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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도덕적 안락함-82화 (82/100)

#82

마당에 들어서기가 무섭게 강지묵이 말을 붙여 온다. 계원이 그를 무시하자 보란 듯 손을 눈앞에서 흔들며 빙글빙글 웃는다.

“정 없기는. 알은척은 해라, 좀.”

“낄 데 안 낄 데 구별 못 해? 네 집 가.”

계원이 그의 흔들거리는 그의 손을 우악스럽게 쳐내고 앞서 걸었다. 며칠 전부터 날카롭던 신경은 작은 일에도 위태롭게 흔들렸다.

“낄 데 제대로 찾아왔는데? 조카가 고모네 오는 게 뭐가 문제야.”

“왜 왔는데.”

앞을 가로막으며 끊임없이 따라붙는 강지묵에게 계원이 건조한 목소리로 물었다. 자신과 닮은 것 같으면서 닮지 않은 저 얼굴이 오늘따라 더 짜증 났다.

“고모가 식사나 하자 하시길래. 누구랑 달리 난 가족적이잖아.”

“부탁할 게 있는 거겠지.”

계원이 그에게 얼굴을 들이민 채 피식 비웃었다. 그가 있는 대학 병원에서 얼마 전 의료 사고가 났다. 조용히 묻히는가 싶더니 피해자가 들고일어나며 일이 커졌다. 강지묵의 얼굴은 웃는 낯 그대로였으나 눈가가 살짝 떨렸다.

“세상만사 관심 없는 놈인 줄 알았는데 아닌가 봐. 형에 대해 이렇게 많이 알고 있고.”

그러나 그것도 잠시. 곧 능구렁이처럼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하곤 주제를 피했다.

“그 나이 먹고 의사씩이나 됐으면 네 앞가림은 네가 해.”

계원이 한심하다는 얼굴로 그를 내려다봤다. 강지묵은 이 정도 반응쯤이야 익숙하다는 듯 어깨만 으쓱였다.

“너야말로 언제까지 네 뒤치다꺼리 고모님한테 맡길 거야? 요즘 네 말이 얼마나 많이 나도는지 이제 덮기도 힘들겠던데.”

계원의 어머니가 운영하는 언론사는 그 힘이 꽤 셌다. 어머니는 자식에게 지대한 기대나 관심은 없었지만, 너저분한 말이 나오는 건 싫어했다. 그렇다고 주의를 주거나 계원의 인성을 고치려 했느냐 하면, 그건 또 아니었다. 그녀의 양육 방식은 방임에 가까웠기에 오늘처럼 계원을 부르는 일은 적었다.

다만, 요즘 계원에 대한 소문의 수위가 높아지자 심기가 언짢은 듯싶었다

“요즘 대중들 얼마나 똑똑한데. 그러다 밥줄 끊긴다. 너.”

“네 명줄이나 걱정해.”

차가운 말투에 강지묵이 징그럽게 입술을 죽 뺐다. 조금 변했나 싶더니 차계원은 오늘도 똑같이 재미없었다. 어떻게 들쑤셔도 별 타격이 없다.

“이서 씨는? 잘 있냐?”

지묵이 뒤로 미뤄 놨던 이름을 꺼냈다. 차계원이 현관을 열다 말고 뚝 멈춰 섰다. 죽일 듯이 노려보는 시선에서 살기가 느껴졌다.

“갔더니 문 안 열어 주더라? 초인종이 고장 났나? 몇 번이나 눌렀는데 아무 소리 안 나더라고.”

무료한 삶에 재미 좀 더할 겸 환자를 보겠다는 핑계도 있는 김에 찾아갔는데, 마당에도 발을 못 디뎠다. 초인종은 고장 났는지 눌러도 소리가 나지 않았고, 저택 대문을 뻥뻥 차도 나오는 사람 하나 없었다. 당연히 차계원은 제 전화도 안 받았다. 결국 지묵은 약이 바짝 오른 채로 돌아왔다.

“이서 씨랑 먹으려고 타르트도 사 갔었는데.”

