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
“동기들을 찾아갔대? 아직 서울에 있는 거야?”
귀가 번쩍 뜨였다. 김승주는 대학 때도 여기저기 친한 사람이 많았다. 소위 마당발이라, 그가 대학 사람들을 만나고 다녔다면 소식이 들릴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야 대학 사람들과 연을 끊었다 해도 휘준은 간혹 연락 정도는 하는 것 같았으니까.
“제 생각에는 그런 것 같은데 확신은 못 하겠습니다. 새 사업을 시작한다고 자금줄을 구하고 다녔답니다. 시기로 봐서 합병 틀어진 그 시기 같은데, 잠깐 그러더니 또 연락이 없더랍니다.”
“참 한결같아.”
원금을 갚겠다는 소리도 처음부터 거짓말이었겠지.
“그런데 이상한 소문이 돕니다.”
“……?”
휘준이 잠깐 뜸을 들이다 이서의 표정을 살피고 다시 입을 열었다.
“자살했다는 소문이요.”
순간 이서가 숨을 멈췄다가 곧 바람 빠진 소리를 냈다. 그 욕망 그득한 사람이 죽었을 리가. 세상 사람 다 죽어도 끝까지 아득바득 살아남을 인간이다.
“헛소문이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저녁은 잔치국수 먹을까? 너 그거 잘하더라.”
“저보고 해 달라는 소리입니까.”
“응.”
특별히 먹고 싶은 건 아니었으나 대화 주제를 돌리고 싶었다. 휘준이 어쩔 수 없다는 듯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Immoral to be comfortable
쨍그랑.
유리로 된 장식품이 벽 귀퉁이를 맞고 깨졌다. 파편이 이리저리 튀어 나가 이미 바닥에 가득한 파편들과 섞였다. 무작정 손에 잡히는 걸 집어 던져 뭘 던졌는지도 정확히 모르겠다.
“헉, 헉.”
숨이 찼다. 폐부에 먼지 찌꺼기들이 가득 들어찬 것 같았다. 계원이 니트의 목 부분을 잡아 뜯는다. 갑갑했다.
“하아…….”
백이서는 도망갔다. 매번 덜덜 떨기만 하던 주제에, 결국에는 무력하게 제가 하는 대로 휘둘렸었으면서 끝내 도망쳤다.
정신이 팔려 있어 이진강의 차가 바로 옆에 있었는데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나중에 CCTV를 돌려보고 나서야 이진강임을 알았다.
“그 개새끼 먼저…….”
매번 백이서에게 개수작을 부리던 놈이었다. 배알이 뒤틀릴 때 진즉 손을 썼어야 했다. 답지 않게 미뤄 두는 게 아니었다.
“분명.”
분명 도망갈 구석은 다 막아 놨다고 생각했는데. 갈 데라고는 자신의 집밖에 없는 인간인데. 아니, 지금이 아니더라도 이렇게 됐을 수 있다.
“…….”
처음부터 이럴 생각은 아니었다. 그저 몇 년 만에 나타나서 자신은 기억조차 못 하는 게 얄미워 살짝 골려 줄 생각이었다. 잊을 만하면 꿈에 나와 고작 하룻밤으로 끝난 일을 끄집어냈으면서,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로 앞에 있으니 약이 올랐다. 그런데 또 그 말간 얼굴을 보고 있자면 몸이 동했다.
미끼를 풀면 멍청하게 속아 넘어오는 게 흡족했다. 말로는 떨어져 달라면서 안고 있으면 금방 잠들던 몸은, 씹어 먹고 싶을 정도로 만족스러웠다.
이유 모를 무언가가 신경을 건드리기 시작한 건 얼마 안 됐다. 예를 들면 표정 같은 것. 어느 순간부터 아무 감정도 안 담긴 표정이 자신을 마주 보면 가슴 한편이 선득했다. 그 아무것도 안 담긴 눈에 가끔 불쾌함이나 두려움이 서리기라도 하면, 진창에 빠지는 것보다 더 좆같은 기분이 들었다.
수십 번은 더 몸을 섞어 놓고도 아무렇지 않아 하는 무신경함은 사람을 돌아 버리게 했다. 어떻게든 빠져나갈 생각만 하는 머릿속도 터트려 버리고 싶었다.
징. 징.
진동 소리에 다급하게 핸드폰을 찾아 잡았다. 모르는 번호였다. 계원이 다급하게 통화 버튼을 눌렀다. 계약 때문이라도 연락 올 때가 됐다. 그나마 남은 회사마저 망할까 봐 전전긍긍이었으니까.
[계원아!]
그러나 핸드폰 너머에서 들려오는 건 기대했던 목소리가 아닌 김건의 목소리였다. 계원은 어머니 집에서 나온 뒤로 집에서 오는 연락이나 김건의 연락은 죄다 무시하고 있었다.
[네가 자꾸 연락을 안 받아서 다른 번호로 했어. 문자 봤지? 회사에서 소송 들어올 거 같아. 어떻게 된 거야? 나한테는 설명해 줘야지……!]
퍽.
계원이 다 듣기도 전에 핸드폰을 집어 던졌다. 액정이 산산 조각난 핸드폰은 바닥을 나뒹굴었다.
“하. 소송?”
계원이 비릿하게 비웃었다. 무슨 짓거리들을 꾸미느라 머리털 하나 안 보이나 했더니 소꿉놀이나 하고 있었다.
“…….”
지금 드는 후회는 단 하나였다. 자신은 더 철저했어야 한다. 서휘준이나 이진강 같은 거머리들은 진작에 쳐냈어야 했고, 백이서는 도망갈 생각조차 못 하게 해야 했다. 그깟 빚 몇 푼이나, 회사를 인질로 삼는 건 부족했다.
