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
“위약금을 물어야 돼.”
“얼마나요.”
휘준이 체념한 듯 고개를 끄덕인다. 심정이야 답답했으나, 푸석한 얼굴로 앉아 있는 백이서에게 화를 낼 수도 없었다. 단 며칠 만에 살이 얼마나 빠졌는지 옷 위로도 뼈대가 보일 지경이었다. 위약금이야 당연히 따라올 걸 예상했다. 그리고 고작 위약금 같은 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20억.”
“예?”
“뭐라고요?”
진강과 휘준이 동시에 기함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바람에 안 그래도 위축되어 있던 이서의 어깨가 더 움츠러들었다.
“내가 서명했어.”
“서명하셨다고요? 위약금 20억을요? 아무리 차계원이라지만 대체 왜 그런 금액을 내세우신 겁니까?”
“내가 내세운 게 아니야. 서명할 때는 몰랐어. 정말……. 정말 몰랐어. 나는 그냥 차계원 씨가 들어온다고 하니까 마냥 좋아서…….”
“그래도 그렇죠. 20억이 남의 집 개 이름도 아니고 너무 터무니없는 금액이잖습니까…….”
“처음이잖아. 누가 먼저 우리 회사에 들어오겠다고 해 준 거. 너도 알잖아. 다들 나가려고만 했지…….”
이서의 목소리에 물기가 서리기 시작했다. 자신은 왜 이렇게 매사에 멍청하고 한심할까. 남들은 멀쩡히 제 밥그릇 정도는 채우며 살아가던데, 어째서 자신만 이 나이 먹을 때까지 사람 구실도 못 할까.
“기회인 줄 알았어. 다들, 다들 인생에 한 번쯤은 기회가 온다고 하잖아. 노력하면서 살면 그런 게 온다고, 다들 그렇게 말하잖아. 우리한텐 그런 거 한 번도 없었으니까……. 계속 빚만 있었으니까……. 바닥만 기었으니까, 드디어 누군가가 우리 노력을 알아봐 준 거라고, 그렇게 생각했어.”
“…….”
“빚은 늘어나지, 그나마 있는 애들은 나가겠다고 하지, 김승주는……. 도저히 못 찾을 것 같지. 그 와중에 내밀어지는 계약서가……. 나한테 오는 마지막 희망으로 보여서.”
휘준이 착잡한 심정으로 자신의 양 관자놀이를 내리눌렀다. 백이서가 얼마나 고군분투하며 뛰어다녔는지 제일 잘 아는 사람이 저 자신이었다. 반항심에 시작했다가 이제는 손도 대지 않게 된 담배가 오늘따라 절실히 생각났다.
“잠시만요. 계약서가 내밀어졌다니 무슨 뜻입니까?”
가만히 듣고만 있던 진강이 짚었다. 백이서의 말에 납득되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
“차계원 씨가 처음 회사에 올 때 계약서를 들고 왔었어. 회사에 들어오는 걸 동의하면 서명하라고. 위약금이 20억인 건 그 뒤에야 알았어.”
“계약서를 작성한 게 형이 아니라는 소리입니까?”
진강이 기가 찬다는 표정으로 눈살을 찡그렸다. 자신이 처음 계약을 위해 회사에 방문했을 때가 떠올랐다. 소파에 자리 잡고 앉아 자신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샅샅이 훑던 차계원의 쎄한 눈빛은 꽤 오랫동안 기억에 남았었다.
“불법이에요. 그거.”
휘준이 화를 꾹꾹 눌러 참고 겨우 차분함을 가장하며 말했다. 이가 바득바득 갈리는 게 잘못하다가는 욕설만 한 바가지 내뱉을 것 같았다. 어떻게 뻔뻔히 계약서를 들이밀었을까. 그것도 말 같지도 않은 금액까지 써서.
“알아……. 그런데 어떡해. 이미 사인은 했고, 차계원을 상대로 고소할 수도 없는 노릇이잖아. 심지어 이제 사무실도 없고.”
“왜요! 왜 못 합니까? 소송 걸면 되죠. 사무실도 다시 구하면 될 문제입니다. 어렵게 돌아가고 있는 거예요, 지금.”
결국, 참지 못한 휘준이 소리를 버럭 질렀다. 소리치고 싶은 대상은 여기에 없는데 화가 다스려지지 않았다.
“선배한테 화내는 거 아닙니다.”
“알아.”
이서의 대답에는 힘이 없었다. 자신도 이렇게 답답한데 듣는 휘준의 속이 오죽할까 싶었다. 그러나 아직 하나 말해야 할 게 남아 있었다.
“회사 빚…….”
“예.”
휘준은 덤덤하게 대답했으나 상 위의 물을 한꺼번에 들이켰다.
“원래 있던 빚 채무자가 차계원이 됐어.”
“무슨 뜻입니까?”
“지금까지 갚던 이자나 원금, 이제 차계원한테 갚아야 해. 그래서 더 고소 같은 건 생각 못 했어.”
거기까지 듣던 휘준은 분노 이전에 소름이 끼쳤다. 단 몇 달이다. 차계원이 회사에 들어온 지 몇 달밖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어떻게 이 정도로 옭아맬 수가 있을까. 백이서에게 고소하자는 의견은 냈으나 이야기를 들을수록 저조차도 자신이 없었다. 아직 모르는 뭐가 더 있는 건 아닐까. 고소해도 통할까. 아무 방법도 취하지 못한 채 오래된 장판만 쥐 뜯고 있는 백이서의 심정이 백번 이해됐다. 차계원은 자신들의 생각보다 더 교활하고 똑똑했다.
