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
“내가 이해가 안 가서 그래. 갑자기 무슨 일이냐니까? 대표님이 소송까지 하려 했던 건 뭐고!”
“…….”
또다시 묵묵부답이었다. 건이 주먹으로 가슴을 쿵쿵 내리쳤다. 어떻게 된 건지 알아보려 서휘준과 백이서에게 연락을 취해도 아무도 받지 않았다. 백이서 대표는 소속 배우를 상대로 소송까지 걸 인물이 아니었다. 대체 차계원이 무슨 짓을 했길래 그렇게 해서라도 계약을 해지하려 한 걸까. 본인에게도 손해일 짓을.
더 이해 안 가는 건 차계원이었다. 저놈 성질에 배로 길길이 날뛰거나, 상황을 자신 쪽으로 유리하게 만들어야 정상인데, 그만둘 직원들에게 위로금이나 쥐여 주라는 게 다였다.
“대답 안 해 줄 거야? 어?”
건이 들으라는 듯 한숨을 쉬고 털퍼덕 주저앉았다. 겉옷을 입고 있는데도 냉기가 타고 올라왔다.
“바닥이 무슨 얼음장도 아니고…….”
건이 손바닥으로 대리석 바닥을 여기저기 짚었다. 짚는 곳마다 냉돌이 따로 없었다. 집에 들어설 때부터 한기가 돌더니 그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이래서야 바깥과 크게 다를 게 없었다.
“너 몸 상해, 인마!”
차계원은 이 추운 집 안에서 홀 겹 티셔츠와 바지 한 장이 다였다. 찾아보니 난방이 아예 꺼져 있었다. 급히 난방을 작동시키고 얇은 이불 하나를 가져와 덮어 주었다.
“됐어요.”
“너 밥은 먹는 거야? 어?”
가만히 누워 있는 계원은 눈에 띄게 수척해져 있었다. 워낙 기본 토대가 좋은 녀석이라 슬쩍 보면 그 특유의 퇴폐적인 인상이 좀 더 강해졌다, 정도지만 자세히 보면 멀쩡하지 못하다는 게 보였다. 피부는 사포처럼 거칠었고, 살이 하도 빠져 눈까지 움푹 파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안색도 파리한 게 꼭 어디 아픈 사람 같았다.
“너 혹시 대표님이랑…….”
“회사는 다 정리됐어요?”
계원이 칼같이 말을 끊었다. 건은 말을 하다 말고 입맛만 다셨다.
“어, 건물도 내놨고 직원들도 잘 설득시켰어.”
건물이야 워낙 자리가 좋은 곳이니 빨리 팔릴 거고, 직원들에게도 계원이 시킨 대로 위로금을 두둑이 주고 나니 불만을 가진 사람은 없었다.
“그럼 나가요. 생각할 거 있으니까.”
“회사랑 어떻게 된 거냐고! 명색이 매니저인데 나는 알아야 할 거 아니야! 그래, 그런 거 다 떠나서 일단 너 상태가 왜 이러냐니까?”
“…….”
건의 윽박에도 차계원은 더 말하고 싶지 않다는 듯 등을 돌리고 누웠다.
“야!”
“지금 안 나가면 사람 불러서 쫓아낼게요.”
그의 말투는 평소와 다름없이 재수 없었으나, 신경이 잔뜩 예민하게 곤두섰다는 게 느껴졌다.
같이 있으면서 ‘참을 인’ 자를 그려야 했던 적만 수백 번이다. 그러나 이런 모습은 처음인지라 건도 어떻게 해야 좋을지를 알 수 없었다. 다만, 한 번만 더 물었다가는 진짜 쫓아낼 거라는 사실 정도는 알았다.
“어후, 어후!”
건이 답답함을 내리누르며, 아직 온도가 오르지 않아 차가운 바닥에 다시 주저앉았다.
[차계원 계약 해지, 잘못은 누구에게?]
[신생 소속사의 말로.]
