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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도덕적 안락함-78화 (78/100)

#78

“나갔다……. 왔나 봐?”

이서가 겨우 입을 열어 묻는다. 정말 묻고 싶은 건 이게 아니었는데, 입에서는 일상적인 이야기가 나왔다.

“네.”

짤막한 대답을 끝으로 대화는 이어지지 않았다. 불편한 침묵만 계속해서 흘렀다. 차계원은 이서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고, 이서는 어두운 허공 어딘가만 보고 있었다.

“나가려 하셨나 봐요.”

가까이 다가온 차계원이 이서의 코트 깃을 쥐었다. 입 안이 말라 왔다.

설마 현관과 창문에 일부러 잠금장치를 해 둔 거냐, 지금 자신을 가둔 거냐, 목을 졸랐던 건 무슨 짓이냐 등 따질 만한 것들이 수두룩하게 성대를 타고 올라왔다.

“……어.”

그러나 혓바닥까지 올라온 말들은 밖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입술 사이에 본드 칠이라도 한 것처럼 뻣뻣했다.

“왜요.”

“…….”

차계원은 항상 이서에게 당연한 걸 물었다. 이유가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해 왔던 것들의 이유를 요구했다.

“집에…….”

집에 가려고 했다는 말을 하려다 멈췄다. 이서에게는 이제 집이 없었다. 그냥 나가려 했을 뿐이다.

“……그냥. 내가 계속 여기 있어야 할 이유는 없잖아.”

“…….”

계원의 시선이 더 집요하게 이서에게 달라붙었다. 어둠에 적응한 눈은 시야 안의 것들을 잘 보이게 했다. 조금 더 명확하게 들어오는 그의 눈빛은 탁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바람 냄새와 섞인 알코올 향이 희미하게 느껴졌다.

“어…….”

차계원이 허리를 숙이며 잡고 있던 이서의 코트 깃을 위로 끌어올렸다. 한 손으로 쥐고 올리는데도 몸이 따라 들렸다.

“으읍…….”

그가 다른 한 손으로는 목덜미를 단단히 받치고 입을 맞부딪쳐 왔다. 이서가 눈을 질끈 감았다. 메마른 입술이 버석했다. 희미하게 느껴지던 술 냄새가 입을 맞추자 확 풍겨 왔다.

“흐으……!”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리려 했으나 소용없었다. 단단한 몸은 팔로 밀어내도 꿈쩍하지를 않았다. 눅진하게 입술을 핥으며 빨아들이고, 자연스럽게 입술 사이를 파고 들어왔다. 느릿한 차계원의 혀가 다른 때 보다 뜨거웠다. 목에 닿아 있는 손의 체온도 평소와는 달리 높았다. 안으로 들어온 혀가 입천장을 쓸더니 천천히 이서의 혀를 질척하게 비벼 왔다. 이서가 점점 움직임이 짙어지는 그의 혀를 짓씹었다. 혀가 물컹 씹히는 감각과 입 안 가득 퍼지는 비릿한 피 냄새가 끔찍했다.

“시, 싫어.”

차계원은 혀가 질겅 씹혔음에도 몸을 물리려 하지 않았다. 잠깐 움찔하는 사이에 이서가 재빨리 그에게서 떨어졌다. 하얀 대리석 바닥에 검붉은 피가 투둑 떨어졌다. 어두운 탓에 그의 피가 더 검붉어 보였다.

“퉤.”

차계원이 고인 침을 바닥에 내뱉고 손등으로 대충 입술을 슥 훔쳤다. 이서가 바닥에 고인 피를 보며 몸을 굳혔다. 저도 모르게 달아나려다 뒤의 소파에 걸려 털썩 주저앉았다. 계원이 그 위를 타고 올라왔다. 풀썩 몸이 넘어졌다. 그의 행동은 느리면서 조급해 보였다.