지묵이 느물거리며 타르트를 떠먹는 시늉을 했다. 이래도 흥, 저래도 흥. 하던 놈이 잔뜩 신경을 곤두세우는 걸 보니 지루하던 아침이 상쾌했다.

“너, 한 번만 더…….”

징. 징.

무언가를 경고하려던 계원이 말을 멈추고 핸드폰을 꺼냈다. 핸드폰을 안 줬으니 백이서의 연락은 아닐 테다. 그래도 확인해야 했다. 집을 나서면서부터 속을 술렁이게 하던 기분 나쁜 불안감이 점점 덩치를 키우고 있었다.

“씨발.”

“뭔데 그래?”

계원이 짓이기듯 욕을 읊조렸다. 잘생긴 얼굴이 하얗게 질려가는 걸 보며 지묵이 화면을 훔쳐보기 위해 고개를 죽 뺀다.

“으억!”

차계원이 손바닥으로 지묵의 얼굴을 밀친 후 빠른 걸음으로 걸어 나갔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눈앞이 번쩍하더니 코가 찡했다.

“이 미친 새끼가 진짜! 야!”

뒤에서 길길이 날뛰는 지묵에게는 눈길조차 안 준 계원이 차 키를 꺼내며 메시지를 찬찬히 다시 읽었다. 보안 업체에서 온 메시지에는 경보가 울렸으나 자택에는 아무 이상이 없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계원이 핸드폰을 우악스럽게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의 걸음이 빨라졌다. 화를 내며 쫓아가던 지묵은 생전 처음 보는 차계원의 모습에 멍하니 입을 다물었다. 그러다 대문 밖으로 빠져나가는 계원을 보고는 다급히 붙잡았다.

“잠깐만, 너 지금 왔으면서 어디 가?”

“놔.”

그의 건조한 음성이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지묵은 잠시 움찔했으나 곧 그의 팔을 당겼다. 차계원은 고모를 닮았다. 고모는 그 못지않게 냉정하고 칼 같은 분이었다. 이대로 간다면 탐탁지 않아 하는 걸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차계원도 그걸 모르지 않을 텐데.

“진짜 가게? 고모 화 많이 났어. 얼굴 뵙고 가.”

그러나 계원은 단박에 지묵의 손을 쳐냈다. 그는 진심으로 화를 내고 있었다. 결국 지묵은 차에 오르는 계원을 보고만 있을 수밖에 없었다.

* * *

“씹…….”

차에 오른 계원이 핸들을 쾅 내리쳤다. 차 키가 자꾸만 헛돌았다. 겨우 차 키를 꽂아 넣고 시동을 걸었다. 벨트를 할 정신도 없었다. 액셀을 세게 밟자 차체가 튀어 나갔다.

‘설마.’

아침부터 스멀스멀 온몸을 기어 다니던 불안감이 이제 방향을 잃고 이리저리 뻗어 나갔다. 도망갔을 리가 없다. 그럴 리 없다. 대문은 안에서 열 수 없게 해 뒀고, 담은 보통 사람이 넘을 수 있는 높이가 아니다. 혹시나 해서 발을 디딜 만한 물건도 죄다 없앴다. 아니, 다 떠나서 그 콩알만 한 간으로 도망갈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럴 주제도 못 된다. 갈 데도 없는 인간이다.

“하.”

유순하게 눈을 깜빡이며 마당에서 쉬고 싶다던 얼굴이 떠올랐다. 느리게 눈을 감았다 뜰 때마다 잠에 취한 것처럼 몽롱한 눈이 자신을 마주 봤다. 눈곱이 덕지덕지 붙은 얼굴은 세상 누구보다 무방비했다.

“제길……!”

그가 험악하게 핸들을 꺾으며 가파른 도로를 내달렸다.

* * *

이서가 휘준의 집에서 지낸 지도 2주가 지났다. 진강은 서울로 올라갔다. 드문드문 휘준과 통화하며 정보를 주고받았다. 소송 준비는 생각보다 순조로웠다. 마음을 정하고 나니 짐을 덜어낸 듯 편했다.