[소속사의 횡포, 더는 참을 수 없어.]
[차계원 최측근, 소속사 갑질 폭로해.]
이서가 휘준의 핸드폰을 발로 슥 치웠다. 어차피 더 내려 봐야 비슷한 타이틀만 한가득할 것이다.
“악질 중의 악질입니다.”
열이 오를 대로 오른 진강은 핏대를 세워 가며 기사의 내용을 하나하나 확인했다. 휘준은 이마를 짚고 이를 앙다물고 있었다.
“그런가.”
이서가 찐 밤의 속을 파내며 덤덤히 대답했다. 잘 쪄진 밤에서는 김이 모락모락 났다.
“역시 난 굽는 것 보다 찌는 걸 잘 하는 거 같아. 그치, 휘준아.”
“지금 밤이 들어가십니까.”
기사에는 백이서의 이름까지 오르내리고 있었다. 자신들도 몰랐던 회사의 문제들을, 마치 커다란 사건을 파헤치듯 조사하고 보도했다. 조롱과 멸시는 덤이었다. 대중들은 케이뉴는 물론 백이서까지 사회적으로 큰 파문을 일으킨 범죄자처럼 대했다.
“우리한테 무슨 억하심정이 그렇게 많답니까?”
분명 어제까지만 해도 계약 해지에 관한 내용과 추측성 보도가 전부였다. 그런데 오늘 아침이 되자 판도가 완전히 뒤집혀, 회사를 공격하는 기사들만 내리쏟아졌다.
“다 저희 탓이죠. 차계원 씨만 좋은 일 됐네요.”
시간이 지날수록 과장은 심해져, 계약 해지에 대한 모든 화살이 회사로 향했다. 역으로 차계원에게는 동정론이 실렸다. 그에게 맞지 않는 부당한 대우를 견디다 못해 이 지경에 이르렀다는 기사들이 태반이었다. 그리고 그 이면에는 회사가 저지른 큰 잘못이 있다는 게 기정사실화됐다.
“차계원이 손 안 써도 이 정도 기사는 예상했잖아.”
“…….”
기사들을 보며 화를 토로하던 휘준이 일순간 조용해졌다. 숟가락으로 밤을 긁는 소리만 방 안에 퍼졌다.
“차계원 씨가 손쓴 게 아니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그야, 모르는 거니까.”
“모르다니요. 자기 이미지 챙기려고 이러는 거잖습니까! 차계원의 어머니가 운영하는 언론사에서 제일 많은 기사가 쏟아졌습니다. 먼저 공격성 기사를 쓴 것도 거기고요.”
높아진 휘준의 목소리를 들으며, 이서가 긁어모은 밤을 한입에 털어 넣고 우물거린다. 차계원이 그랬다면 고작 여론몰이 조금 하는 거로 상황을 끝낼 것 같지는 않았다. 그리고 누가 손을 썼건 상관없었다.
“무시하자.”
“무시해서 될 일입니까?”
“어쩔 수 없잖아. 우리는 정정 기사도 못 내. 친한 기자도 없고, 있어도 누가 우리 편에서 써 주겠어. 그냥 사그라들 때 기다려야지.”
이서가 조곤조곤 말하며 잘 익은 밤을 잘라 휘준의 손에 쥐여 줬다. 그는 받은 밤을 먹을 생각도 안 하고 그냥 들고만 있었다.
“억울하지도 않으신가 봅니다.”
진강이 화면을 내리다 손을 멈췄다. 그가 기획사를 옮긴 뒤 작품을 맡지 못하는 것도 회사 탓이 되어 있었다.
“억울하지.”
당연히 억울했다. 차계원이 들어오고 이런저런 이슈들이 따라붙은 게 한두 번인가.