그러나 조급해 보이는 것과 달리, 차계원은 자신의 팔을 이서의 목 뒤에 베개처럼 받칠 뿐 다른 행동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순식간에 차계원의 아래에 깔리게 되자, 이서의 머릿속에는 목이 졸리던 때가 스쳤다. 얼굴 바로 위에서 들리는 불규칙한 숨소리도 섬찟하게 느껴졌다.

“하지 마……!”

“뭐를요.”

대뜸 하지 말라고 외치는 이서에게 차계원이 약간의 간격을 두고 물었다. 이서의 눈에 어느새 눈물이 잔뜩 고여 있었다.

“흐윽…….”

“제가 뭘 하는데요.”

차계원의 얼굴이 허망하게 일그러졌다. 낮은 그의 물음은 마치 혼잣말 같았다.

“뭐든, 뭐든 하지 마.”

“하…….”

이서가 양팔로 제 얼굴을 가리고 울먹이며 외쳤다.

“하지 마, 제발…….”

소파 위로 눈물이 툭툭 떨어졌다. 안 그래도 하얀 이서의 얼굴이 달빛을 받아 더 창백해 보였다. 목 뒤를 받치고 있던 차계원의 팔이 스윽 빠졌다.

“아무것도 안 하려 했어요.”

갈라진 차계원의 목소리가 쇳소리 비슷하게 났다. 그러나 이서의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하, 하지 마. 내가 미안해. 그러니까 하지 마.”

횡설수설하는 이서의 팔이 잘게 떨렸다. 차계원은 힘줄이 다 돋아날 정도로 세게 주먹을 쥐었다.

“아무것도!”

차계원이 음성이 높아졌다. 격양된 그의 외침이 고막을 웅웅 울렸다. 이서의 입술이 더 파리해졌다.

“허윽……. 흑”

이서가 숨을 쉬지 못하는 사람처럼 헐떡였다. 차계원이 세수하듯 두 손으로 얼굴을 세게 쓸어내렸다.

“안 하려 했다고…….”

* * *

진강은 새벽부터 몇 시간째 차 안에서 핸들만 부여잡고 있었다. 벌써 며칠 동안 이 주변을 맴돌았다. 차계원의 집 주소를 얻는 데 시간을 너무 많이 소요했다. 김건에게 주소를 물었을 때는 기겁하며 알려 주지 않았고, 그 외 다른 방법으로 주소를 얻기에, 차계원의 사생활은 철저히 비밀리에 부쳐져 있었다. 결국, 김건을 몇 번 몰래 미행한 끝에 그의 집을 알 수 있었다. 이런 짓까지 해야만 하나 회의감이 들었으나 어쩔 도리가 없었다.

‘신고해야겠습니다.’

서휘준은 실종 신고를 하려 했다. 며칠째 연락이 안 닿았고, 이사를 했다는 사실도 석연치 않았다는 게 이유였다.

그걸 말린 건 진강이었다. 다 큰 성인이 실종됐다며, 가족도 아닌 동료들이 신고해 봐야 소용없을 거라 판단해서였다.

진강은 백이서가 차계원의 집에 있다고 확신했다. 그 추측을 휘준에게 말하니 그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직접 찾아가기로 결론이 난 것이다.

그렇게 진강은 며칠 동안 차계원의 집 근처를 맴돌았다. 어제는 근처를 지나가는 차량처럼 집 주변을 살폈다. 대문에만 감시 카메라가 두 개였다. 마당을 둘러싼 담벼락 위에도 양옆으로 두 개 더 있었다.

징. 징.

휘준에게 전화가 왔다. 그는 계속 초조해했고, 30분 간격으로 전화를 걸어왔다.

“예, 휘준 씨.”

[진척이 좀 있습니까?]

“전혀요. 그대로입니다. 차 안에서 대문만 보고 있어요.”

[이상한 점은 없습니까?]

“딱히 없네요.”