휘준이 끼니를 하도 잘 챙겨 줘서 살도 슬슬 올랐다. 그저께부터는 옆집 이웃이라는 분이 강아지를 맡기고 가서 시간도 빨리 갔다. 태어난 지 막 3개월이 지난 강아지는 눈에 보이는 건 죄 입에 넣고 봤다. 순조롭게 시간이 흐르는 와중에 걸리는 문제는 따로 있었다.

“작품들이 문제네.”

바로 직전에 차계원이 계약했던 작품들이었다. 화보와 광고를 통틀어 총 세 개의 계약이 성사돼 있었다. 회사와 차계원과의 계약이 해지되면 이것들도 모두 무산된다. 영화도 문제였다. 스페인에서의 촬영만 앞둔 영화는 무산되면 피해가 극심했다. 배우야 다시 캐스팅하면 되겠지만 차계원과 견줄 만한 배우가 마땅히 없었다.

“여기서 엎어지면 이 위약금도 엄청 발생되겠지?”

“계약 해지의 책임이 차계원에게 있어서 위약금도 차계원 씨 책임입니다.”

“아니면 우리 책임이 되는 거고.”

이서가 덤덤한 투로 중얼거렸다. 하얀 몸에 귀에만 갈색 얼룩이 있는 강아지는 배를 긁어 주자 도롱도롱 잠이 들었다. 작품 고르는 게 까다롭기로 유명한 차계원이, 군말 없이 연달아 세 개의 작품을 하겠다고 했을 때 의심했어야 했다. 기획안은 쳐다보지도 않고 껌 한 통 사듯 가볍게 승낙한 의미가 따로 있었다.

“계약 해지의 책임은 차계원한테 있어요. 그 사람이 어떻게 나와도 이게 사실입니다.”

“나도 알지…….”

이서가 이미 잠든 강아지의 털을 계속 쓰다듬었다. 구들장 위에 몸을 축 늘인 짐승은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편안해 보였다.

사실 이서는 아직도 이 방법이 맞는가에 대한 확신이 들지 않았다. 평온한 시간이 지속될수록 속은 심란했다. 끝없이 꺼림칙하고 찝찝했다.

“어제 심찬 형께서 연락했었습니다.”

“찬이 형이?”

찬이 형은 저번에 이서가 이자금을 빌린 이후 딱히 연락이 없었다. 그게 그 나름의 배려라는 걸 이서는 알고 있었다.

“네. 선배 연락이 안 된다고요. 저번에 빌린 돈, 빨리 갚아 줘서 고맙다고 전해 달랍니다.”

휘준은 언뜻 보면 그냥 말만 전달하는 것 같았으나, 무슨 일인지 궁금해하는 게 그의 눈빛에서 읽혔다. 그러나 이서의 신경은 다른 곳에 가 있었다. 이자금이 급해 빌리기는 했지만 아직 갚지는 못했다.

“갚아?”

“일주일도 안 돼서 갚으셨다면서요.”

“…….”

어떻게 된 건지 굳이 알아보지 않아도 어떻게 된 일인지 그려졌다. 차계원이 갚았겠지. 자신이 심찬 형에게 돈을 빌렸다는 사실을 아는 건 그밖에 없으니까. 또 그에게 갚을 빚만 늘어난 거다. 가시밭길에 서 있는 기분이었다. 이서가 이곳에 있는 것도 차계원은 이미 알고 있는 게 아닐까. 알면서 그냥 두는 거라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즈음 옆에서 집요한 시선이 느껴졌다.

“그, 이자금이 급해서 잠깐만 빌렸던 거야. 큰 금액은 아니었어.”

“저한테 말씀하시죠.”

“너한테 돈까지 빌리는 건 그렇잖아.”

“어디가 말입니까?”

이서가 실없이 웃는다. 묵묵한 녀석이 요즘 따라 말수가 는 게 신기했다.

“다음엔 너한테 말할게.”

“예.”

휘준은 그거면 됐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김승주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대학 동기들한테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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