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
차는 한참을 내달렸다. 이서가 기억하고 있는 휘준의 집은 회사에서 한 시간 정도 거리였다. 차계원의 집이 회사에서 가까우니 못해도 한 시간 반이면 도착해야 했다. 그러나 차는 두 시간이 넘게 달리고 있었다. 심지어 30분 전부터 고속 도로에 진입해 있었다.
“저기, 진강아.”
“예!”
계속 조용히 차창만 보던 이서가 먼저 말을 붙이니 진강이 화색을 내비치며 대답한다. 그래 봐야 얼굴 근육만 조금 풀린 정도라, 남이 보기에는 똑같이 험상궂은 인상이었다.
“휘준이네 가는 거 맞아? 이 방향이 아닌 거 같아서.”
진강이 자신을 이상한 곳으로 데려갈 리도 없는데, 불편한 마음은 여러 갈래로 정처 없이 휘청였다. 진강 때문은 아니었다. 담을 넘을 때부터 해방감이 드는 것과 동시에, 그보다 큰 심란함이 마음을 뒤덮었다.
“아하하하.”
그런 마음을 알 리 없는 진강이 손가락으로 도로를 살짝 가리키는 이서를 보며 대뜸 웃어댄다. 평소에는 웃어 봐야 머쓱하게 미소나 띠는 게 다인 놈이, 얼마나 크게 웃는지 핸들을 잡은 손에 힘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이서가 당황하며 눈을 세모꼴로 떴다.
“왜, 왜 웃어?”
“아뇨, 빨리도 물어보신다 싶어서요.”
“못 보던 길이라…….”
“제가 허튼 데라도 데려가면 어쩌려고 이제 물으세요.”
“네가 뭐 하러 그러겠어.”
이서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감추지 못하고 창문을 살짝 열어 고개를 뺐다. 쭉 이어지고 있는 고속도로만 봐서는 행선지를 알 수 없었다.
“이 방향 맞습니다. 휘준 씨네 고모 댁으로 가고 있어요. 말씀드리는 걸 깜빡했네요.”
“고모네?”
“예. 고모분이 산막골 쪽 마을에 산다고 하시더라고요.”
휘준의 고모는 이서도 알고 있었다. 예전에 휘준이 어머니의 장례식장에서 뵌 기억이 난다. 엄하시기는 하나, 인정 많은 분이었다. 친척들과의 왕래도 적고 가족도 없는 휘준에게 유일하게 남은 핏줄이었다.
“이왕이면 사람 적은 곳이 낫지 않을까 해서 말입니다. 누가 찾아오기도 힘들 테고요.”
뒷말은 생략되어 있었으나 진강이 말하는 그 누구가 차계원임은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있잖아. 그럼 휘준이도…….”
이서가 말을 하다 멈췄다. 진강마저 알 정도니 휘준이 지금 이서의 상황을 알고 있는 건 당연했다. 그러나 창피함이나 미안함 같은 감정들은 지금 상황에선 뒤로 미뤄 둬야 했다.
“예, 압니다. 조금 전에 문자 드렸습니다. 그게 아니어도 이상한 게 한둘이 아녔잖습니까.”
“많이 이상해 보였어?”
“형과 차계원 씨 사이요? 아니면 차계원 씨 행동이요.”
“……전부.”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보통 상식선에서 이해되는 모습들은 아니었습니다. 형이 차계원 씨 한테 휘둘리는 것도……. 그랬고요.”
“…….”
“나름대로 이유가 있으셨을 거라 생각합니다.”
이서의 눈치를 살피던 진강이 점점 속력을 높였다. 도심을 벗어나니 막히는 차가 없어 도로가 시원했다. 그러나 뻥 뚫린 도로와 달리 이서의 속은 돌덩이가 들어찬 것처럼 꽉 막혀 있었다.
“미안해.”
“예? 뭐가 말입니까.”