“김승주는요? 그 인간, 선배 찾아간 거 맞죠.”
“어…….”
이서가 눈을 아래로 굴린다. 김승주가 찾아왔던 이야기까지 오늘 하게 될 줄은 생각하지 못했던 탓이다. 김승주의 이름만 나와도 펄펄 뛰는 휘준이라 더 조심스러웠다.
“돈 받아냈습니까? 원금이라도요. 설마 그냥 보내시진 않았겠죠.”
“그게.”
“지금 어디랍니까? 연락처 아시죠. 합병하자고 떠든 거 보면 돈이 있어서일 거 아닙니까.”
언제고 급한 걸 모르던 휘준인데, 상황이 상황인지라 조급하게 몰아붙이게 됐다. 반쯤 포기한 듯 무기력한 이서의 태도도 그의 조급함에 한몫했다.
“연락이 안 돼.”
“하…….”
“원금 갚겠다고, 그러려고 왔다고 했는데 마지막에 전화했을 때는 꺼져 있었어. 합병 틀어져서 도망간 거 같아. 그런 사람이니까.”
이서는 김승주가 도망갔을 거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나 휘준은 아니었다.
“아니요. 그럴 리 없습니다. 합병이 틀어졌다는 이유 하나로 그 인간이 그냥 간다고요? 아마 한몫 챙기고 싶어서 눈이 돌았을 겁니다.”
휘준이 아는 한 그는 쉽게 변할 인간이 아니었다. 이제 와서 찾아왔다는 것 자체가 그걸 말해 주는 격이었다.
연이은 스타 배우 영입 소식을 들은 거겠지. 그 인간이라면 배가 아파 찾아오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을 거다.
“아직 서울에 있을 겁니다. 찾아서 원금 갚게 하면 됩니다. 그게 아니더라도 채무 관계와는 상관없어요.”
“휘준 씨 의견이 맞습니다. 제가 감히 의견 낼 문제가 아닌 줄은 압니다만, 저도 계약부터 무효로 만드는 게 먼저 같습니다.”
진강도 얕게 고개를 끄덕였다.
“서명했다던 계약서는 어디 있습니까? 그거 먼저 확인해야겠습니다. 다른 조항들도 봐야 대비할 수 있을 테니까요.”
“……없어.”
“네?”
휘준이 헛웃음을 쳤다. 너무 기가 막히니 웃음밖에 안 나왔다.
“차계원네 집에 있는 겁니까? 사무실에 두고 왔다거나 아니면.”
“못…… 받았어. 차에서 잠깐 마지막 부분만 읽어 본 적이 있기는 있는데, 그게 다야.”
“한 부씩 갖고 있어야 맞는 거잖습니까.”
“맞는데, 안 줘서…….”
백이서가 시선을 아래로 떨어뜨린다. 휘준은 더 말을 잇지 못했다. 무언가를 말하려다가도 입이 닫혔다. 턱관절이 잘못 맞물리는 느낌이 들었다. 문득 방 안의 공기가 답답했다. 옛날식 한옥의 나무 문을 부수듯 열어 찬 공기를 마주하고 나서야 조금 정신을 가다듬을 수 있었다.
“차라리 잘된 걸지도 모릅니다.”
“뭐가요.”
진강이 침착한 목소리로 무거운 분위기를 깼다. 휘준은 그런 그에게 차갑게 물었다. 잘된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하나부터 열까지 다 잘못 끼워졌으며, 문제였다.
“계약서도 계약한 본인에게 주지 않았고, 조항도 상의해서 정한 게 아니잖습니까. 계약 자체가 성립될 수 없습니다. 소송 걸면 무조건 계약 파기입니다.”
“아, 아니라고 하면?”
이서가 입술을 깨물며 물었다. 단호한 진강의 태도에도 불안했다. 그게 뭐든 결국에는 차계원이 그리던 그림대로 되고 만다. 뭐라도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듦과 동시에 상황을 바꿀 가망이 없다는 생각도 같이 들었다.
“차계원이 그런 적 없다고, 상의하에 계약한 거라고 하면 어떡해……?”
“법조계에 아는 분이 몇 분 계십니다. 아버지 지인이기는 하지만 최대한 도움 될 수 있도록 해 보겠습니다.”
진강도 아버지와 친밀한 관계는 아니었다. 그러나 이 상황을 보면서도 손 놓고 있기는 마음이 편치 못했다. 뭐라도 돕고 싶었다. 아니, 차계원의 손아귀에 백이서가 빨려 들어가는 걸 도저히 보고 싶지 않았다.
“이대로라면 아무것도 안 됩니다. 차계원이 발뺌하든 말든 흔들릴 이유 없어요. 빚이나 회사 걱정은 그 뒤에 할 일입니다.”
휘준의 태도도 강경했다. 그러나 이서는 입술만 세게 물며 저 깊숙이 고개를 떨어뜨릴 뿐이었다.
* * *
차계원의 본가는 서울 근교에 위치해 있었다. 집과 먼 거리도 아니면서 그는 명절 때도 본가를 찾지 않았다. 늘 바쁘다는 핑계를 댔었으나 그저 핑계에 불과하다는 건 모두가 알았다.
“쯔.”
계원이 머리를 쓸어 올리며 혀를 찼다. 집에서 오는 연락은 족족 무시했는데, 어머니가 얼마 전 막은 기사를 거론하며 강경하게 나오는 바람에 오는 수밖에 없었다. 웬만하면 계원이 오든 말든 상관하지 않는 사람이 그러는 걸 보면 할 이야기가 있는 걸 테다.
“우리 동생은 얼굴 보기가 하늘의 별 따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