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
앉아 있던 강인화가 자리에서 일어나 차계원에게 다가갔다.
“…….”
“네 뒷말 나오게 하지 말란 말이야. 알아듣겠니? 그리고 다음부터는 내 회사 오려면 약속 잡고 와.”
강인화가 손가락 끝으로 계원의 어깨를 쿡쿡 찔렀다. 고압적인 태도였다.
“기사가 잘못 나가지만 않았어도 찾아올 일 없었습니다. 계약 해지의 잘못이 있다면 제 쪽이에요.”
“네가 언제부터 사실 신경 썼니? 그리고 계약을 했건 해지를 했건 궁금하지 않아. 네 이야기가 오르내릴 때마다 내 회사 이름도 같이 거론되는 게 문제야.”
그녀가 손가락을 까딱이며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걸려 있던 외투를 입었다. 이만 나가라는 뜻이다.
“기사 정정해 주세요. 다른 언론사에는 제가 연락할게요.”
“싫다.”
“어머니.”
계원이 힘 있게 그녀를 불렀다. 그러나 강인화는 가볍게 그를 무시했다.
“그럼 배우 그만둬. 할아버지 회사로 들어가든 백수로 늙어 죽든, 다 상관없으니까 시끄러울 일 없애라고. 아니면 어디 섬에라도 박혀 있든가.”
“오늘 안에 내려 주세요. 분명 말씀드렸어요.”
“난 나간다. 차나 마시고 가렴.”
강인화가 콧방귀를 끼며 차계원을 지나쳐 나가려 했다. 그러나 계원의 날 선 목소리가 그녀의 발목을 붙잡았다.
“아버지도 아세요? 어머니 만나시는 분 있는 거.”
“너, 미쳤구나?”
경악스러운 얼굴로 돌아보는 그녀를, 차계원은 안타깝다는 듯한 표정으로 내려다봤다.
“여태 올린 거 내려만 주세요. 그럼 조용히 입 닫고 있을 테니까.”
* * *
타닥. 타닥. 장작이 타들어 가는 소리에 기분이 좋았다. 이서가 불쏘시개로 불씨가 있는 부근을 뒤적인다. 불꽃이 더 화르르 타올랐다. 강아지가 그 옆에 누워 이서의 무릎에 얼굴을 비볐다.
“너도 이름이 있어야 할 텐데.”
머리를 몇 번 쓰다듬어 주고 안아 올려 마당으로 나오자, 좋다는 듯 낑낑거린다. 휘준은 그냥 두라고 했지만 흔한 이름이라도 좋으니 지어 주고 싶었다.
“초코? 보리? 고양이?”
생각나는 대로 던져 보기는 했으나 자신이 듣기에도 영 별로였다. 강아지도 뚱해 보이는 게 마치 사람 말을 알아듣는 것 같았다.
“뭐로 하지…….”
귀가 연한 갈색이라 보리로 지으면 딱 맞을 것 같은데.
“컹, 컹.”
그때, 강아지가 밖을 보며 짖어댔다. 아직 어린 녀석이라 있는 힘껏 짖어도 낑낑거리는 느낌이었다.
“둥가둥가 해 줄까? 밥 줘?”
강아지가 짖는 문 쪽에는 아무도 없었다. 휘준도 이웃집의 지붕 수리를 돕는다며 나간 지 오래였다.
* * *
“너 귀신 봐? 아니지?”
픽. 바람 빠진 소리를 내며 계원이 담벼락 뒤로 몸을 숨겼다. 담이 낮아 쭈그려 앉아야만 몸이 숨겨졌다.
“진짜 귀신 본 거 맞으면 한 번 더 짖어 봐. 아니지?”
조잘거리는 백이서의 말소리가 담 뒤에서 들려왔다.
계원이 다시 몸을 일으켜 슬쩍 담 너머를 훔쳐봤다. 개도 낯선 사람의 인기척을 알아차리고 짖는데, 백이서는 아무것도 모르고 귀신 같은 소리나 해댄다. 개도 어디서 데려왔는지 꼭 자기 같은 걸 안고는 도란도란 떠들고 있었다.