“지금 상황 다. 네가 내 뒤치다꺼리하고 있잖아. 남의 일에 이렇게까지 해 주는 거 쉬운 일은 아니니까.”
“남의 일……. 아닙니다.”
진강은 약간 불만스러운 듯 작은 목소리로 피력했다. 그의 귓가가 한껏 붉어져, 어두운 피부색이 한층 짙어져 있었다. 초조한 사람처럼 손가락으로 핸들을 엇박자로 두드리며 시선을 피한다.
“저 좋자고 하는 일이라서요.”
“그래도 고맙다.”
“예, 아뇨, 안 그러셔도…….”
살짝 웃는 이서와 눈이 마주친 진강이 당황하며 헛기침했다. 핸들을 잡은 손에서 힘을 푸는 바람에 차체가 휘청였다.
“진강아, 앞.”
“앗, 예. 죄, 죄송합니다.”
백이서가 운전석으로 몸을 기울여 핸들을 바로잡아 줬다. 진강이 숨을 들이켠다. 제 쪽으로 기울여진 몸에서 달달하면서 시원한 체향이 훅 끼쳐 왔다.
“거의 다 왔나 봐.”
“예, 그런 거 같습니다.”
한번 인식한 냄새는 거리가 벌어져도 계속 느껴졌다. 코 근처에서 물을 머금은 자두가 맴도는 것 같았다.
내비게이션의 안내에 따르면 도착지까지의 거리는 500m 남짓이었다. 비포장 도로 옆으로 서리가 내린 밭과 비닐하우스, 버려진 무들이 얼어붙어 있는 것이 보였다.
“저거 휘준이 아니야?”
먼발치에 주머니에 손을 넣은 체격이 건장한 사내가 보였다. 그는 추운 날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비포장도로의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맞는 것 같습니다.”
이윽고 차가 휘준이 서 있는 주황 대문 앞에서 멈췄다.
“내리죠.”
“어. 응.”
이서가 대답과 달리 선 듯 손잡이를 당기지 못하고 미적거렸다. 이런 모습으로 휘준의 얼굴을 볼 면목이 없었다. 그러나 저 미적거릴 틈도 없이 휘준이 바깥에서 먼저 차 문을 열었다.
“어……!”
갑자기 열리는 문에 상체가 딸려 나갔다. 바닥에 나뒹굴 뻔한 몸을 휘준이 자연스럽게 받쳐 주었다.
“오셨으면 내리지 뭘 그렇게 뭉그적거리십니까.”
이서가 민망해하며 바로 섰다. 슬리퍼 사이로 들어오는 바람이 시렸다. 자신을 보면 어떻게 된 거냐며 따져 물을 거라고 생각했던 휘준은 예상외로 평소와 다름없었다.
“들어가시죠. 진강 씨도.”
휘준이 반쯤 열린 대문을 가리켰다. 담이라 하기도 민망할 만큼 낮은 담 안의 집은 대문과 같은 색의 지붕이 눈에 확 들어왔다.
“색이 참 이쁘네.”
“몇 년 전에 제가 직접 칠한 겁니다. 두 분 다 식사는 하셨습니까?”
“아, 아니 아직.”
“안 했습니다.”
“잘됐네요.”
휘준이 어서 들어가라며 둘의 등을 밀었다. 이서가 대문을 넘다 말고 무언가 생각난 듯 멈춰 섰다.
“아, 맞다.”
“왜 그러십니까?”
휘준이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의아하게 물었다. 시선은 이서와 진강의 뒤쪽을 향해 있었다. 수상한 사람이라도 찾는 모양새였다.
“빈손이라. 뭐라도 사 왔어야 하는 건데……. 혹시 근처에 가게 없을까?”
“괜찮으니까 그냥 들어오세요. 얼굴 얼겠습니다.”
“그래도 오랜만에 뵙는 건데.”
이서가 시무룩하게 중얼거리며 주변을 둘러봤다. 선물로 살 만한 가게는 보이지 않았다.
