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
차계원에게서는 아무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으나, 그가 나가고 나서 거실로 내려오니 마당으로 나가는 창문이 열려 있었다.
“아예 나간다고 할걸.”
중얼거리던 이서가 곧 고개를 젓는다. 그럴 거였으면 벌써 나가게 해 줬겠지. 그는 핸드폰도 가져가서 돌려주지 않았다. 다른 요구는 들어주면서 핸드폰 이야기만 하면 못 들은 척했다.
“동백인가……?”
마당 한편에 못 보던 나무가 몇 그루 심겨 있었다. 원래 있었는데 그동안 보지 못했던 걸지도 모른다. 나무 가득 빨갛게 핀 꽃들은 선명한 색을 자랑하고 있었다. 이서가 꽃 옆의 나뭇잎을 살짝 만졌다. 반들반들한 잎은 도톰하고 단단했다.
“으.”
불어오는 바람에 이서가 몸을 떨었다. 잠옷 위에 담요만 두르고 나온 탓에 추웠다. 그러나 오랜만에 쐬는 바깥바람이 산뜻해서 들어가기는 싫었다. 숨을 깊게 들이쉬자 폐부까지 시린 공기가 들어온다.
마당을 대강 둘러본 이서는 겨울 특유의 공기를 마음껏 즐기며 대문 쪽으로 다가갔다. 역시나 열리지 않았다. 예상한 일이라 별로 놀랍지도 않다.
“감옥도 아니고.”
이서가 반쯤 포기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대문도 어찌나 크고 높은지 유치장 같은 곳의 철창이 연상됐다. 그때 대문 밖에서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형?”
“어……?”
“형! 대표님 맞으시죠!”
진강의 목소리였다.
“설마 진강이야?”
“네. 저 맞습니다. 거기 계신 거죠!”
“네가 어떻게 여기에 있어?”
진강이 이곳에 있을 만한 이유는 없었다. 어안이 벙벙한 이서와 달리 진강은 반가움과 걱정을 숨기지 못했다.
“계속 연락이 안 돼서 걱정했습니다. 잠깐만 문 좀 열어 주세요. 얼굴 좀 봬요.”
“그게…….”
“형?”
이서가 뜸을 들이자 진강이 다시 다급하게 부른다. 그는 지금 잠깐의 침묵도 불안했다. 목소리만 들리고 보이지는 않으니 답답하고 더 안달이 났다.
“차계원 씨 아까 나가는 거 봤습니다. 걱정하실 거 없어요.”
진강은 이서가 자의로 이곳에 있는 게 아니라고 확정 짓고 있었다. 그의 확신이 틀린 건 아니나, 숨기고 싶던 걸 보여주는 기분이라 말을 신중하게 고르게 됐다.
“형!”
진강이 답답한지 이서를 한 번 더 불렀다.
“그게 안쪽에서 문을 열 수가 없어서.”
“……예?”
그가 그 자리에서 몸을 굳혔다. 설마설마하니 이 정도일 줄이야. 이게 감금과 뭐가 다른가. 차계원이 대문 앞에서 한동안 무언가를 하다 차고로 간 게 떠올랐다. 진강이 미간을 바짝 구겼다. 안 그래도 험악한 인상이 더 험악해 보였다.
“열 수 있는 장치가 안쪽에 없습니까?”
“음……. 원래 이 버튼을 누르면 열렸던 거 같은데 “
이서가 툭. 툭, 버튼을 연거푸 누른다. 빈 플라스틱을 누르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역시나 대문도 요지부동이었다.
“지금은 안 열리네.”
“차계원은 어떻게 나갔습니까?”
“나도 모르겠어. 못 봐서.”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묵직한 발걸음 소리가 멀어졌다. 얼마 있지 않아 문 너머로 자동차 소리가 들렸다. 자동차 소리는 담벼락 바로 뒤에서 멈췄다.
탁.
“으앗!”