“소송이라.”
계원이 이를 사리물며 눈을 번뜩였다.
* * *
계약은 해지됐다. 소송까지는 갈 일도 없었다. 차계원 측에서 먼저 계약을 무산시켰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허무하기도 하지만, 다행입니다. 본인도 사람이니 일말의 양심은 있었겠죠. 아니면 불리할 걸 알았거나.”
“응. 다행이네.”
이서는 말하면서도 다행이라는 단어를 속으로 곱씹었다. 과연 다행일까. 그라면 분명 본인이 유리한 쪽으로 상황을 끌고 갔을 수도 있었을 거다. 소송으로 갔어도 그가 이길 수 있었을 거다. 진강과 휘준은 아니라고 했으나 이서의 예감은 달랐다. 정말 이렇게 쉽게 마무리된 게 맞을까.
잡혀 있던 화보와 광고도 없던 일이 됐다. 위약금을 물 것도 없이 서로 원만하게 합의됐다. 아마 회사가 아닌 차계원의 얼굴을 봐서 그렇게 해 준 것 같았다. 영화는 그대로 진행하는 것 같았으나 정확히는 모른다. 알고 싶지도 않았다.
“핸드폰 새로 구해 드릴까요.”
“아니, 지금이 편해.”
휘준이 물었으나 이서는 고개를 내저었다. 제 의지로 시작된 건 아니지만 지금의 고요한 일상이 나쁘지 않았다. 낮에는 강아지와 놀아 주며 소일거리를 도왔고, 저녁에는 약초 차를 다리거나 음식을 만들어 먹었다. 입이 심심하면 고구마를 굽기도 했다. 농촌의 겨울은 바쁘지 않아서 마음에 여유를 가져다줬다. 물론 가끔 드는 두려움은 이서를 잠 못 들게 했으나, 최대한 고요한 시간을 즐기기 위해 노력 중이었다. 계속 드는 부정적인 상상도, 휘준에게 티 내지 않고 떨쳐내려 했다.
“지금이 딱 좋아, 나는. 기자들이나 빚쟁이들 연락도 없고. 회사 일도 손댈 만한 게 없고.”
계약이 해지되니 회사도, 직원들도 상관없는 일이 됐다. 차계원이 온 회사 일에 관여했던 게 이런 식으로 도움이 될 줄은 몰랐다. 사무실도 없는 터라 휘준과 이서는 반백수가 됐지만, 차라리 이게 옳다는 생각이 들었다.
“핸드폰 없으니까 기사 확인도 안 하게 되잖아. 오히려 편해.”
하지만 빚도 그대로고 회사 상황도 그 전과 같다. 이서는 계속 드는 부정적인 상상을 휘준에게 티 내지 않기 위해 애써 떨쳐내려 했다.
“저희, 아예 다른 일을 시작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습니다.”
“나도 그 생각 해 보기는 했는데, 진강이가 걸려서. 그리고 뭘 할 수 있을지도 잘 모르겠다.”
이서가 멋쩍게 웃으며 볼을 긁적였다. 이 나이 먹고 회사에 신입으로 취업하는 것도 힘든 일이고, 할 줄 아는 일도 별로 없는 자신이 인제 와서 전공을 살리기도 무리가 있었다. 게다가 이진강에게도 마음이 쓰였다. 그는 계속 이서의 회사에 남기를 바랐다.
“이진강 씨야 선배 좋아서 달라붙는 거 아닙니까? 어떤 일을 하든 친하게 지내면 되죠.”
“너, 너 알고 있었어?”
휘준이 무뚝뚝하게 말했다. 이서가 화들짝 놀라며 말을 더듬었다.
“티가 나니까요. 맨날 얼굴 벌게져서 오잖습니까.”
“넌 다 알면서 티도 안 내고…….”
“제 일도 아닌데 나서서 뭐 합니까?”
이번에는 이서의 얼굴이 벌게졌다. 휘준이 모른 척 목장갑 낀 손으로 군고구마의 껍질을 벗겼다. 어떻게 구웠는지 탄 부분이 더 많았다.
“숯을 만드신 겁니까?”
“……아궁이에 굽는 게 익숙지 않아서 그래.”
“제때 꺼내기만 하시면 되는데요.”
휘준이 도통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으로 검게 탄 고구마의 옆 부분을 눈앞에 들이민다. 제가 봐도 사람이 먹을 수 있는 게 아니라, 이서는 푸스스 웃고 말았다.
* * *
“야, 계원아…….”
건이 소파 근처를 서성이며 애타게 계원을 불렀다. 연락도 받지 않고, 문도 열어 주지 않아서 한 시간 넘게 대문을 두드리고 나서야 들어올 수 있었다. 그마저도 돌아가라는 차계원에게 몇 번을 사정한 끝에 겨우 말 붙이는 게 가능했다.
회사와의 계약이 해지되고 온갖 곳에서 연락이 왔다. 계약한 지 얼마 안 된 시점이라 추측성 반응들도 더 과열됐다. 계약 해지의 이유를 요구하는 기자들은 둘째 치고, 자신의 회사를 차계원의 다음 둥지로 만들기 위해 영업하는 이들 때문에 너무 힘들었다. 어떻게든 차계원을 영입하려는 기획사들의 노력은 끈질겼다. 듣도 보도 못한 곳부터 유명 기획사까지, 연락을 취해 오는 이들은 다양했다.
“정말 이대로 케이뉴랑 계약 해지 할 거야?”
팔을 이마에 대고 소파에 누워 있는 계원에게 건은 벌써 다섯 번은 넘게 물었다.
“이미 했잖아요.”
계속 건의 물음을 무시하던 계원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건이 이때다 싶어 그의 옆에 바짝 달라붙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