“고모는 따님 집에 계세요. 병원 치료 때문에 올라가신 거라 적어도 며칠은 거기 계실 겁니다.”
“아…….”
“그러니까 빨리 들어오세요. 음식 해 놨는데 식겠습니다.”
그러고 보니 집 안에서 음식 냄새가 풍겨 왔다. 아침도 먹지 않고 세 시간을 내리 달려온 터라 허기가 졌다. 진강도 마찬가지였다. 휘준 역시 아무것도 못 먹고 둘이 오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 들어가자.”
대문 바로 앞에서 망설이던 이서가 먼저 집 안으로 들어갔다. 휘준과 진강도 그 뒤를 따라 들어갔다.
* * *
휘준이 차려 준 건 닭백숙이었다. 옻나무와 인삼이 투박하게 썰려 들어간 백숙의 살코기가 야들야들했다. 뜨끈한 국물에 차갑게 얼어붙은 몸이 순식간에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밑반찬으로 나온 나물들의 맛도 일품이라 순식간에 한 그릇을 거의 다 비웠다.
“핸드폰은요?”
제일 먼저 숟가락을 내려놓은 휘준이 더는 못 기다리겠다는 듯 물었다. 마지막 한 숟갈을 뜨고 있던 이서가 음식을 다 씹지 못하고 꿀떡 삼켰다. 조금 전까지 찰기가 돈다고 생각했던 밥알이 마치 모래알이 된 기분이 들었다.
“차계원 씨한테.”
“그걸 왜 차계원 씨가 갖고 있습니까?”
휘준이 언성을 높이려다 참는 게 느껴졌다. 밥상을 앞에 두고 침묵만 흘렀다.
“선배, 그때 저랑 약속했습니다. 무슨 일 있으면 말해 주기로.”
“응…….”
이서는 대답을 해 놓고도 그동안의 일들을 쉽게 털어놓지 못해, 애꿎은 장판만 약하게 긁었다.
휘준은 몇 번이고 당부했었다. 언제나 그랬다. 어떤 일이어도 좋으니 문제가 생기면 바로 이야기하라고 했었다. 그건 분명 힘이 됐지만 어떤 때는 도리어 말을 삼키게 됐다.
“선배가 집에 계신다고 한 날. 집에 찾아갔었습니다. 선배는 없고.”
“…….”
“처음 보는 남자가 나와서 이사한 지 한참 됐다고 하더군요.”
말끝마다 힘주어 말하는 휘준은 분명 화나 있었다. 본인의 머리를 마구 헝클어트리는 손길이 거칠었다. 더 이상 그에게 숨길 수 없었다.
“두 분 사이에 있었던 일은 묻지 않겠습니다. 초반에 제가 한 말 기억하시죠. 차계원 씨 내보냈으면 좋겠다고 말씀드린 거.”
그가 살짝 고개를 숙인 채 날카로운 눈빛으로 눈을 올려 떴다.
“기억해.”
“계약 해지 하십시오. 납치에 감금까지, 그냥 둘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회사에 있는 내내 제멋대로였잖아요. 고작 몇 달 안에 스케줄 펑크에 진강 씨 작품은 다 엎어지고.”
휘준 또한 진강의 작품이 줄줄이 엎어진 게 우연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보잘것없는 회사에 제 발로 걸어 들어온 것부터가 계획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백이서는 그저 휘두르기 편해서 이 회사를 선택했을 거라 했으나, 자신은 그렇게 생각해 줄 만큼 순진하지 않았다.
“우리 쪽에서 먼저 계약을 해지하면…….”
이서의 목소리가 더 작아질 수 없을 만큼 작아진다. 이제 아무것도 숨기면 안 된다. 꼬일 대로 꼬인 일들을 더 꼬이게 둘 수는 없다. 있는 그대로 다 털어놔야 했다. 이서가 한 손으로 자신의 팔을 감싸 쥐었다. 얼마나 세게 쥐었는지 손톱이 피부 새로 파고들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