구두 굽 소리가 울리더니 이진강이 담을 훌쩍 뛰어넘어 들어왔다. 이서가 놀란 토끼 눈을 뜨고 그를 봤다. 차계원의 집은 유난히 담벼락이 높았다. 사람이 쉽게 뛰어오를 높이가 아니었다.
“어, 어떻게 한 거야?”
“원래 몸으로 하는 건 다 잘합니다. 차 지붕을 디딤돌 삼으면 쉬워요. 내려올 때야 위에를 잡으면 되고.”
“쉽다고……?”
이서가 고개를 들어 담벼락 꼭대기까지의 거리를 가늠했다. 못해도 3미터는 족히 넘었다. 아무리 잘 단련된 체력의 소유자라도 저렇게 흔들림 없는 자세로 넘어 다니기는 무리였다.
삐. 삐. 삐. 삐.
그때 경보음이 울렸다. 담벼락에서부터 시작돼 집안 전체에서 울리는 경보음은 고막이 아플 지경이었다. 이서가 눈에 띄게 불안해하며 두리번거렸다.
“나가요. 어서.”
진강이 다급하게 이서의 팔을 끌었다. 몇 번 대문을 덜컹거리도록 흔들어 보다가 자신이 넘어온 담을 가리켰다.
“저걸…….”
이서가 담요를 움켜쥐며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어느 정도 높으면 모를까, 체력도 떨어진 지금 3미터가 넘는 담을 넘는 건 무리였다. 담은 어찌어찌 오른다 쳐도, 경보가 울렸으니 보안 업체가 곧 당도할 것이다. 하지만 지금이 아니면 다른 기회는 없을지도 모른다.
“담 너머에 바로 차가 있습니다. 차체가 높아서 잡고 올라가면 그다음은 쉽습니다.”
진강은 이서가 결정을 내리기도 전에 이서의 몸을 불쑥 들어 올렸다. 담요가 나풀거리면서 마당에 떨어졌다.
“자, 잠깐만.”
“나가려면 지금밖에 없습니다. 아니면 자의로 여기 계시는 겁니까.”
그 말에 이서가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진강이 다리를 단단히 잡고 올린 덕에 팔을 뻗으면 담벼락 위를 잡을 수 있었다.
“곧 경비업체가 도착할 겁니다. 이 담만 넘으면 됩니다. 하실 수 있어요.”
진강의 목소리는 침착했다. 무게가 꽤 될 텐데도 이서를 받치고 있는 팔에는 떨림이 없었다. 그게 용기가 됐다.
“알았어……. 후.”
이서가 담 윗부분을 잡고, 팔에 힘을 실어 몸을 마저 올렸다. 손이 닿으니 담 위에 오르는 건 쉬웠다. 폭이 좁은 담 위에 양손과 무릎을 대고 있으니 몸에 오금이 저려 다리가 부들부들 떨렸다. 아래에 보이는 아스팔트 바닥이 아찔했다. 진강의 말대로 담 밑에는 차가 한 대 세워져 있었다. 차체가 높기는 했으나 위에서 보니 멀게만 느껴졌다.
“꽉 잡고 잠깐만 버티십시오.”
굳은 말투와 함께 벽이 울리는 느낌이 났다. 이서가 담을 생명줄이라도 되는 양 더 꽉 붙잡았다. 진강이 벽에 한 번 발돋움을 한 뒤 담벼락 끝을 붙잡았다. 그리고 이서가 한 것처럼 몸에 힘을 실어 올라왔다.
“와.”
감탄사를 내뱉기가 무섭게 진강이 차 지붕 위로 뛰어내렸다. 매끄럽게 착지하는 동작에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삐. 삐. 삐.
이번에는 자동차 경보음이 울리기 시작했다. 저택의 경보음과 자동차 경보음이 한데 섞여 어지러웠다. 그 와중에 높은 곳에 올라와 있으니 눈앞이 핑핑 돌았다.
“담을 잡은 채로 몸을 뒤로 돌리십시오. 제가 잡아 드리겠습니다.”