차계원의 집 근처에는 개미 한 마리 지나가지 않았다. 부촌이라 그런지 유동인구 자체가 적었다. 때문에 진강은 더 멀찌감치 떨어져서 보는 수밖에 없었다.

[대표님은…….]

“못 봤습니다.”

이곳을 주시한 며칠 동안 백이서는커녕 차계원마저 코빼기도 못 봤다. 혹시 백이서가 차계원의 집에 없는 건 아닐까 하는 불안한 생각이 들다가도, 이곳이 아니면 이렇게까지 연락이 안 될 리 없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때였다. 육중한 철문이 열리고 차계원이 나왔다. 그는 여전히 혼자 고고하고 여유로워 보였다. 멀리서도 날카로운 분위기가 느껴졌다.

“잠시 끊겠습니다.”

차계원은 대문 앞에서 무언가를 하더니 바로 옆 차고로 갔다. 얼마 있지 않아, 그의 차가 부드럽게 주행하며 휘준의 차 근처를 스쳐 지나갔다.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스쳤는데도 괜히 제 발 저려 몸을 숨겼다. 잠시 뒤, 젖혔던 시트를 바로 하고 동태를 살폈다. 차계원의 차는 이미 멀리 가고 없었다.

“하아.”

진강이 핸들에 머리를 박고 한참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자신이 나서서 오겠다고 한 건데도 어려웠다. 이날 이때껏 규범에서 벗어난 삶은 산 적은 없다. 그런 자신이 남의 집에 무단침입 할 생각이나 하고 있다니.

그러나 진강은 곧 이를 악물었다. 이판사판이다. 백이서가 저곳에 있는 건 확실하다. 방법은 이것밖에 없었다. 백이서가 차계원에게 잡혀 있다는 자신의 추측이 맞아떨어진다면, 그게 더 큰 범죄였다.

굳은 표정의 그가 차 문을 열고 차계원의 집으로 다가갔다.

* * *

이서는 차계원이 나가자마자 마당을 돌아다녔다. 그는 오늘 본가에 가야 한다고 했다.

“이렇게 쉽게 들어줄 거였으면…….”

이서가 잔디에 얼어붙은 이슬을 털었다.

술을 마시고 들어온 날, 차계원은 그대로 이서 위로 쓰러졌다. 울며불며 하지 말라는 말만 반복하던 이서는 그제야 팔을 내리고 숨을 골랐다. 그리고 그의 품을 빠져나갔다. 워낙 체격이 커 무게도 상당한 탓에 빠져나오는 것도 버거웠다. 불규칙하던 숨소리가 규칙적으로 잦아들고 있었다.

차계원이 정말 잠들었다는 걸 확인한 이서는 그제야 그의 얼굴을 똑바로 봤다. 고작 이틀 만에 본 그는 살이 꽤나 빠져 있었다. 원래도 살집이 있는 건 아니었던 터라, 턱선과 광대가 도드라지니 더 날카로워 보였다. 그가 숨을 내쉴 때마다 술 냄새가 코를 찔렀다. 차계원은 술이 약하다고 김건이 일러 줬던 게 언뜻 떠올랐다.

무슨 변덕인지 그날 이후로 차계원은 이서에게 무언가를 강요하지 않았다. 특별한 일이 있는 게 아니면 먼저 말을 걸지도 않았으며 밥을 차릴 때도 이서 밥만 차렸다.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마찬가지였다. 잠도 다른 방에 가서 잤다. 덕분에 이서는 그날 이후 이곳에 있는 게 조금 편해졌으나 차계원은 계속해서 날이 서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설마설마하며 꺼낸 말이었다. 뭐 때문인지 몰라도 요 며칠의 차계원은 이서의 요구들을 순순히 들어줬고, 능글맞게 굴거나 심술부리는 일 없이 비슷한 온도로 이서를 대했다. 거기에 기대를 걸고 마당에서 쉬고 싶다는 말을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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