휘준은 다른 일을 시작해 보는 게 어떠냐 했지만, 그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어떻게든 구멍 숭숭 난 이 배를 이끌고 가야 하는데, 여론이 이런 식이면 앞으로의 방향에도 타격이 컸다. 그러나 이서는 그와의 상황을 정리하는 대가가 이거라면, 오히려 감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욕을 먹어도, 회사의 앞날이 더 불투명해져도 괜찮으니 이 정도로 마무리하고 쉬고 싶었다.
* * *
차계원이 로비를 가로질러 걸었다. 어머니의 회사로 찾아오는 건 근 10년 만에 처음이었다. 직원들이 그를 알아보고 너도나도 인사를 건넸다. 멀리서 자기들끼리 호들갑을 떠는 사람들도 있었다. 계원은 그중 누구의 인사도 받지 않고 대표실로 직행했다.
“대표님께서는 지금 출타 중이셔서요.”
낯익은 비서가 목적을 말하기도 전에 어머니의 부재를 알렸다. 젊은 시절부터 어머니 밑에서 일한 사람이었다. 어릴 때 종종 보아 온 그도 이제 중년이 다 되어 있었다.
“네.”
“안 됩니다……!”
계원은 대답만 하고 빠른 걸음 그대로 문 앞까지 걸어가 대표실 문을 열어 재꼈다. 비서가 헐레벌떡 달려와 제지하려 했으나 계원의 힘이 더 셌다.
“계시네요.”
그리고 그의 예상대로 어머니는 대표실에 앉아 턱을 괴고 있었다.
“죄, 죄송합니다. 말씀드렸는데 그냥 들어오시는 바람에.”
“나가 보세요.”
비서는 나가면서도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우지 않았다. 계원의 어머니 강인화가 길게 꼰 다리를 까딱였다. 일자로 짧게 자른 칼 단발이 그녀를 더 날카로운 인상으로 보이게 했다.
“앉으렴.”
앉으라는 말에도 계원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강인화도 예의상 한 말에 지나지 않을 뿐이라 딱히 신경 쓰지 않았다. 아침 시간을 방해받는 것이 성가실 뿐이었다.
“기사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해 주세요. 그런 식으로 내 달라고 부탁한 적 없잖아요.”
“넌 인사가 먼저 아니니?”
“어머니!”
“잘못 가르쳐도 한참 잘못 가르쳤어.”
강인화가 돌이라도 씹은 양 인상을 잔뜩 구기고 고개를 내저었다. 손까지 휘휘 흔드는 폼이 계원과 닮아 있었다.
“어머니가 하신 거죠. 오늘 기사들이요.”
“다들 너무 떠들어대길래.”
예상 그대로였다. 어머니는 딱히 부정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고맙게 생각하라는 뜻이 얼굴에 그대로 나타나 있었다.
“……내려 주세요.”
“적당히 해.”
혀를 차는 소리에 계원이 양 주먹을 꽉 쥐었다. 사람들은 그가 어머니를 닮았다고 하지만 계원은 그 말이 제일 듣기 싫었다.
“매번 너 필요할 때마다 내 아랫사람들 시켜서 입맛대로 구는 거 모를 거 같아? 내 직원들이 네 졸개쯤이나 되는 줄 아니?”
계원이 기사를 부탁한 건 딱 한 번이었다. 시사회를 펑크 내면서 백이서를 겁줄 요량으로 낸 기사들이었다. 어머니 귀에 들어갈 거라는 사실은 알았다. 어차피 그녀는 빤히 알면서도 신경 쓰지 않았다. 어머니는 자신의 커리어와 관련된 일 외에는 전혀 관심 없는 사람이었다.
“상관한 적 없으시잖아요. 계속 신경 쓰지 마세요. 그게 피차 편할 텐데요.”
데뷔 이래 계원과 관련된 기사들은 우호적인 내용밖에 없었다. 그건 분명 그의 이미지를 구축하는 데 큰 도움이 됐고, 어머니의 덕이 컸다. 그러나 계원은 한 번도 그런 걸 바란 적 없었다.
“그럼 내 일에 흠집 내지 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