갈 줄은 몰랐는데.”
“…….”
“아주 애틋한 사이신가 봐요.”
낮게 중얼거리는 말에 이서가 숨을 멈췄다. 턱선을 반복해서 쓸어 올리던 손에 점차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왜 말 안 했어요?”
“뭐를……?”
“나 내보낼 생각 하면서 대표님은 쏙 빠질 계획이었던 거, 거짓말한 거, 그리고 저한테 말 안 한 그 외 전부.”
말하지 않은 이유야 많았다.
그에게 말하지 않은 것들과 거짓말한 것들, 그리고 그 이유까지 너무 많아서 다 셀 수가 없었다. 빠져나갈 생각이었다는 건 제가 생각해도 비겁해 보여 말하지 않았고, 필사적으로 거짓말까지 하며 김승주에 대한 걸 숨긴 건 말해야 할 이유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말해 봐요.”
달큰하게 속삭이는 목소리와 다르게 그의 손아귀 힘은 억셌다. 턱뼈가 으스러질 것만 같았다. 이서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굳이 말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어.”
더듬더듬하며 말을 잇는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린다. 온기 없이 매서운 차계원의 눈빛을 피하고 싶었다. 그리고 그가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도 감이 안 잡혔다.
“내가 다 말하라고 했었잖아요.”
“창, 창피해서”
“창피?”
그가 기어들어 가는 미약한 변명을 비웃었다.
차계원은 모든 걸 본인에게 허락받으라 했었다. 작은 것 하나까지도 세세하게 파고들어 물어봤고, 회사에서 있던 일이나 일상 이야기를 먼지 한 톨까지 전부 듣고자 했다.
그러나 이서는 자신이 왜 시시콜콜 다 이야기해야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채권자라는 이유만으로는 납득되지 않는 부분이었다. 더더군다나 과거의 이야기는 더 하고 싶지 않았다. 꺼낼수록 죄다 초라한 기억뿐이었다. 몇 년 동안 ‘을’을 자처하는 연애를 하다가 종래에는 배신당해서 빚도 사업도 떠맡았다. 차계원이라면 깔보고도 남을 이야기였다.
“뭐가 창피했는데요. 대표님이 나한테 더 창피할 게 있던가?”
“사기당한 이야기 같은 거……. 그, 방금 통화한 사람이 대학 때 선배…… 였는데.”
생각해 보면 사기당해서 회사를 떠맡았다는 것도 자신은 말한 적이 없다. 그러나 그는 어느 순간부터 알고 있었다.
“네가 항상 나 벼, 병신 같다고 그랬잖아. 그래서 이런 이야기 하기가 조금……. 근데 애초에 개인적인 일이잖아. 물론 숨기고 거짓말했던 건 미안한데…….”
“…….”
“그리고 빠질 계획이었다는 거는……. 그거는 내가 회사 일에 손 떼려고 한 건 맞지만 너한테 피해가 갈 일은 아니라 생각해. 빚도 이제 갚는다고 했어. 그, 선배가.”
변명하면 할수록 차계원의 표정은 싸늘해졌다. 그러나 이서로서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제 딴에는 최선이었다. 이렇게 설명하면 그가 이해할 거라 생각했다. 빚을 갚겠다는 이야기를 할 때는 일부러 더 힘을 실어 말했다.
“전 애인이라는 건 쏙 빼고 말씀하시네요.”
“어, 어?”
“그 사람이 전 애인이라는 건 왜 빼고 말하냐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