이서가 침을 꿀떡 삼켰다. 진강의 말대로 몸을 움직이며 아래는 보지 않으려 노력했다.
“하아.”
입김이 하얀 포말처럼 퍼져 나갔다. 경비업체가 언제 올지 몰라 조마조마한데, 몸이 마음처럼 빨리 움직여 주지 않았다.
“잘하고 계십니다. 다리만 아래로 뻗으세요.”
슬쩍 아래를 내려다보니 진강이 강건한 표정으로 팔을 내밀고 있었다. 차 위에 거구인 진강이 서 있으니, 담벼락과의 거리가 얼마 되지 않아 덜 무서웠다.
“읏.”
이서가 담벼락을 잡고 몸을 아래로 내리자마자 진강이 아까처럼 잡아 내려줬다.
“와. 나 이런 거 처음 해 봐.”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서가 차 지붕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다리에 힘이 없었다. 추운 것도 이제 느껴지지 않았다. 땀이 진강이 그 옆에서 푸스스 웃는다. 여전히 소년 같은 웃음이었다. 반듯하게 올라가 있던 머리칼이 조금 흩어져 있었다.
탁.
“자요.”
바닥으로 내려간 진강이 이서를 향해 양팔을 뻗었다. 거의 안기다시피 차 지붕에서 내려와 차에 몸을 실었다. 저 멀리에서 경비업체로 보이는 차들이 차계원의 저택을 향해 달려오는 게 보였다.
“빨리 가죠.”
“……어.”
진강이 자신의 겉옷을 이서에게 덮어주었다. 체향이 섞인 온기가 따듯했다. 곧 자동차의 히터 바람이 내부를 데웠다. 진강의 차는 빠르게 차계원의 동네를 빠져나가고 있었다.
“개인 밴이야?”
회사 밴은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 타고 있는 밴은 차계원이 회사에 가져다 놓은 밴만큼 보기 드문 모델이었다. 개인이 소유하기에 워낙 값비싼 모델이라 눈에 띄었다. 누가 봐도 연예인이 타고 다니는 밴이었다.
“예.”
이서가 힐긋힐긋 백미러와 사이드미러를 번갈아 봤다. 저 멀리에서 경비업체로 보이는 직원이 몸을 쭉 빼고 밴의 뒤꽁무니를 보고 있었다.
“걱정하실 거 없습니다. 제가 형을 빼냈다는 걸 안다고 해도 저쪽에서 뭐라 말할 입장은 아니잖습니까. 범죄니까요.”
“아, 그, 그렇지.”
자신의 불안감이 들킨 것 같아 이서의 얼굴이 확 벌게졌다. 소속 연예인에게 감금이나 당하고 있던 꼴이라니, 창피했다. 진강의 손을 빌려 빠져나오게 된 것도 이서를 부끄럽게 했다.
“그리고…….”
“응?”
“차체가 높은 차가 이 밴밖에 없었습니다.”
“아…….”
“직접 보니 놀라기는 했습니다만……. 혹시 갇혀 계신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안 하지는 않았으니까요.”
일부러 이 눈에 띄는 밴을 끌고 왔다는 소리였다. 이목이 쏠리거나 소란스러운 걸 싫어하면서도.
“우선 휘준 씨네 집으로 모셔다 드릴 겁니다.”
“휘준이?”
“제 집은……. 아무래도 불편하실 테니까요.”
씁쓸하게 입매를 당겨 웃는 그를 보며 이서가 고개를 푹 숙였다.
“그, 고마워…….”
진강이 조용히 옆자리로 시선을 옮겼다. 기운 없이 움츠러든 어깨가 마음을 아리게 했다.
“……아닙니다.”
그 말을 끝으로 둘은 아무런 대화도 나누지 않았다. 차는 차계원의 동네를 완전히 벗어나고 있었다. 큰 대로변이 나오자 그의 집을 나왔다는 게 실감이 났다. 그제야 몸의 긴장이 풀리며 길가의 풍경들이 눈에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