백이서의 위치를 알려 준 건 다름 아닌 강지묵이었다. 어머니의 회사를 나오는데, 그가 기다렸다는 듯 로비에 있었다. 못 본 척 지나가려는 계원에게 먼저 백이서를 찾냐며 말을 붙여 온 것도 그였다.
‘할 일도 없는 새끼.’
백수도 그보다는 덜 한가할 것이다. 원래가 음흉스러운 구석이 있는 인간이라 어떻게 알아냈는지는 궁금하지도 않았다. 아주 재미있다는 얼굴로 들고 있는 주소만 궁금했을 뿐이다. 설마 하는 마음 반, 의심 반으로 손에 들린 주소를 뺏어 찾아온 곳에 정말 백이서가 있었다.
“귀신보고 짖은 거면 이름 안 지어 준다.”
짐짓 엄포를 놓는 목소리에 계원이 참지 못하고 피식 웃는다. 그 말을 알아들으면 그게 개인가. 사람이지.
‘어떻게 해야 할까.’
역시 자신은 백이서를 놔줄 생각이 없었다. 절대로.
처음에는 백이서를 찾자마자 끌고 가려고 했다. 들고 차에 실으면 끝이었다. 마당 따위 없는 오피스텔 같은 데를 얻으면 지금처럼 도망가는 일도 방지할 수 있다. 서휘준이나 이진강뿐만이 아니라 주위에 있는 건 전부 치워 버리면 된다. 진작에 그랬어야 했다.
며칠을 고민한 끝에 내린 결론은 그거였다. 자신은 놔줄 생각이 없으니, 잡아 놓을 구실이 부족하면 더 만들면 된다. 애초에 말 잘 듣겠다는 약속을 몇 번이나 저버린 것도 백이서다.
그런데 막상 보니 쉽사리 행동으로 옮겨지지 않았다. 귀양이라도 온 양반처럼 유유자적 지내는 모습에 속이 뒤틀리면서도, 손목이나 얼굴에 살이 오른 걸 보니 이것도 나쁘지만은 않았다. 더 뽀얘진 얼굴에는 뭘 하고 있던 건지 검댕이 양쪽으로 죽죽 묵어 있었고, 추운 날씨 탓에 눈 아래 피부가 온통 홍조로 가득했다. 한 입 베어 물면 찐빵이나 과일처럼 톡. 떨어져 나올 것 같은 볼이다.
“…….”
그냥 끌고 가는 거로는 안 된다. 부족하다. 차라리 구슬려야 했다. 어떻게 구슬려야 할까. 어떻게.
* * *
“미쳤어?!”
김건이 기절이라도 할 것처럼 뒷목을 잡고 엎어지는 시늉을 했다. 차계원이 한심하다는 얼굴로 그를 내려다봤다.
“지금 혼자 예능 찍어요?”
“예능? 이게 예능이냐? 나한테는 다큐멘터리야. 다큐멘터리.”
그는 오늘 친한 기자 몇 명에게서 연락을 받자마자 부리나케 달려왔다. 대부분 정말 이대로 기사를 보도해도 되냐는 확인 연락이었는데, 그 기사 내용인즉슨 계약 해지의 책임이 모두 차계원에게 있다는 것이었다.
“둬요.”
건은 거품이라도 물고 쓰러지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나 차계원은 남 일을 이야기하듯 태연자약했다.
“대체 왜 그런 리스크를 남겨야 하는데? 우리가 뭐 하러!”
“좀 더 구슬리기 쉬울 거 같아서?”
차계원이 능청스럽게 어깨를 으쓱인다. 그 여유로운 태도 탓에 애먼 건의 속만 타들어 갔다.
“무슨 생뚱맞은 소리야!”
“굳이 따지고 들면 내 잘못도 맞잖아요?”
“맞으면 뭐? 계약 끝났으면 끝인 거지. 어떻게 생각하느냐도 대중들의 몫이야. 이미 저쪽 탓이 된 걸 뭐 하러 바꿔 줘!”
“이렇게 되면 백이서네 정말 망할걸요. 그건 안 되죠.”
마지막 말을 속삭이듯 말하는 통에 건의 목덜미에 소름이 돋아났다. 저 빌어먹을 자식의 속내가 몹시도 궁금했다. 막말로 남이 망하든 말든 지가 언제부터 그런 걸 신경 썼냐는 말이다. 차계원은 길거리에서 구걸하는 이의 돈 통도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차 버릴 수 있는 인간이었다.
“너 원래 양심 없는 놈이잖아. 성격 개떡이잖아. 갑자기 양심 챙길 필요가 있어? 진짜 이렇게 마무리되게 할 거야? 다 떠안고?”
기사가 하나둘 뜨면 또 너도 나도 비슷한 내용으로 기사를 낼 것이다. 그럼 차계원 쪽으로 화살이 돌아올 테고, 자칫하다가는 예전에 스쳐 지나갔던 인성 논란들까지 대두될 수 있다. 그 후에는 측근이니 스텝이니 주장하며 하나둘 나와 떠들어대겠지.
“그딴 거 좀 떠안는다고 안 죽어요.”
“난 지금 죽기 일보 직전이거든? 대표님하고도 다 틀어진 마당에 이럴 필요가 있냐고! 필요가! 안 보면 땡인 사람인데!”
“누가 틀어졌대요.”
순간 차계원의 목소리가 단박에 낮아졌다. 싸늘하게 내리꽂히는 시선에 방금까지 눈에 뵈는 것 없이 고래고래 소리 지르던 건이 흠칫 몸을 떨었다.
“누구랑 누가 틀어졌냐고요.”
“그야, 너랑……. 백이서 대표랑…….”
“그런 일 없어요.”
* * *
휘준은 오늘도 집을 비웠다. 지붕 수리가 마무리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덕분에 이서는 제가 주어진 무료함을 마음껏 느끼고 있었다. 하루하루가 평온한데, 마음 한구석에 자리 잡은 초조함과 불안은 단 한 순간도 사라지지 않았다. 아무것도 나아지지 않은 상황에서 언제고 끝날 다른 이의 평온을 빌려 쓰는 것만 같았다.
컹. 컹.
아직도 이름을 지어 주지 못한 강아지가 마당에서 계속 짖어댔다. 손님이 온 것 같았다.
“누구…….”
이서가 신발을 대충 꺾어 신고 방에서 나왔다. 그리고 고개를 들자 익숙한 인영이 앞에 서 있었다.
“차계……!”
잠깐 멈칫한 이서가 필사적으로 앞으로 튀어 나갔다. 방향을 정할 것도 없이 무작정 뛰었다. 이서가 상상하던 불길함이 실체가 되어 눈앞에 나타났다. 그가 이 집의 마당에 서 있는 게 전혀 부자연스럽지 않았다. 예상했다. 차계원의 성격이라면 자신을 찾아올 거라는 것쯤은.
“놔, 놔!”
그러나 이서는 있는 힘을 다해 달린 게 무색하게, 몇 걸음 채 떼지도 못하고 붙들렸다. 그는 그대로였다. 똑같이 손쉽게 이서를 잡고, 궁지로 몰아넣을 수 있었다.
이서가 목을 잔뜩 움츠렸다. 차계원이 금방이라도 제게 화를 낼 것 같았다. 힘이 잔뜩 들어간 그의 손에 잡힌 어깨가 아렸다. 도망치면 죽이겠다던 선득한 음성이 귓가를 스쳤다.
“내가 낸 거 아니에요.”
그러나 머리 위에서는 조금도 예상하지 못한 소리가 들려왔다. 이서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마지막에 본 날보다 조금 야윈 차계원은, 잘못에 대한 결백을 주장하기라도 하고 싶은 사람처럼 반복해서 말했다.
“뭐……?”
“기사. 이번엔 내가 낸 거 아니라고.”